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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Dec 20. 2019

1인분의 달콤한 삶

어쩌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제 20대를 굳이 표현하자면 '전력질주'랄까요. 그냥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근래에서야 합니다. 몇 번 이직을 하고 이젠 안주 혹은 망설임의 시간을 가지는 저란 사람은 마침내 조금은 안정이 되었습니다. 요동치는 마음들과 스쳐 오는 기회들에 마음이 두근대지만 그뿐입니다. 지나가면 그만일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않고 소중한 기회들에는 전력을 다해 임합니다. 그렇게 하루들을 메꾸고 나면 달콤한 저녁 혹은 새벽 시간이 기다립니다. 오롯이 1인분의 삶을 담기에 충분한 공간에 들어와 1인분의 삶을 정리해 나갑니다. 도착하자마자 방의 온도를 올립니다. 노트북도 켜둡니다. 종일 추위에 떨었을 바닥이 제법 따끈해지고 노트북이 얼마간 저를 기다린 후면 저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지요. 마음에 드는 잠옷을 골라 입고 수건은 세탁기에 넣습니다. 청결한 잠옷을 꺼내 입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입가엔 미소가 자리 잡습니다. 밀린 설거지도 하고요. 바닥도 닦습니다. 날이 밝으면 세탁기를 바로 돌릴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저는 노트북을 마주하고 앉아 이렇게 일기를 씁니다. 사실 저는 행복한 날들의 기록은 굳이 일기에 담지 않습니다. 행복을 그대로 만끽하는 데도 벅차서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말들을 정리할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행복하니 그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차오르는 달콤함, 상쾌함을 만끽할 뿐입니다. 그 순간 제가 가장 고마워 하는 것은 제 자신, 과거의 제 자신, 그를 이룬 역사와 물결들입니다. 흔히 한 마을 한 사람을 만든다고들 합니다만, 어쩐지 외롭게 컸으며 여기 저기 떠돌았던 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느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제가 또렷하게 알았던 것은, 제가 스치는 모든 길, 대중교통, 사람들, 물건들, 그 작은 공기들까지 그 무엇 하나 저를 키우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이죠.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련은 사람을 키운다고들 하나요. 시련은 제게 일기를 써나갈 힘을 주었고 현실을 타개해 나갈 묘책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시련이 닥치면 저는 무너지기보다는 일어서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어쩌면 불안정하고 불우했던 제 어린 시절의 나날과 20대 중후반까지의 나날을 어쩌면 애정으로, 나아가 이제는 감히 연민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 혹은 여유 따위가 생겼습니다. 속했던 당시에는 지옥이라 여기면서도 현실을 감히 지옥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며 이 시련이 나를 키울 것이라 여기며 담금질환 환경 따위로 치부했죠. 이제는 압니다. 연민도 할 수 있습니다. 너 참 힘들었구나, 그럴 수밖에 없지 사람이면 따위의 말로 제3자가 말하듯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인정을 하는 셈이죠. 그런 환경에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따위의 것을요.


안 좋은 일을 몇 번이고 당했던 회사에서의 일은 실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듯 합니다. 술자리의 음담패설에 치를 떨고 마감 후 탄 막차 지하철에 오가는 성별 구분없는 취객의 음담패설에 이어폰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자리에 그저 앉아 멍을 때리며 지나가볼 수는 있을 만큼 나아지긴 한 듯 합니다. 아뇨. 거짓말입니다. 이런 합리화를 하면서도 당시의 스트레스를 던지지 못하는 걸 보면 저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과는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혹자는 무성욕자니 몰라서 그러느니 따위의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사람은 다 다르니 그저 그런 사람도 있겠구나 하고 서로 인정하고 말면 그만인 일입니다. 여전히 저는 안 좋은 일을 당했던 경험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냥 그런 일 따위, 이 긴 인생에서 티끌 하나였다고 그렇게 강제로 치부하면서 치유했다고 저를 계속 속이면, 언젠가 제 스스로도 속아지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 따위로 저는 즐겁게 매일을 보냅니다. 어쩌면 살짝 미쳐야 행복했던 게 올해 중후반까지였다면 말입니다. 오늘의 저는 그냥 자꾸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따위의 노래를, 예전에는 일부러 스스로 세뇌하려 불렀다면, 지금의 저는 비교적 참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저 웃으면서 젊은 날의 아픔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될 거라 믿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 여유를 가진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것은 여유가 아닌 어떠한 합리화의 소산일 것이다 따위의 말로 제 스스로에게 걱정을 건넸습니다. 어떻게 한 삶에서 폭력의 유형을 그리 많이도 겪고 꺾이지 않고 살았느냐 따위의 말로 제 스스로를 칭찬하면서도 시간이 지나 곪았던 상처들은 저를 종종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 상처들은 '네가 나를 잊는 게 정의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상처를 그저 품고 '그게 정의냐, 가해자를 처벌해라' 하고 외치는 제 상처를 그저 품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 그럴 용기가 없다는 것을 절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니라 하지만, 세상은 뒷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이기에, 저는 제 뒷배인 제 자신을 그런 모험의 구덩이로 던져 넣을 순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살뜰히 1인분의 삶을 돌보며 이 달콤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상념을 없애는 것입니다. 상처가 찾아올 순간을 삭제하는 것입니다. 몸을 돌보고 집을 돌보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행위로서 저는 충족이 되고 완전한 존재가 된다며 제게 세뇌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행위들은 얼마간의 행복을 대체로 보장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저와 같은 상처 따위의 것으로 아파 하는 귀하들이 있다면 감히 1인분의 달콤한 삶을 누리시라고,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니, 그대들의 삶을 그런 이유로 해치지 말라고 감히 당부해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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