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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

by 조하나


클로드의 말은 그녀의 등 뒤에 남겨진, 지워지지 않는 낙인과도 같았다. ‘네 방식으로 살아남는 법을 찾아야 해.’ 그 말은 격려를 빙자한 추방 선고였고, 동시에 그녀가 애써 외면해 온 모든 현실을 날것 그대로, 이제는 오롯이 혼자 짊어지라는 냉혹한 통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은 방,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그 작은 섬으로 돌아와 낡은 노트북을 열었다. 경첩 사이사이에 바닷물의 소금기와 미세한 모래가 박혀, 열릴 때마다 삐걱, 하고 불길한 신음을 토해냈다. 하얀 화면 위에서 깜빡이는 검은 커서. 그것은 차가운 디지털의 맥박처럼, 혹은 그녀의 불안한 심장 박동처럼, 다음 행보를 집요하게 재촉하고 있었다.


‘나만의 방식.’ 참으로 근사하고도 공허한 말이다. 수십 년간 정해진 길 위에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것인 양 좇으며 단 하나의 방식만을 강요받아온 그녀에게, 그것은 나침반도 없이 망망대해 위에서 홀로 항로를 개척하라는 말처럼 아득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잠시 유령처럼 부유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익숙하고도 혐오스러운 단어들을, 마치 오래전 외웠던 주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듯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타깃 고객 분석: 20-30대 유러피안 배낭여행객

특징: 저예산, 즉흥적 소비, SNS를 통한 자기 과시 욕구 강함.

상품 차별화 전략: 타 센터 대비…’


손가락이 돌처럼 굳었다. 모니터에 떠 있는 단어들은 그녀가 서울에서 밤새도록 씨름하던 차가운 기획안의 언어, 모든 존재를 숫자로 환산하고 영혼마저 상품으로 취급하던 그 세계의 언어였다. 그녀는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쓰디쓴 무언가를 삼키며,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꼬따오 최고의 다이빙 체험!’, ‘#인생샷 #버킷리스트 #당신의_바다를_찾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그녀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신경질이 났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언어가 소멸되는 그 신성한 침묵의 세계를,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저잣거리의 싸구려 약장수처럼 포장하고 팔아야 한다는 사실. 그것은 신성모독이었고, 돌이킬 수 없는 자기 배반이었다. 그녀는 짐승처럼 낮게 신음하며, 거칠게 노트북을 덮었다.


밤이 되자, 그녀는 정처 없이 해변으로 향했다.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으로부터 단 한 뼘이라도 더 멀리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녀는 도망치는 데에는 도가 텄다. 도망에 대한 죄책감도, 수치심도 사라진 지 오래다. 해변의 바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가슴을 쿵쿵 울리는 베이스음과 망막을 찌르는 현란한 불빛, 그리고 취한 영혼들의 들뜬 고성을 쏟아내고 있었다. 끈적한 공기 속에는 쏟아진 맥주와 값싼 코코넛 향 선크림, 땀 냄새가 역겹게 뒤엉켜, 욕망의 칵테일이 되어 떠다녔다.


그녀가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서성이던 그때, 줄리앙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하나!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뭐 해? 술도 안 먹는 네가 웬일이야, 여기? 이리 와서 같이 한잔해!”


거절의 단어가 혀끝에서 맴돌기도 전에, 그녀는 줄리앙의 손에 이끌려 이미 여러 명의 여행객들이 둘러앉은 테이블로 속절없이 떠밀려 들어갔다.


“여기 내 친구, 하나야. 우리 센터의 아주 실력 있는 강사라고! 겉보기와는 다르지!”


줄리앙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테이블에 앉은 여행객들이 그녀를 미처 훑어보기도 전에, 그녀의 심장이 먼저 차갑게 가라앉았다. ‘겉보기와는 다르다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속으로 돼 내었고, 미간을 살짝, 상대방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만 찌푸리며 11시 방향 허공으로 시선을 뒀다.

줄리앙의 의도는 명백한 호의였다. 하지만 그 호의는, 그녀의 겉모습이 무언가 부족하거나, 의심스럽거나, 설명이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친구라 믿었던 그마저도, 무의식 중에 그녀를 ‘백인 남성 강사’라는 기준점에 놓고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서툰 방패는 그녀를 보호하는 대신, 오히려 그녀가 이 무리의 이질적인 존재임을, 누군가의 보증과 변호가 필요한 이방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걸려 있던 미소가 박제된 나비처럼 파르르 떨렸다. 줄리앙이 무심코 연 그 문으로, 이제 여행객들의 노골적인 시선과 편견이 쏟아져 들어올 터였다.


“오, 다이빙 강사라고?”


강한 억양을 쓰는, 근육질의 남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물었다.


“그래서, 오픈워터 코스는 얼마야? 저쪽 해변 끝 다이빙 샵에서는 9,000밧이라던데. 넌, 더 싸게 해 줄 수 있어?”


그 순간, 그녀가 수백 번의 다이빙을 통해 몸에 새긴 모든 경험과 지식, 바다에 대한 경외심은 ‘9,000밧’이라는 무미건조한 숫자 앞에서 힘없이 증발해 버렸다. 그녀는 시장 좌판에 진열된, 값을 흥정당해야 하는 생선 한 마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가 어색한 미소로 가격은 센터의 규정이라 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영국 남자가 술에 취해 혀가 꼬인 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는 그녀의 공간을 침범하며 바싹 다가앉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시큼한 땀 냄새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는 노골적으로 그녀의 가슴께를 응시하며 말했다.


“헤이, 스위티. 나는 자격증 같은 건 필요 없는데. 혹시… 당신이랑 단둘이 하는 ‘특별한’ 개인 강습도 가능해?”


그의 말에 테이블에서는 저질스러운 웃음이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특별한’이라는 단어에 담긴 축축하고 음흉한 의도를 모를 만큼 그녀의 영어는 서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한술 더 떴다.


“아시안 여자 강사가 영어로 가르치는 건 처음 보네. 아주… 이국적이야.”


‘이국적’. 그 단어는 칭찬의 가면을 쓴, 가장 잔인한 형태의 경멸이었다. 그녀의 전문성은 단숨에 지워지고, 그녀는 그저 ‘아시안 여자’라는, 쉽게 소비될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로 전락했다. 그녀가 탱크 밸브를 열고 잠그며 얻은 손바닥의 굳은살, 수압과 감압 이론에 대해 밤새 공부했던 시간들, 패닉에 빠진 교육생을 안심시켰던 침착함. 그 모든 것이 저들의 가벼운 시선과 더러운 농담 아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 순간, 클로드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진짜 바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 우리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


그녀는 눈앞의 이들을 보았다. 이들이 클로드가 말한 그 ‘진짜 사람들’인가? 이들의 눈에는 바다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오직 값싼 쾌락과 하룻밤의 유희에 대한 탐욕만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클로드의 말은 이 잔혹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그가 스스로 만들어 낸 아름다운 신화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 세상에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세상은 오직, 모든 것을 기념품처럼 소비하려는 자들과, 그것을 팔아 연명해야 하는 자들로 나뉠 뿐이었다.


그녀의 내면에 각인된 ‘굿걸 신드롬’은 그녀에게 소리치거나 화를 내는 대신, 그저 입꼬리를 올려 웃으라고, 이 불편한 상황을 부드럽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보이지 않는 실이 그녀의 입꼬리를 경련하듯 끌어올렸다. 그녀는 피가 배어 나올 만큼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화장실 좀…”


그녀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그들의 웃음소리가 끈적한 공기처럼 그녀의 온몸에 달라붙었다.


바의 불빛이 닿지 않는, 파도 소리만이 전부인 해변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그녀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눈물이 났다. 서러워서가 아니었다. 한없이 가볍고 하찮아진 자신의 존재가, 바람 앞의 먼지처럼 느껴져서였다. 여자, 아시안, 그리고 다이빙 강사. 세상이 그녀에게 붙인 이 모든 이름표는, 결국 그녀의 우울과 불안과 무기력의 좋은 명분이 됐다. 그녀는 그걸 이용해 늘 도망칠 궁리만 했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잠식해 온 그 익숙한 문장을, 하지만 모두가 절대 입 밖에 내어놓지 말라는 문장을, 이번에는 소리 내어 읊조렸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 문장은 이제 추상적인 무력감이 아니었다. 클로드가 심어주려 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 난 자리에서 마주한, 살갗을 베고 지나간 유리 조각처럼 쓰리고 아픈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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