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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장. 슬픔에 가 닿은 슬픔

by 조하나


어떤 고요는, 세상의 모든 소란을 한데 뭉쳐 짓누르는 듯한 무게를 지닌다.


그녀의 첫 손님이 섬에 도착하기로 한 날의 새벽,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잠든 그 시간에 그녀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그 고요의 무게감이었다. 그것은 한 영혼의 깨어진 삶이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처의 무게였고, 그 상처 앞에 온전히 자신의 존재를 내어놓아야 하는 안내자의 숙명적인 책임감이었다.


어젯밤, 그녀는 낡은 노트북 앞에서 몇 번이고 이메일을 다시 읽었다. 활자로 박제된 문장들은 건조했지만, 그 행간에는 도시의 소음에 마모된 한 사람의 간절한 숨이 배어 있었다.


‘저도 그 바다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은 이제,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하나의 거대한 물음표가 되어 그녀를 짓눌렀다.


항구에서 그녀를 알아본 남자는, 섬의 모든 빛을 흡수해 버리는 검은 구멍처럼, 홀로 다른 계절을 살고 있었다.


“하나 작가님… 맞으시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마치 오래전 버리고 온 유령의 이름처럼 낯설게 귓가를 맴돌았다. 언어로 세상을 짓고 허물던 그녀가, 이제는 언어가 소멸되는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지독한 아이러니. 그녀는 그의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예상보다 더 차가웠다.


“좋은 날 오셨네요. 바다가 오늘은 유난히 잔잔합니다.”


그녀는 애써 준비한 말이 아닌, 그저 눈앞의 풍경을 담담하게 건넸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다이빙 센터로 향하는 픽업트럭의 짐칸에 나란히 앉았을 때, 섬의 거친 햇살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무심코 그의 팔을 보았다. 열대의 태양에 단 한 번도 길들여 본 적 없는, 희고 가느다란 팔. 얇은 피부 아래로 푸른 혈관이 비칠 듯했다. 그것은 도시의 피부, 형광등과 모니터 불빛 아래서 길러진 피부였다. 그녀 역시 한때는 저런 피부를 가졌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속수무책으로 붉어지기만 하던, 자연의 일부이기를 거부하던 살갗.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 덜컹거리는 길을 가는 동안, 그녀는 그의 연약함이 단순히 체격의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이 섬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갑옷도 없이, 가장 연한 속살을 드러낸 채 와 있었다.


다이브 센터에 도착해 건강 상태 진술서를 내밀자, 그는 항목들을 하나씩 기계적으로 체크해 나갔다. 알레르기, 심장병, 고혈압… 그의 펜은 막힘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모든 질문의 마지막에, 다른 항목들과 뚝 떨어진 채 홀로 존재하는 한 질문 앞에서 그의 펜은 허공에 멈췄다.


‘최근 5년 이내에, 정신적인 문제로 상담이나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짙은 안개에 갇혀 있었다.


“저… 숨 쉬는 게… 가끔, 제 마음대로 안 됩니다. 다이빙해도 괜찮을까요?”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이 감당해 온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서울의 지하철 속, 타인의 날숨과 체취에 뒤엉켜 자신의 숨을 도둑맞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는 진술서를 부드럽게 옆으로 밀어놓고, 그의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저도 그랬어요. 서울에서는 숨을 쉬는 게 아니라, 그저 생명을 연명하기 위해 공기를 억지로 욱여넣는 기분이었죠. 내뱉는 숨보다, 들이마셔야 할 세상의 요구들이 너무 많아서 항상 목구멍까지 숨이 차올랐어요.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려서, 그걸 다시 배우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녀의 고백에, 시우의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파문이 일었다.


그녀는 풀장의 가장 얕은 곳, 물이 겨우 가슴 아래까지 오는 곳에서 시우의 제한수역 코스를 시작했다. 하루 반나절이 넘는 비디오 시청과 이론 수업을 먼저 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건강 진술서를 작성할 때부터 그녀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우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었고, 사람들을 물속 세상으로 안내하는 데 경험이 쌓였다고 생각한 그녀는 이제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겼다.


그녀는 먼저 시범을 보였다. 수면 위에서 호흡기를 물고, 천천히 얼굴을 담그고, 물속에서 첫 숨을 내쉬는, 가장 기본적이고 평화로운 행위.


“자, 이제 시우 씨 차례예요. 저와 똑같이 해보세요, 천천히.”


그가 호흡기를 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카락이 수면에 닿고, 이마가, 그리고 눈이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찰나. 그의 몸이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졌다. 물에 닿은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고, 그의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컥’ 하는, 짐승의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말을 잃었다. 그저 공포에 잠식된 몸뚱이가 되어, 물 밖으로 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그는 마치 물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목이 졸리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고, 그의 눈은 극심한 공포로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가 간신히 풀장 가장자리를 붙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을 때, 비로소 그의 입에서 단어라기보다는 조각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됩니다… 저는… 안 돼요. 그 냄새가… 그 물 냄새가….”


그녀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그 순간, 건강 상태 진술서에 그가 적었던 직업란이 뇌리를 스쳤다. ‘기자’. 그녀는 그제야 모든 조각을 맞출 수 있었다. 시우의 텅 비어 있던 눈빛, 도시의 먼지처럼 그를 뒤덮고 있던 깊은 피로감,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던 그의 고통의 실체를. 그는 그 모든 참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기록하고 세상에 알려야만 했던, 또 다른 의미의 생존자였다.


그녀의 친구 동욱이 떠올랐다. “이 나라의 가장 깊고, 어둡고, 악한 걸 보고 말았어”라며 악몽에 시달리다 결국 한국을 떠났던 동욱. 지금 그녀의 눈앞에, 떠나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 또 다른 동욱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즉시 모든 코스를 중단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시우 씨.”


그녀는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공기탱크와 BCD를, 마치 그를 옥죄는 기억의 갑옷을 벗겨내듯, 하나하나 침착하게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축축하게 젖어 떨고 있는 그의 팔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녀는 그를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해변의 고운 모래사장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그의 옆에, 그러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가만히 앉았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파도 소리만이 둘 사이를 채웠다. 마침내 시우가, 모래알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역시 안되나 봐요.”


그 말속에 담긴 깊은 패배감과 자기혐오를, 그녀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시우 씨. 세상 모든 사람이 바다를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섞여 부드럽게 흩어졌다.


“제가 온몸으로 사랑하는 이 바다가, 시우 씨에게는 고통과 상처의 기억일 수 있다는 걸 알아요. 매일 밤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유가족들의 울음소리가 파도 소리에 겹쳐 들리는 사람에게… 어떻게 감히 물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걸 억지로 극복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폭력이에요. 저는 그런 강사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서울에서 자신이 도망쳐 온 이유를 떠올렸다.


“때로는… 포기하는 게 가장 용감한 선택일 수 있어요. 그만둬도 괜찮아요. 할 수 없는 걸 인정하는 건, 실패가 아니에요. 어쩌면 그건, 부서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지키는 가장 위대한 방법일지도 몰라요. 저도… 제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쳐서 이곳에 왔는걸요.”


그녀는 그의 상처를 들여다보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먼저 꺼내 보였다. 동정이 아닌, 깊은 공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교육생’으로, 자신을 ‘강사’로 여기지 않았다. 그저, 상처 입은 바다 앞에서 서로의 그림자를 확인하는 두 명의 목격자일 뿐이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경쟁과 증명, 극복의 강박, 치유되지 못한 상처 속에서 살아온 두 영혼에게, 그 말은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도 따뜻한 구원이었다. 시우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떨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마침내 길을 찾아 흘러내렸다. 그는 울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이, 그의 몸을 대신해 울고 있었다.


갈 곳 잃은 슬픔이 망망대해를 떠다니다 마침내 그녀의 작은 슬픔의 섬에 닿았다. 이렇게 만나는구나. 마음껏 슬퍼하지도, 온전히 애도하지도 못한 연약한 마음들이, 결국 이렇게 세상 끝의 바다에서 만나는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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