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씨는 잠복기가 길지."
"...“
"내 눈이 이렇게 된 것도 한참이 지나서였네. 누런 눈꼽이 끼는가 싶더니 흰자위부터 서서히 덮더라고. 그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지."
그가 평이하게 말하는 동안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래야할 것 같았다.
"의사는 안구적출을 하고 의안을 끼는 게 미관상 나을 거 같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소. 이건 일종의 증거 아니오? 도명이 내게 낸 사라지지 않는 상흔 같은 것. 내가 구태여 그걸 없애면 누가 알아주나."
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소리가 너무 커 그에게 들렸을 것이다.
“그 아이도 나를 찾아왔지.”
그는 거기까지 말한 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느릿느릿한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제안을 했고, 나는 받아들였어. 그렇게 하겠다 마음먹은건 내 의지지. 자넨 어떠한 의지가 있어서 내게 그걸 물어보러 온 거요?”
노란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정말 보이지 않는 걸까? 의지라니. 나한테 그런 건 없었다.
“도명제약은 내 꿈을 망쳤다.”
그 말엔 내가 흠칫했다. 도진요 사이트에 가입할 때 적은 한 마디였다.
“많은게 담겨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인가?”
"저는.. 지금껏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어르신처럼 뚜렷한 의지도 없구요. 다만,"
내가 덧붙였다.
"치호를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어르신의 슬픔과 고통의 깊이는 제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죠.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알아야합니다. 오래전 저는 도망쳤습니다. 어리석고 멍청했어요. 이제는 아무것도 모른채로 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제 자신을 제대로 보는 첫걸음이라는 생각이..이제서야 드네요."
내가 말을 끝맺는 동시, 주위가 침묵에 휩싸였다. 적어도 그렇다고 느꼈다. 말을 하면서 깨닫는 것들이 있다. 내가 내뱉는 문장들이 다시 내 귀로 들어왔다. 치호는 일종의 방패였다. 내가 그 시절을 피할 수 없다면 나를 건드리는 일종의 계기가 필요한 셈이었다.
실제 나는 그저 그렇게 살고 있었다. 수진은 젊은 채로 멈췄고 최훈은 속을 알 수 없게 늙었다. 난 그 중간에 서서 그냥 있었다. 그래도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날다람쥐2호를 만나러 왔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그가 내게 나불나불 날다람쥐1호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문득 수진에 대한 그리움이 치고 올라왔다. 여지껏 이런 적이 없어 당황함이 앞섰다.
내 옆에 서면 보이던 동그란 두상. 질끈 묶은 머리는 오후가 되면 느슨해져 드문드문 잔머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녀의 염색머리가 늦은 오후 햇살에 어떤 색으로 빛났던지.
이것 봐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부르던 목소리와 손짓. 매번 새로 공부하고 알아가는 아이처럼 잔뜩 상기되던 시선의 방향. 너무 생생해 어제 봤다고 해도 믿을만한 장면들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수진이 없다는 사실도 절절하게 나를 통과해갔다.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말을 꾹 참고, 올라오는 묵직함에 피할 새도 없이 나는 허우적거렸다. 어지러움으로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이게 모두 그리움이고, 그 대상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딱 울고 싶었다.
가만히 앉아있던 그가 콧김을 푹 내쉬었다. 화가 많이 났나 싶었는데 고개를 들고 쳐다본 그의 얼굴이 묘하게 평화로웠다. 그는 내가 바라보자 화답하듯 다시 한 번 코로 거친 숨을 쉬고선 말했다.
"나 이제 가봐도 되지?"
"네?"
"간다우."
그가 미적미적 일어나자 나는 후다닥 일어서 그를 부축하고자 했다. 그는 나를 가볍게 제지하고 한쪽 발에 힘을 실어 우뚝 일어났다. 이대로는 그냥 간다.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르신 존함이라도..아, 저는 신창준이라고 합니다."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니. 당황함에 입술 끝을 깨물었다.
"..나는 자네가 기억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내 말을 자르고 그는 말을 이었다.
"어떤 시절의 기억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거든. 마치 방금 전처럼 생생해. 그 아이는 그걸 중심이라고 말하더군."
놀랍도록 평이하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이제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 나였다. 나는 그를 잡을 수도 없고, 그의 이름을 물을 수도 없었다. 그는 내가 담당하던 대상자 중 하나였다. 도저히 내 기억 속에는 없는. 하지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그 시절부터 말이다. 노란색 눈이 나를 주시했다. 그 눈동자 뒤쪽 동공이 나를 매섭게 찌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어깨에 잠시 손을 올려 두어 번 두드렸다. 죄송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데도 죄악감에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처음으로 내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자한 할아버지의 얼굴이, 마치 나를 아이보듯 하는 눈코입이 그의 얼굴에 새겨져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가네."
그가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몸을 옮겼다. 나는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