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몸을 옮겼다. 나는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새로운 일은 바로 시작되었다. 부속 건물 실험실하나가 제록부 소유가 되었고 그곳을 드나드는 나와 수진, 그리고 최훈이 출입 지문등록을 마치고 나서였다.
약물의 이름은 미정. 화학반응 미정. 영향도 미정. 뭐든, 죄다 미정.
아직 약물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그 화학물질에 대해 연구하는 게 우리의 새로운 일이었다.
발단은 모 대학에서 발견한 배양세포였다. 마약 같은 물질인가 넘기려던 연구원이 마약과 다른 점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서른 다섯 번 실험 중 단 한 번에 그친 경우로 확신을 가지기 어려웠다. 일단 의뢰로 넘어온 도명제약이 이 화학물질을 분석하기로 했다.
도명제약으로 건너오면서 물질의 명칭은 네르비카풋(NerviCaput)로 명명되었다. 직역하자면 정신머리라는 뜻인데, 물질이 신경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로인한 뇌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지 확실치 않아 정해진 사항인 모양이었다. 그즈음 되니 나로선 도명제약의 센스는 대충 어디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섯 글자도 무분별하게 발음하기에는 긴 감이 있어 나는 그걸 줄여 ‘네카’라고 불렀다. 보통 영문 앞자리를 따서 N.C(엔씨) 정도로 부르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지만 나는 꾸준히 네카를 고수했다. 엔씨는 어쩐지 입에 안 감긴달까.
무슨 음료수 이름 같네요. 수진은 웃어넘겼지만 그 뒤로 그녀도 네르비카풋을 네카(N.C)라고 말했다. 괜스레 으쓱한 느낌이 들었다.
네카는 여느 도파민 생성물질과 마찬가지인데다 항생제 역할을 담당하는 구조로 되어있었지만 상용화할 정도는 아니었다. 스크리닝을 해도 크게 반응하는 효소가 없었기에 무슨 실험을 해도 나로썬 시큰둥했다. 정말 이게 유용한 일일까. 이러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그땐 어떻게 되나.
하지만 최훈의 의견은 좀 달랐다. 그는 미세한 차이를 발견했고 그거 하나만을 붙잡고 늘어졌다. 네카에 무섭게 파고들던 최훈의 눈은 어쩐지 희번뜩했다. 그때까지도 석탄가루가 흩날린 듯 희미했던 그의 인상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괜히 괴짜는 아닌가 보다고,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훈이 발견한 사실. 일반 호르몬 작용에만 영향을 미치는가 싶던 그 물질은 일정 잠적기 이후 일반 호르몬 작용이 아닌 뇌내작용에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초반에 호르몬 반응이 일어난 경우에 한했다. 확신하지 못하는 건 순전히 경우의 수 때문이었다. 동물실험의 한계는 여느 물질이나 매한가지였지만 최훈은 인간이 부족하다고 매번 한탄했다.
동물의 뇌내작용은 성장기를 지난 인간의 뇌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겠지. 나는 속으로만 조용히 그의 말을 곱씹었는데, 그렇다고 뭐 어쩌라는 건지. 라고 툴툴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것과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나는 그 차이를 간과하고 있었다.
최훈만큼은 아니지만 수진도 꽤나 열정적이었다. 그녀는 최훈의 말을 대부분 경청하다가 묵직한 한마디를 던지는 편이었는데, 그게 열에 여덟은 최훈의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는 내 말에 열에 아홉 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음..사실 열 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기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든 집중하기 시작하면 눈을 뗄 줄 모르는 그가 목근육을 써 말한 사람의 얼굴을 쳐다본다는 건, 그만큼 그의 번쩍이는 뇌 작용을 건드렸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최훈의 네카는 수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왠지 모를 회의감과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건 세 사람이 같이하는 일에서 나만 뒤떨어진다는 자격지심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최훈을 보면 어딘지 모를 화가 부글부글, 그러나 끓어오르지는 않고 미적지근한 상태로 지속되었고 수진을 보면 무언가가 털썩털썩, 나를 패대기치는 듯한 상실감이 따라왔다.
그래도 우리는 꽤 좋은 팀이었다. 나는 적당히 받아치는 법이 없었고 무조건 반문하거나 질척이는 스타일이라 최훈을 귀찮게 했다. 그런 내 성격이 튀어나오면 사회생활이 힘들 거라는 소리를 대학원 시절에도 듣기는 했었지만 최훈은 내게 감정적으로 울분을 토해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내 말에 생각을 하고 받아쳤다. 그러면 나는 마지못해 인정하거나, 짜증 나니 다시 비스무리한 질문은 던지는 게 일상이었다. 그 또한 최훈은 싫은 내색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마 호오의 감정 없이 나를 대한 듯 했다. 그래서 고개를 돌아보지 않아도 내 말을 들어주고 있구나. 나를 무시하지는 않는구나 하고 느끼게 만들었다. 재능이라면 재능이었고, 배울 점이라면 제대로 배워야 할 좋은 점이었다.
때 아닌 늦은 감정 반향으로 나는 그 시기를 기억한다. 그래서 네카는 내 마음에서 뒷전을 차지했다. 그래서 보지 못한 것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