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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연못과 바다

by 조하나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스쿠터 핸들을 잡았다. 그녀를 밤새 뒤척이게 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바다를 스쳐 온 바람에 희석되는 듯했다. 맑고 푸른 하늘, 그 아래 야자수 잎사귀를 간질이며 지나가는 바람, 이제는 익숙해진 수탉의 울음소리와 저 멀리 들려오는 롱테일 보트의 엔진 소리까지. 섬의 아침은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변의 카페 입구에 웅크린 검은 형체를 발견하는 순간, 섬의 투명한 공기는 미세한 먼지를 머금은 듯 탁해졌다. 민우의 검은 스키니진은 섬의 모든 원색을 집어삼키는 블랙홀 같았고, 어젯밤 그가 마셨을 술과 뒤섞인 희미한 담배 연기, 도시의 먼지가 눅눅하게 내려앉은 옷의 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녀가 벗어던진 세계의 냄새였다.


민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둑이 터진 강물처럼 말을 쏟아냈다. 너 없는 서울은 색이 바랬고, 무대 위 공기는 희박했으며, 제 노래는 길을 잃었다고 했다.


그녀는 길 잃은 그의 노래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섬으로 떠나고 나서, 그는 공중파 TV 쇼에 나갔다. 무명 시절, 돈을 좇아 영혼을 판다며 그가 늘 경멸하고 조롱하던 바로 그 무대였다. 자신의 노래가 아니면 부르지 않겠다던 그의 호언장담은, 폭발하는 성량과 시원한 고음 처리에 열광하는 대중의 환호 속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녀는 섬의 불안정한 와이파이에 의지해, 휴대폰의 작은 화면으로, 다른 이의 멜로디에 자신의 목소리만 얹어 절규하는 그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그의 기술에 감탄했지만, 그녀는 들을 수 없었다. 그의 노래에는 더 이상 그의 영혼이 없었다. 텅 빈 기술만이, 껍데기뿐인 절창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노래를, 자신의 영혼을 버린 것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그를 너무 잘 안다는 것이었다. 그가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비겁함과 자기기만의 무늬까지, 그녀의 눈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사랑은 상대를 온전히 꿰뚫어 보는 것이라 믿었는데, 어쩌면 그건 가장 잔인한 형태의 폭력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상대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두른 얇은 막과, 그가 생존을 위해 만들어 낸 허상까지 남김없이 벗겨내는 것. 그녀라는 연못은 너무 맑고 투명해서, 그의 바닥에 깔린 진흙과 이끼까지 모조리 비춰버렸다. 그는 그 추한 모습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녀는 그것을 모른 척해줄 만큼 너그럽지 못했다. 그 꿰뚫어 보는 시선이, 둘의 관계를 기이하게 뒤틀어 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그의 단어들은 그녀의 고막을 두드렸지만, 단 하나도 그녀의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처럼 표면에서 흘러내렸다. 그의 목소리가 서울의 소음을 이야기할 때,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 나뭇잎 그림자를 따라 기어가는 작은 개미에게 머물렀다. 그 작고 부지런한 생명에게는, 민우가 말하는 그 거대하고 소란스러운 세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한때, 그의 저 위태로운 눈빛은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그의 공허는 그녀 탓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낡고 익숙한 연민이, 썰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심장 한구석에서 마지막으로 파닥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그의 등 너머로, 하얗게 부서지며 밀려오는 아침의 파도를 보았다. 연민의 파도가 채 솟아오르기도 전에, 더 크고 깊은 파도가 그녀 안에서 일렁였다. 그저,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명징한 자각이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맺혔지만, 결코 그녀의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는 거울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지친 얼굴과 공허한 눈빛을 비춰줄,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거울. 그는 그녀의 그을린 팔과 소금기에 절어 다른 색이 된 머리칼을 보지 못했다. 탱크 밸브를 열고 잠그며 생긴, 손바닥의 단단한 세계를 보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바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지친 얼굴을 비춰볼 잔잔한 수면이 필요했을 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민우의 독백이 쉼표를 찍은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눈동자를 지나, 그 너머의, 거울처럼 반짝이는 수평선에 가 닿아 있었다.


“민우야.”


나직했지만, 물기를 온전히 말린 목소리였다.


“너는 네 얼굴을 비춰볼 잔잔한 수면이 필요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은 연민도, 원망도 아닌, 그저 심해를 보고 온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여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저 고요한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그 잔잔함 아래 소용돌이치는 조류와, 그 아래 펼쳐진 까마득한 깊이를 떠올렸다.


“겉보기와는 달리, 발이 닿는 곳이 없어.”


민우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이 대화의 물길이 자신이 예상했던 방향과 전혀 다르게 흐르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아는 너는 안 그랬잖아.”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의 연못이 멋대로 깊어져 버린 것에 대한 억울함이 묻어났다. “고작 여기 와서 몇 달 살았다고 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


그의 추궁에, 그녀는 더 이상 말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방에서 작은 지갑을 꺼내며, 그녀는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 망설였다. 그가 마신 커피값도 함께 내야 하는 걸까.


서울에서 그녀가 살던 세상은, 남자들이 모든 데이트 비용을 내주길 바라면서도 입으로는 ‘페미니즘’을 떠든다고 조롱하는 남자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회식 자리에서 기름 낀 얼굴로 껄껄대던 부장들의 음담패설 속에서, 온라인 세상을 부유하는 익명의 조롱 속에서, 그녀는 늘 그들의 잠재적 비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태어나 단 한 번도 남자가 모든 걸 내주길 바란 적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서가 테이블 위에 놓이는 그 어색한 정적의 순간, 그녀는 언제나 누구보다 먼저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강박이었다. 남자가 계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여자들과 한 무리로 묶이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 ‘얻어먹는 여자’라는, 그 경멸 어린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얻어먹는 대신 그녀에겐 내어주어야 할 게 있었다.


그녀는 돈 많은 남자의 조건 같은 건 따져본 적도 없지만, 늘 남자의 지갑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것은 갑옷과도 같았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심지어 상대방이 불편해하더라도, 그녀는 그 갑옷을 벗을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위해. 어쩌면, 그렇게 스스로에게 페미니스트임을, ‘나는 당신들의 값싼 조롱거리와는 다른 존재’임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마신 커피 값만을 테이블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의 몫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그의 삶도, 그의 감정도, 그의 커피 값도. 그 지긋지긋한 증명의 강박에서도, 그녀는 이제 조금,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나무 의자가 모래 바닥에 끌리는 서걱,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와 분리되는 소리, 더 이상 돌아갈 다리가 없음을 알리는 서늘한 경고음 같았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만약 돌아본다면, 그의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그녀가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낡고 익숙한 연민의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 두려웠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과거의 중력에 다시 발목을 잡히는 것과 같았다.


카페를 벗어나 그녀는 자신의 낡은 스쿠터에 올랐다. 키를 돌려 시동을 걸자, 익숙한 엔진 소리가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갈랐다. 그 기계음은 마치 그녀가 새로 쓰기 시작한 노래의 첫 음처럼, 그녀의 귓가에 맴돌던 민우의 목소리를 지워냈다. 그녀는 핸들을 꽉 잡았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단단하게 느껴졌다.


스쿠터가 천천히 해변길을 따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부터 도망쳐, 이제는 바다라는 거대한 대상 뒤로 숨으려는 것은 아닐까. 사람에게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결코 자신을 판단하거나 요구하지 않을 저 거대하고 무심한 자연에 기대려는 비겁한 회피는 아닐까.


그녀는 사랑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더 크고, 더 위험한 사랑에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고, 변덕스러운 감정은 이내 닳아 없어지지만,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터였다. 그 영원함에 대한 약속. 그러나 그 사랑은 온기를 주지 않는다.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그저 깊이와 침묵으로 존재하며, 때로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포효할 뿐이다.


미지의 심연으로 제 존재를 온전히 던지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과, 그 안에서 마주할 미지의 자신에 대한 서늘한 기대감이 동시에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그녀의 뒷모습이, 섬의 푸른 풍경 속으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사람의 마음이 아닌, 바다의 변덕에 자신의 삶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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