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아침은, 섬의 그 어떤 아침보다 무겁고 끈질겼다. 밤새 그녀를 괴롭혔던 자책과 모멸감의 파도는 이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텅 빈 평온, 혹은 마비에 가까운 무감각만이 남았다.
그녀는 습기로 다 눅눅한 이불을, 마치 자신을 세상과 격리하는 젖은 수의(壽衣)처럼 뒤집어쓴 채 휴대폰의 차가운 불빛 위로 떠오른 ‘인천(ICN)’이라는 세 글자를 무감각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가장 빠른 날짜, 가장 싼 가격. 그 차갑고 무기질적인 단어들은, 그녀가 도망쳐왔던 세계로 돌아가는 항복 문서의 첫 구절처럼 보였다. 글자들이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이 섬도 결국, 그녀의 영원한 도피처는 될 수 없다는 냉혹한 결론. 이제 그녀는 다시, 스스로를 증명하고 변호해야만 하는 그 지긋지긋한 세계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하는 것인가, 명치가 아려왔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가 쌓아 올린 체념의 성벽을 무너뜨리듯 가방 속 휴대폰이 광적인 발작처럼 몸을 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시했다. 세상의 모든 부름으로부터 귀를 닫은 그녀에게, 그 기계의 진동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진동은 끈질겼다. 멈췄다가, 다시 울리고, 또다시 멈췄다가 세차게 몸을 떨었다. 마침내 그 집요함에 짜증이 난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액정 화면 위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부재중 전화 알림이 여러 개 떠 있었다. 모두 다이빙 센터 리셉션에 있는 ‘미미’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방금 도착한 다급한 메시지가 깜빡였다.
“하나! 어디 있어?
급한 일이야!
갑자기 다이빙 손님이 왔는데 다들 다이빙 나가고 없어.
네가 빨리 와야 해!”
미미의 다급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문장들이었다. 그녀는 납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마지 못해 센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들처럼 눈부신 두 남자를 마주했다.
하비에르와 마테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오랜 시간 단련된 듯한, 잘 익은 올리브 빛 피부는 그 자체로 건강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에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어떤 계산도 없이 그저 순수한 호의만으로 터져 나오는 눈부신 미소. 그들은 세상의 모든 햇살을 독차지하고 태어난 것처럼, 그늘 한 점 없는 존재들처럼 보였다.
하비에르는 훔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자신을 유자격 다이버라고 소개하며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과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다이빙을 한 경험이 많다고 했다. 친구 마테오와 함께 태국 여행 중인데 지금까지 다이빙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에게 바닷속 세상을 꼭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순간, 그녀의 내면에서는 익숙한, 그리고 뒤틀린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난 도련님들이군. 그러니 저렇게 구김살 하나 없이 해맑을 수 있는 거야.’
곧바로 그녀의 편견은 보기 좋게 반론 당했다. 하비에르가 마테오와 대화할 때 조금의 부자연스러움이나 과장된 배려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유려한 수어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였다. 그의 손짓은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춤이자 시였다. 그 안에는 친구를 향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마테오의 눈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사이에는 장애라는 벽이 아니라, 그들만이 공유하는 견고한 교감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워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체험 다이빙 시작 전 브리핑은 어렵지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말로 설명하는 대신, 온몸을 사용해 시범을 보였고, 하비에르는 그것을 다시 마테오를 위한 언어로 번역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보다 더 정확하고 깊은 소통이 존재할 수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마침내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세계는 완벽히 전복되었다.
수중에서는 모두가 침묵했다. 소리를 내어 말할 수 없다는 조건은, 이제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마테오는 오히려 더 자유로워졌다. 그는 더 이상 ‘듣지 못하는’ 장애인이 아니었다.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섬세한 언어, 즉 수어로 친구와 바닷속 세상에서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기본적인 수신호 몇 개밖에 모르는 그녀와 다른 다이버들이야말로, 이 침묵의 세계에서는 ‘언어 장애인’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은 차가운 해류가 맨살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서늘하고도 명징한 전율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상에서 그토록 단단하게 군림하던 세계의 질서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장애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개인이 가진 결함인가, 아니면 오직 한 가지 방식의 문만을 만들어 놓은, 편협한 세계의 폭력인가? 소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상에서 마테오는 침묵이라는 섬에 갇힌 소수자였다. 하지만 모든 소음이 소거된 이 거대한 푸른 우주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손짓 몇 개로 이루어진 원시적인 문법으로 더듬더듬 소통해야 하는 하나와 다른 다이버들이야말로, 이 세계의 이방인이자 언어적 소수자였다. 반면 마테오는 침묵의 왕국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왕자처럼 유려하고 복잡한 손의 언어로 친구와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언어는, 지상의 그 어떤 말보다 깊고 섬세한 예술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바다는, 그 깊고 무심한 관대함으로, 세상의 모든 수직적인 질서를 수평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을. 바다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동양인과 서양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 거대하고 자비로운 수평의 세계 앞에서, 어젯밤 그녀의 영혼을 좀먹던 돈 문제와 생계의 불안, 저잣거리에서 난도질당했던 존재의 하찮음 같은 것들은, 지상의 소음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마테오의 마스크 너머로, 태어나 처음 바다를 마주한 아이처럼 순수한 경이로움이 별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며,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소명할 수 있었다.
그녀의 역할은 돈을 받고 기술을 파는 상인이 아니었다. 지상의 모든 무거운 이름표와 가격표를 잠시 내려놓게 하고,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하는, 성스러운 ‘문지기’. 소음의 세계에 지친 영혼들을 침묵의 세계로 안내하는, 고독한 ‘번역가’. 그것이 그녀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였다.
다이빙을 마치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은,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아쉬웠다. 물의 장막을 뚫고 나오자,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꺼번에 그녀의 고막을 때렸다. 보트의 엔진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외침, 그리고 다시 느껴지는 중력의 무게까지. 그 모든 것이 낯설고 거칠게 느껴졌다.
보트 위에서, 마테오는 젖은 얼굴로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조금 서툴지만, 정성을 다한 손짓으로 허공에 감사를 새겼다. ‘최고’라는 사인과 함께,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고는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단순한 고맙다는 인사가 아니었다. 언어가 사라진 곳에서, 한 영혼이 다른 영혼에게 건네는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형태의 교감이었다. 어젯밤 술에 취한 남자들의 희롱 섞인 찬사나, 값을 깎으려는 흥정꾼의 의심 가득한 눈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투박한 손짓이 그녀의 심장을 깊고 뜨겁게 울렸다.
어젯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가볍고 하찮다고 느꼈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일이, 이 세상의 모든 경계와 차별을 녹여버리는, 가장 깊고 조용한 혁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더 이상 인천행 비행기 표를 검색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 차가운 디지털의 글자는 이제 다른 생의 유물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