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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초대받지 않은 파도

by 조하나


그녀는 더 이상 바다의 표면을 떠도는 부유물이 아니었다. 조류의 방향을 읽고, 파도의 높이를 가늠하며, 마침내 자신만의 속도로 유영하는 법을 익힌 한 명의 프로페셔널 다이버였다.

생애 첫 오픈워터 코스 교육으로 루카스를 다이버로 만든 후, 그녀의 세계에는 이전에는 몰랐던 종류의 고요한 자신감이 얕게, 그러나 단단하게 깔리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그녀가 그토록 갈망했던, 타인의 인정과 비교 위에서만 존재하던 위태로운 자만심과는 다른 결이었다. 온전히 그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겪어낸 시간과, 그 시간이 손바닥에 새겨놓은 굳은살이 증명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클로드와 케빈, 그리고 안드레와 줄리앙과 함께 해변의 작은 바에 둘러앉아 있었다. 하루의 다이빙을 마친 다이버들의 상기된 얼굴과 느긋한 웃음소리,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숯불에 구워지는 달큰한 닭구이 냄새, 그리고 귀를 간질이는 나른한 레게 음악이 뒤섞여, 섬의 저녁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클로드는 언제나처럼 영국 정치와 축구에 대해 냉소적인 불평을 늘어놓았고, 케빈은 그의 딸이 보내온 사진을 보여주며 영국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차가운 콜라병을 손에 쥔 채, 그들의 대화에 간간이 웃음으로 답하며 이 완벽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래, 이곳이 이제 그녀의 세상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 모든 평화로운 소음들을 단번에 가르는, 그러나 그녀에게만은 천둥처럼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나야.”


그녀는 숨을 멈췄다. ‘하나’가 아닌, ‘하나야’라고 부르는 그 다정하고도 애처로운 어미. 이 섬에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오직 그녀의 과거만이 알고 있는 호명 방식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 없는 곳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아주 천천히,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린 그곳에, 그가 서 있었다.


도시의 먼지와 불면의 그림자를 그대로 뒤집어쓴 채, 이 열대의 풍경 속에 명백한 오점처럼 박혀 있는 남자. 민우였다. 검은 스키니진에 헐렁하고 낡은 티셔츠, 홍대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의 모습은, 맨발에 보드쇼츠 차림의 사람들 속에서 길 잃은 유령처럼 위태롭고 이질적이었다.


그가 섬에 발을 들인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비밀 공간이 무참히 침범당했음을 느꼈다. 이곳은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와 간신히 일궈낸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데 지금 그 한가운데, 그녀가 도망쳐 온 이유 중 하나가 서 있었다.


“네가… 여기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낯설게 흘러나왔다. 민우를 보는 순간, 시간은 역류했다. 그녀는 늘 민우의 시간에, 민우의 예술에, 민우의 세계에, 민우의 삶에 모든 것을 맞춰야 했던 과거로 소환되었다. 그의 녹음이 새벽에 끝나면 그녀의 하루도 새벽에 시작되었고, 그가 공연 전 예민해지면 그녀의 세상도 덩달아 잿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그의 세계를 공전하는 작은 위성이었고, 그의 빛이 희미해지면 자신도 함께 어두워지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안다. 그 감정의 시작점에는 늘 연민이, 위태로운 것에 대한 안쓰러움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무대 위에서만큼은, 유명하지도 않고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하지만, 제 모든 것을 처절하게 쏟아내던 그의 모습. 그녀는 그 열정의 순수함을 존경했고, 그 이면에 자리한 깊은 결핍에 동질감을 느꼈다.


그것이 그녀의 패턴이었다. 상대의 결핍과 상처에 자석처럼 끌려, 그것에 한없이 공감하고 끝내 동일시하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을 희생이라 여기며 스스로 소모되어 갔다. 그렇게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이 시간 속에서 변하고 녹스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그녀는 결국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자신을, 이기적인 자신을 탓하며,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관계의 종말을 고했다. 그것이 그녀가 아는 유일한 이별의 방식이었다.


“소셜미디어에서 봤어. 네가 올린 바다 사진… 너무 예쁘더라. 그냥… 무작정 왔어.” 민우가 말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테이블로 향했다. 어색한 인사가 오갔고, 클로드의 노골적인 무관심과 케빈의 의례적인 친절함 속에서 민우는 더욱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빠져나와 민우와 함께 해변을 걸었다. 초대받지 않은 파도가, 마침내 그녀의 고요했던 해변에 부딪쳐 부서지고 있었다.


“나… 잠깐만이라도, 여기서 좀 머물면 안 될까?” 민우가 입을 열었다. “너랑… 할 얘기가 있어, 하나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애써 쌓아 올린 섬의 방파제가, 과거라는 이름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낙원은, 이제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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