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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홀로서기의 파도

by 조하나

소설 <마이 리틀 아일랜드> 1권에서 이어집니다.






서울에서 온 친구들이 남기고 간 화려한 잔상과 함께, 그녀가 한때 몸담았던 세계의 공허함은 더욱 선명한 그림자로 섬 위에 드리워졌다. 그들이 떠난 후, 항구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들자 섬은 다시 본래의 고요와 푸른 숨결을 되찾았고, 그녀 역시 그 안에서 비로소 깊은숨을 내쉴 수 있었다. 반짝이는 것들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그녀는 맨발로 느끼는 대지의 온기와 피부를 간질이는 바닷바람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도시의 네온사인처럼 요란하거나 현란하지 않았으나, 그 어떤 값비싼 보석보다 단단하고 영원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그녀의 내면을 조용히 채우고 있었다.


그런 평온이 며칠 가지 않은 어느 아침, 클로드가 평소처럼 담배 연기를 허공에 흘리며 다가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자, 하나, 오늘은 슬슬 너 혼자 교육생들 데리고 바다 구경 한번 시켜줘야지?”


그녀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의 제안은 어쩌면 예상했던 것이었으나,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심장이 발밑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클로드, 나는 아직….”


“아직?” 클로드가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가 허공으로 길게 내뿜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의 눈썹 한쪽이 냉소적으로 치켜 올라갔다. “강사 자격증은 장식으로 따 놓은 거야? 언제까지 다른 강사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시간을 죽일 셈이야? 그리고, 뭐, 네가… 자원봉사하러 이 섬에 온 건 아니잖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한인 다이빙 센터였다면, 갓 강사가 된 이들은 몇 달이고 선배 강사의 코스를 참관하고 보조하며 무급으로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그런 이야기를 넌지시 건넸을 때, 클로드는 담뱃재를 툭툭 털며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빌어먹을 시간 낭비야. 너는 실력이라면 이미 차고 넘쳐.”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가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고, 잘난 척한다는 시선 속에 놓이는 것이 두려웠다. 칭찬보다는 질책에, 격려보다는 평가에 익숙했던 지난 시간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곳의 다른 서구 문화권 친구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그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뿌리 깊은 망설임이었다. “그래도 나는… 팀 티칭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아직은 혼자 누군가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게 자신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처럼 작아졌다.


클로드는 그런 그녀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안타까움과 이해, 그리고 약간의 답답함마저 섞여 있었다. “젠장, 하나야. 네 안의 다이아몬드를 그냥 돌멩이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내가 아는 한, 넌 여기 굴러다니는 어지간한 강사들보다 훨씬 낫다고.”


결국, 클로드의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강권에 등 떠밀리듯 그녀는 첫 단독 체험 다이빙 수업을 맡게 되었다. 하루, 단 하루의 항해. 그러나 그녀에게는 망망대해와도 같았다.


그녀의 첫 손님은 영국에서 온 젊은 커플이었다. 햇볕에 벌겋게 그을린 피부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다가온 그들은, 그러나 그녀의 동양적인 얼굴을 마주하자 예상했던 질문 대신 다른 물음표를 던졌다.


“태국 사람이세요?” 여자가 먼저 영국적인 상냥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그녀가 마른 입술을 떼어 고개를 가로젓자, 남자가 뒤를 이었다. “아, 그럼 혹시 일본에서 왔나요?”


섬에 와 수없이 겪었던, 그러나 매번 새롭게 바늘처럼 마음을 찌르는 순간.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커플의 눈빛이 잠시 허공에서 부딪히는가 싶더니, 그들은 다음 질문을 준비하는 듯 입을 달싹였다. 그녀는 그들이 내뱉기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마치 오래된 레코드판의 정해진 홈을 따라 바늘이 미끄러지듯. “남한에서 왔습니다. 북한은 아니고요.”


그 순간, 그들의 얼굴에 스친 것은 아주 찰나의 머뭇거림이었을까. 혹은, ‘아시안’ 강사에게, 그것도 젊은 여성 강사에게 자신들의 첫 바닷속 경험을 온전히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만들어낸 생경함이었을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은 그녀 자신이 먼저 지레짐작하고 만들어낸 마음의 그림자였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준비해 온 교육 자료를 펼쳐 보이며 브리핑을 시작했지만, 목소리는 해무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증명해야 한다.’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그 지긋지긋한 주문은 섬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좀처럼 증발하지 않았다.


보트에 올라 입수 준비를 마쳤을 때 바다는 더없이 잔잔하고 투명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수면 아래로 첫 숨을 내딛는 순간, 예기치 않은 파도가 그들을 세차게 흔들었다. 커플 중 남자인 마이클이 좀처럼 이퀄라이징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고통과 당혹감으로 하얗게 질렸고, 수면과 수심 3미터 사이를 몇 번이고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옆에서 그의 여자친구인 사라는 안절부절못하며 창백해진 그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하강에만 거의 삼십 분이 소요되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한순간도 조급해하거나 짜증 내는 기색 없이, 마치 물의 흐름에 제 몸을 온전히 내맡기듯, 마이클의 더딘 속도에 자신을 맞췄다. 부드러운 수신호로 그를 안심시키고, 다양한 이퀄라이징 방법을 차분히 수신호 하며 그의 귓속을 짓누르는 압력을 조금씩 밀어내려 애썼다. 그녀의 눈빛은 깊은 바다처럼 흔들림 없었고, 수신호로 형상화된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평온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그때마다 묵묵히 자신을 다독여주던 클로드의 침착한 눈빛을 떠올렸다. 인내심, 그것은 어쩌면 강사가 지녀야 할 가장 깊고 푸른 바다와도 같은 덕목이었다.


마침내 마이클이 힘겹게 하강에 성공하고, 세 사람이 약속된 수심에 다다랐을 때, 그의 마스크 너머로 안도의 한숨과 함께 경이로운 바닷속 풍경에 대한 억눌렸던 감탄이 물거품처럼 터져 나왔다. 짧은 체험 다이빙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형형색색의 산호초와 그 사이를 꿈결처럼 유영하는 열대어들의 군무를 만끽했다. 그녀는 그들의 첫 바닷속 경험이 두려움이나 좌절이 아닌, 순수한 기쁨과 경외로 기억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 그들을 이끌었다.


모든 교육을 마치고 물 위로 떠올랐을 때,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마이클과 사라의 얼굴에는 만족감과 함께 그녀를 향한 진심 어린 감사의 빛이 어렸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하나. 당신이 아니었다면 전 아마 포기했을 거예요. 끝까지 기다려주고, 침착하게 이끌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마이클의 목소리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흥분과 함께 깊은 감사가 물결치고 있었다. 사라는 그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아요. 당신은 정말 최고의 강사예요!”


그들의 찬사는 빈말이 아니었다. 보트 위 장비를 정리하는 어수선함 속에서 마이클이 작은 방수 가방에서 꼬깃꼬깃 접힌, 바닷물에 살짝 절어 희끗한 소금기가 어린 1000밧 지폐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퀄라이징이 잘 안 되는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제 생애 최고의 경험을 선물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가 직접 썼을, 물기에 살짝 번진 짧은 쪽지와 함께였다. 그녀는 그 눅눅하고 온기 어린 지폐의 질감을 느끼며, 그 무게가 단순한 종잇조각 이상임을 알았다.


그녀는 그 돈의 가치보다 더 묵직한 감정에 휩싸였다. 어쩌면 이것이 이 작은 섬이 그녀에게 건네는 또 하나의 가르침일지도 몰랐다. 서양인들은, 적어도 그녀가 만난 그들은, 자신들이 동양인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기만 했지 배우는 것에는 익숙지 않아 처음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를지언정, 상대가 누구든 그 실력만 증명한다면 국적이나 피부색, 성별에 관계없이 곧바로 마음을 열고 존중해 준다는 것. 그 명쾌함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부서지는 파도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한국에서는 실력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았다. 그녀의 성별, 그녀의 학벌, 그녀가 가진 인맥과 배경 같은 보이지 않는 꼬리표들이 끊임없이 그녀의 발목을 잡거나, 혹은 부당한 날개를 달아주곤 했다. 때로는 여자인데 너무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들의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그 투명하지만 단단한 벽 앞에서 밤을 삼킨 적도 많았다.


소금기 어린 1000밧 지폐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그녀는 이 작은 섬에서 아주 큰 세상을 배우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늘의 이 경험은 그녀에게 단순한 금전적 성공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어쩌면, 지긋지긋한 ‘증명의 주문’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의 빛줄기였고, 홀로서기의 거친 파도 앞에서 좌초하지 않고 자신만의 항로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조용한 확신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바닷속에서 마주했던 깊고 푸른 고요와 평화를, 그리고 교육생들의 반짝이던 눈빛을 가슴속에 새겼다. 그래, 이 길 위에서 그녀는 분명 더 나아갈 수 있을 터였다. 조금 더, 그녀 자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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