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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Aug 06. 2024

3. 소설이 대체 뭐길래

소설의 효용성


나는 소설을 쓴다. 하지만 사실 나의 시작은 '시'였다.
초등학교 때 시를 지어 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시가 학교 축제 때 전시한다 했다. 엄마가 캘리그래피를 의뢰해서 시가 무척 커다래진 게 기억이 난다. 정갈한 글씨에 어린 여자아이가 그려진 시. 나무액자에 넣으니 그럴싸했다. 그 액자는 한동안 우리 집 현관문 옆, 거울 맞은편에 걸려있었다.
이런 모든 게 기억이 나는데도, 내가 썼던 그 시만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생님에 대한 시였던가. 그리워하는 곰인형에 대한 시였던가.
남은 종이라도 있을까 싶어 중학생 때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어쨌든 어린 나는 시의 매력을 말로는 하지 못해도 감각했다. 시는 운율이 있고, 리듬이 있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응축해서, 비유와 은유로 아주 간결하게 담아낸다는 점도 좋았다. 당시에는 그런 게 어떤 감각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울림이 깊게 남는다는 점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갈하고 깔끔한 밥상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던 나는 어느 날부턴가 소설을 쓰고 싶어 진다.

*
중학생이 되면서 부모명의 없이도,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내 이름과 사진이 담긴, 코팅한 도서관출입증이 얼마나 신성해 보였는지 모른다.

초등학생까지 들어갈 수 있는 아동열람실은 언제나 시끄러운 편이고, 애들이 보는 책이 수두룩했다.
(원래 아이들은 본인이 다 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심각한 편이다)
나는 언제나 맞은편에 있던 일반열람실을 동경했다. 두 톤쯤 어둡고, 높고 두터운 선반이 가득한 일반 열람실. 그곳에서 책을 꺼내던 어른들은 눈을 내리깔고 책에 집중했다.


14살이 되었고, 나는 일반열람실에 들어갔다. 초반에는 외국소설을 읽었다.
너무 더럽지 않은 책을 고르다 보니, 비주류를 읽게 되지 않았을까? 그즈음 만화에 푹 빠지기 시작한 것도 있었고, 중학교에 처음 들어가 숙제로 읽었던 '창가의 토토'가 인상 깊었던지라, 단순한 사고의 연장선으로 일본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어려운 외국사람들의 이름을 외워가며 소설을 읽었다.
아동열람실을 무시한 대가는 꽤 컸다. 어른들이 읽는 소설 속에는 한 장 건너 모르는 단어가 가득했다. 엄마, 아빠한테 물어보는 것에도 시간적 한계가 있어서 나는 사전을 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낙서를 할 수는 없어서, 공책을 펴놓고 하나하나 단어를 써 내려갔다.
어째서 그렇게도 흐름이 끊기는데 나는 소설을 읽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소설이 재밌었기 때문이겠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운명적인 어떤 계기가 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저 소설을 좋아하는 꼬맹이였고, 여러 책을 읽으며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다채로운 감정을 느꼈다. 어떤 책은 즐거웠고, 어떤 책은 이상했다. 어떤 책은 쓸쓸했고, 어떤 책은 이상하게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소설 속 인물의 방이 내 방처럼 느껴지고, 동네와 사람들이 겪은 것처럼 머릿속에 그려질 때,

어떤 순간에 책 속 어느 장면이 떠오르면 잔잔히 행복해질 때.
그런 식으로 시간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독서는 직접경험이 아닌 간접경험이라고, 세상을 향해 진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지만 어린 시절 소설을 읽는 것은, 나의 직접경험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하고 싶다.
주인공의 여정, 관계, 생각에 푹 빠져 나는 누구든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왔다.
내 눈앞에 있는 책을 보며 나만한 또래의 아이에게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감각을 주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그런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소설가를 꿈꿨다.

*
의사가 되고 싶으면 의대에 가서 의사면허를 취득하면 되고, 변호사가 되고 싶으면 법대에 가서 사법고시를 보면 된다. 기타 내가 아는 웬만한 직업들은 모두 그런 과정이 존재했다. 결국에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라는 선행과정이 있었지만 막연하진 않았다. 내가 그걸 해내느냐 아니냐 와는 별개로 방법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른들에게 물어도, 지식in에 물어도, 소설가가 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없었다. 소설가는 달랐다. 소설가는 두리뭉실했다.
소설을 쓰면 소설가인가?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으면?
책이란 건 어떻게 내는 거지? 도서관에는 어떤 식으로 책이 들어오는 거지?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던 어린 소녀는 좀 더 크면 알게 될 거란 초긍정마인드로 그 시기를 넘겼다.
입으로만 작가가 되기를 꿈꿨던 나는 그저 읽기만 했다. 머릿속을 맴도는 이야기는 환상적이었지만 종이에 적어 내리면 빛을 잃는 느낌이었다. 내 실력은 초보자 수준도 아니었다.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그런 못 볼 원고를 쓰는 기간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몰랐다.
가끔 친구들이 좋아하는 연예인과 그 친구들이 연애하는 소설을 장난처럼 써주고, 환호를 받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몇 번의 칭찬으로 나는 재능이 있으니 지금은 공부를 하고, 나중에 제대로 써보자고 넘기는 우를 범했다.
살면서 느끼는 건 이거다. 나중은 없다는 것. 마음먹고 나서는 그 아무리 허접해도, 일단 시작해야 뭐라도 해낸다는 것.
나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취업한 봄. 더 이상 대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날 것의 내 글을 마주하고 나서야, 내가 이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 얼마나 열망할지 깨달았다. 아주 늦은 봄이었다.

*
꿈을 외면한 대가는 9년의 시간으로 채워갔다.
누구는 한 작품 쓰고 문단의 극찬을 받는데, 누구는 그냥 후루룩 써 내린 글이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누구는 드라마화 영화화가 착착 되는데..!
나는 그 '누구'가 아니었다.
미치도록 부러우면서도 인정해야 했다. 그 글들은 내가 봐도 매력적이고, 사람을 몰입하게 만들고, 진한 여운을 남겼으니까.
부러워만 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나 역시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쓰고 싶었다. 아니 '싶었다'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냥 써야 했다. 계속 쓰고 쓰고 또 쓰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좌절도 했다. 희망차게 다시 시작도 했다. 그냥 그런 일련의 반복이었다.

*
나는 소설을 썼다. 단편도 20개 이상, 장편도 4개 정도. 그리고 그중 하나가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아직도 소설을 쓰고 있다.
나는 언제까지 소설을 쓸까?
그건 사실 모르겠다. 하지만 쓰지 않을 생각은 없다. 나는 계속 이 지난하고 행복한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소설을 읽고, 저는 소설을 쓰고 싶어 졌어요"



너와 나의 세상, <세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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