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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결핍을 사랑하는 여자

by 조하나


초대받지 않은 파도가, 마침내 그녀의 고요했던 해변에 부딪쳐 부서지고 있었다. 민우와 나란히 걷는 모래사장은 이전과 같은 평온한 길이 아니었다. 둘 사이에는 파도 소리만이 어색한 침묵을 채웠다.

공기, 라는 것이 이토록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민우는 서울의 냄새를 고스란히 이고 있었다. 그녀가 지긋지긋해하며 벗어던진, 지하의 곰팡이 냄새와 희미한 담배 연기, 인공적인 섬유유연제, 싸구려 향수 냄새, 체취가 뒤섞인, 결코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없는 도시의 냄새였다.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해변을 얼마쯤 걸었을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민우였다. 그의 대답은 지독히도 그다웠다.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그래서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순수한 이기심. 그녀는 그 대답이 자신에게 어떤 무게로 가닿을지, 그가 단 한 번이라도 헤아려 본 적이 있을까, 생각했다.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세계를 잠식하는 데 익숙한, 그래서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아이.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숙소를 정해주는 것. 그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최소한의 의무였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그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 그녀는 자신이 한때 그의 모든 것이었음을, 그의 은행 업무부터 팬클럽 관리, 그의 불안과 우울까지도 도맡아 처리하던 해결사였음을 떠올렸다. 그 역할 놀이가 사랑이라 믿었던 어리석은 시간들.


“어디로 가는 거야?”


민우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섬의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향해 걸었다. 화려한 해변가가 아닌, 여행자들의 발길이 뜸한, 현지인들의 소박한 삶의 터전이 엿보이는 곳으로.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를 자신의 다이빙 센터나, 그녀의 숙소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곳들은 그녀가 이 섬에서 쌓아 올린, 민우가 결코 침범해서는 안 될 성역이었다.


허름하지만 깨끗한, 하루 숙박비가 그녀의 한 끼 식사 값보다도 저렴한 작은 게스트하우스 앞에 멈춰 섰을 때, 그녀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여기서 지내. 내일 다시 올게.”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민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와 작고 초라한 방갈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역력했다. 그는 아마도 눈물겨운 재회와, 낭만적인 해변에서의 하룻밤 같은 것을 상상했을 터였다.


“하나야, 잠깐만….”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으려던 순간, 그녀는 마치 불에 덴 듯 몸을 피했다. 그 접촉이, 그가 가진 서울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다시 옮겨 붙게 할 것만 같았다.


“피곤해. 먼저 갈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등 뒤로 그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따갑게 박혔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쿠터에 올라 시동을 거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아주 잠깐,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시베리아의 동토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작은 공간. 그곳에는 그녀의 삶이, 그녀가 새로 얻은 세계가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벽에 기대어 세워둔 낡은 다이빙 장비, 소금기에 절어 뻣뻣해진 비치타월,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달빛을 받아 검은 벨벳처럼 반짝이는 밤바다. 창밖의 밤바다는, 그 어떤 소란도 없었다는 듯 짙고 고요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달빛을 받아 검은 벨벳처럼 반짝이는 수면은, 잔물결 하나 없이 잔잔했다. 마치 거대한 연못 같았다.


연못.


그 단어가 그녀를 과거의 어느 한 장면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먼지 쌓인 앰프와 여기저기 엉킨 기타 케이블, 눅눅한 지하 연습실의 공기. 그리고 자신의 낡은 어쿠스틱 기타를 품에 안고, 조금은 수줍게, 그러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민우의 얼굴.


“널 위해 만든 노래야.”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가늘게 떨렸고, 그 떨림 속에는 그녀를 향한 의존과 애정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늘 그랬듯 가슴 한편이 아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라 믿었다. 그 위태로움을 보듬는 연민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꺼이 믿었다.


민우의 손가락이 기타 줄 위를 미끄러지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노래를 시작했다. ‘연못’이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잔잔한 연못을 들여다보는 한 남자의 이야기.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 그 슬픈 눈빛과 고뇌 어린 표정에 스스로 도취하여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노래. 그는 연못의 깊이나 그 안에 사는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을 비추는 그 수면의 기능만이 중요할 뿐. 노래 속에서 그는 연못을 바라보며 끝없이 사랑을 속삭였지만, 그것은 메아리 없는 독백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라는 연못에 비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헌신과 연민은, 그의 자기애를 더욱 선명하게 비춰주는 수면에 지나지 않았다. 민우는 결코 그 연못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없는, 스스로의 그림자에 갇힌 나르시시스트였다.


노래가 끝나고, 민우는 엄마의 칭찬과 인정을 갈구하는 아이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계속해서 그의 연못이 되어 ‘김민우의 여자친구’라는, 이름 없는 존재로 인디밴드 커뮤니티를 떠돌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진짜 ‘하나’의 이름을, 그녀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설 것인가.


그날,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고,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러자 그는 비겁하게 도망쳤다. 자신의 연못이 더 이상 자신을 비춰주지 않겠다는 선언 앞에서, 그는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모를 감정에 취해버렸다. 오랜 관계를 정리하고, 그녀가 돕고 있던 수많은 일들을 인수인계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음에도, 그는 그녀와의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탔다. 그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에 대한 예의나 책임이 아니라, 거절당한 자기 자신의 상처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비겁함이 남긴 모든 짐을 홀로 떠안아야 했다.


창밖의 바다가 넘실거렸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탱크 밸브를 여닫고, 무거운 장비를 옮기며 단단해진 굳은살. 그것은 그녀가 이 섬에서,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의지로 살아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녀는 한때 민우가 기타를 오래 쳐서 왼손 검지와 중지에 생긴 굳은살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도 자신만의 굳은살이 생겼다.


민우는 기어코, 불쑥 여기까지 찾아왔다. 또다시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볼 잔잔한 연못을 찾아.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위한 얕고 고요한 연못이 아니었다.


그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파도를 품은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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