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녀의 세계는 두 개의 숫자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는 위로 향했다. 손목에 찬 다이브 컴퓨터 액정 위에서 의기양양하게 빛나는 다이빙 로그수. 150, 200, 250, 300… 바닷속에 몸을 던져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 시간이 늘어날수록 숫자는 그녀의 세포에 새겨진 훈장이자 이 푸른 세계와 나눈 교감의 깊이를 증명하는 성실한 연대기처럼 쌓여갔다. 그 숫자가 명징하게 찍히는 것을 볼 때면, 그녀는 잠시 세상의 모든 무게를 잊고 자신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된 듯한 경이로운 착각에 빠졌다.
다른 하나는 아래로 향했다. 밤이면 어김없이 유령처럼 찾아와 그녀의 잠을 앗아가는, 휴대폰 액정 위에서 차갑게 빛나는 통장 잔고. 월세와 생활비, 비자 연장 비용으로 숫자는 매달 바닥을 향해 맹렬하게 곤두박질쳤다. 다이빙 로그 기록 숫자가 그녀를 이 섬에 머물게 하는 이상이라면, 통장의 숫자는 그녀를 이 섬에서 끊임없이 밀어내는 냉혹한 중력이었다. 이상과 현실은 그렇게,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그녀의 영혼을 양쪽에서 잡아당겼고, 그 팽팽한 긴장감에 그녀의 신경은 끊어지기 직전의 낡은 기타 줄처럼 위태롭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이빙 강사가 되기 전, 그녀는 온전히 자신을 위해 많게는 하루에 다섯 번, 그러니까 오전 보트 다이빙 두 번에 오후 두 번, 나이트 한번을 꽉 채워 다이빙하곤 했다. 하지만 강사가 된 이후엔 다이빙 교육생들의 코스 교육 스케줄에 맞춰 다이빙하는 게 전부였다. 교실에서 이론 수업을 하는 날도 많았고, 교육이 없는 날은 다이빙 센터 앞에 하릴없이 앉아 지나가는 관광객이나 여행자가 다이빙에 관해 물으면 대답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다른 다이빙 센터 강사들은 매일 밤, 파티가 벌어지는 해변 바에 가서 술을 마시며 사람들을 만나고 섬에 머무는 동안 다이빙을 한다면 반드시 자신을 찾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인스타그램을 교환했다. 그게 이 섬에 사는 다이빙 강사 대부분의 또 다른 업무이자 일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강사들에게 호객 행위를 강요하지 않았다. 이 섬에서도 마치 또 하나의 섬처럼 혼자 뚝 떨어져 있는 듯한 그는 모든 것에 초연했다. 그녀가 일하는 다이빙 센터에 제 발로 찾아오는 손님들 대부분은 10년 전 이 섬에서 클로드에게 다이빙을 배우고는 그 뒤로 해마다 겨울이면 꾸준히 그를 찾아오는 유럽인들이었다. 손님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클로드는 늘 느긋하고 심드렁한 태도로 다이빙 센터 매니저 일을 해나갔다.
사람을 대상으로 돈을 받고 무언가를 제공하는 비즈니스엔 무조건 ‘성장’과 ‘팽창’, ‘플러스’만 있다고 배웠고 그게 아니라면 ‘실패’와 ‘수축’, ‘마이너스’라는 이름표를 가차 없이 붙이는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그녀는 막상 클로드의 방식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한동안 그녀는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이렇게 설렁설렁 살다가는, 찾아오는 손님만 하염없이 기다리다가는 그녀가 외면해 온 현실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타나 그녀를 구석까지 몰아세우고 야단을 칠 것이다. 귓가에는 부드러운 파도 소리 대신, 통장 잔고의 숫자가 쇠를 긁는 소리를 내며 날카롭게 맴돌았다. 며칠째 밤새 그녀를 괴롭힌 불안은 혓바닥 아래에서 희미하게 맴도는 쇠 맛처럼 선명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평소보다 일찍 센터로 향했다. 밤새 끓어오르던 불안은 동이 틀 무렵에는 차라리 비장한 결심으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더 이상 혼자 끙끙 앓으며, 어설픈 서울의 방식을 흉내 내다 자기혐오에 빠질 수는 없었다. 부딪혀야 했다.
센터 입구의 낡은 나무 테이블. 클로드는 여느 때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영국식 티가 담긴 머그잔을 앞에 두고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그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의자가 모래에 끌리는 서걱이는 소리가, 그들 사이의 평온한 아침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클로드가 스크린 넘어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봤다.
“클로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녀의 목소리는 잠을 설친 탓에 조금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이전에는 없던 단단한 심지가 박여 있었다.
“물론이지. 왜 그래?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클로드는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의 눈에는 ‘또 무슨 철학적인 고민이라도 시작하려는 건가’ 하는, 익숙한 예상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시시껄렁한 영국식 티를 마시며 클로드의 허무주의와 실존주의를 오가는, 앞뒤고 맞지 않고 논리에도 어긋나고 오류와 결함 투성이인 엉터리 철학 이야기를 나누는 걸 즐겼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농담 아니야. 철학도 아니고. 이건 지극히 현실적인 얘기야.”
그녀는 테이블 위로 비장한 듯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그녀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의 무게만큼 단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클로드, 당신을 매니저로서 친구로서 존중해. 이 센터의 운영 방식도 좋아하고. 시끄럽게 호객 행위를 하지 않는 것도, 돈벌이 보다는 바다 그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전부.”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클로드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며 기다렸다. 그의 시선은 분석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심해처럼 깊고 고요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야. 나는 15년 동안 이곳에 뿌리내린 사람이 아니라고. 이제 막 여기에 발을 붙이려는 사람일 뿐이지.”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내 통장 잔고가 바닥나고 있어. 비자도 연장해야 하고, 월세도 내야 해. 전부 돈이 필요한 거야. 나는 이 섬에서, 이 바다에서 계속 살아가고 싶어. 그러려면… 일을 해야 해. 다이빙 코스를 맡아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존의 언어로 말했다. 미사여구나 비유 없이, 오직 현실의 무게만을 담아서.
클로드의 얼굴에서 냉소가 옅어졌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그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을 만들었다.
“그래서, 너도 저들처럼 되시겠다? 해변의 바에 가서 술에 취한 여행객들한테 다이빙을 팔고, 인스타그램에 #LiveYourBestLife 같은 해시태그를 남발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지만, 그 어떤 비난보다 아프게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면 어떡해야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길을 알지 못했다.
클로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낡은 머그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알아. 돈이 없으면, 바다도 없다는 거.”
그는 시선을 들어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피로나 냉소가 아닌, 아주 오래된 어떤 체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하나. 나는 이 다이빙 센터를 공장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어. 하지만 네 말이 맞아. 너는 살아가야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과, 그녀가 깍지 낀 손의 굳은살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너에게 더 많은 손님을 물어다 줄 수 없어. 그건 내 방식이 아니니까. 하지만 너는 나처럼,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도 아니지. 너는 글을 쓰는 사람이잖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야.”
클로드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규정에 가까웠다.
“그러니 네가 직접 찾아봐. 밤새 파티를 하고, 다이빙을 싸구려 기념품처럼 소비할 여행객들 말고, 진짜 바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 우리가 왜 이곳에 있는지, 왜 이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 그들을 찾아내는 건, 네 일이야. 이 섬에서 네가 너만의 방식으로 살아남는 법을 찾아야 해.”
그것은 그녀에게 온전히 떠넘겨진,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욕적이지 않고, 무책임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숙제이자 심오한 화두였다. 그는 그녀를 동정하거나 해결해 주는 대신, 그녀의 고유한 능력을 정확히 짚어내고 그것으로 스스로 길을 만들라고 말하고 있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 안의 낡은 기타 줄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