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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장. 하루치만큼의 숨

by 조하나


민우가 떠난 후에도 며칠간, 그녀의 시간은 밀물과 썰물 사이, 어디에도 온전히 발붙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모래톱처럼 위태로웠다. 과거의 유령은 떠났지만, 그가 남기고 간 서울의 냄새는 그녀의 후각에 보이지 않는 흉터처럼 남았다.


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시우는 피를 철철 흘리도록 다치고도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는 작은 강아지 같았다. 그녀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풀장에서의 그날 이후, 그는 자신의 방갈로라는 작은 섬 안에 스스로를 유배시킨 채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아침과 저녁, 그의 방문 앞에 태국식 닭죽과 과일을 조용히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어차피 시우가 예약한 코스 스케줄 사흘, 그녀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들은 서로의 침묵을 공유하며, 깨어진 세상의 파편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시우가 섬을 떠나기 전날, 그녀가 여느 때처럼 저녁거리를 들고 그의 방문 앞에 섰을 때, 안에서 아주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녹슨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스르륵 열렸다. 며칠 만에 마주한 시우의 얼굴은 그늘에 오래 방치된 식물처럼 창백하고 생기 없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이전과 다른, 아주 희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체념과 절망의 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결심한 자의 위태로운 빛이었다.


“저… 하나 씨. 이제 괜찮습니다. 고마웠어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고 갈라졌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가 아주 긴 터널의 끝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시우 씨. 오늘 저녁에 우리 센터 사람들 다들 모여서 밥 먹기로 했는데… 올래요?”


그녀의 제안은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거절해도 괜찮다는 배려가 담겨 있었다. 시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낯선 사람들과의 소란스러운 저녁 식사. 그의 상처받은 영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내 그는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변의 작은 식당은 이미 섬의 이방인들이 내뿜는 소란스러운 온기로 가득했다. 숯불 위에서 익어가는 해산물의 고소한 냄새와 레몬그라스의 상큼한 향이 섞여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타고 흘러 다녔다. 케빈과 클로드, 안드레와 줄리앙, 그리고 그들과 함께 다이빙하는 손님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우가 그녀의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내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큰 병을 앓고 난 친구를 맞이하듯, 조심스럽지만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오, 시우! 드디어 동굴 밖으로 나왔군! 여기 와서 앉아.”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안드레였다. 그는 특유의 짓궂지만 악의 없는 미소로 시우의 등을 툭 치며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었다. 케빈은 말없이 시원한 맥주 한 병을 따서 그의 앞에 놓아주었고, 줄리앙은 “이봐, 친구. 네가 없으니 하나가 다이빙을 못해서 난리도 아니었어”라며 농담을 건넸다. 그들의 서툴지만 진심 어린 환대 속에서, 시우의 굳어 있던 어깨가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풀려나가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식사가 시작되고, 대화는 두서없이 흘러갔다. 어제 다이빙에서 만난 거북이 이야기, 런던의 끔찍한 날씨, 프랑스 사람들의 미식에 대한 집착, 독일 사람들이 재미없는 이유 등등. 하지만 그 누구도 시우에게 그동안 왜 숙소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지, 그가 괜찮은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그가 다시 그들의 세계로 돌아온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가 스스로 말문을 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이전의 세상에선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타인의 상처에 대한 깊은 예의였다.


한참 동안 음식만 깨작거리던 시우가, 마침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제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휴직 중인데 회사를 그만두려고요.”


그의 고백에, 시끄럽던 테이블의 모든 소음이 순간 멎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파도 소리만이 그들의 침묵을 채웠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사는 게… 버겁네요. 힘들어요….”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였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맥주를 마시며 담배만 말없이 피우고 있던 클로드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무심하고 건조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 밖으로 나오면, 그 하루는 그걸로 된 거야.”


모두의 시선이 클로드에게로 향했다. 그는 시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창한 계획 같은 건 집어치워. 내일 당장 세상을 구하겠다는 생각도 버려. 그런 건 신이나 하는 짓이니까. 우리는 그냥 인간이야. 그냥, 하루씩, 딱 하루씩만 살아내면 돼. 어제보다 조금 더 숨쉬기 편했다면, 그걸로 족한 거야.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고, 어쩌면 가장 대단한 일일지도 모르지.”


그는 거창한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밤을 절망과 싸우며 건너온 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생존의 증언이었다. 그의 냉소적인 가면 뒤에 숨겨진 깊은 연륜과 상처의 흔적을, 그녀는 그 순간 처음으로 보았다. 그 말은 시우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늘 미래를 불안해하고 과거를 후회하며 현재를 놓치고 살았던 그녀 자신의 심장에 깊이 박혔다.


“그래도… 사는 게 너무 막막하고 힘든 날은 어떡하죠?”


시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클로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그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을 만들었다.


“그냥 있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숨만 쉬어. 그러다 보면, 또 날이 밝고, 다시 눈을 뜨고, 침대 밖으로 나오는 날이 오겠지. 그럼, 또 하루만큼 살아낸 거고.”


그날 밤, 식당을 나와 해변을 따라 나란히 걷는 동안 시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그들의 발자국을 지우며 따라오는 모래의 서걱임만을 함께 들을 뿐이었다. 한참을 걷던 그가, 마침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씨. 무슨 생각으로 바닷속에 들어가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시도는 해봤으니 이 용기로 살아볼게요. 하루씩, 하루씩.”


그의 말은 체념이 아닌, 자신의 한계와 상처를 온전히 끌어안은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 고요한 형태의 다짐이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부서지는 파도의 은빛 윤슬이 담겨 있었다. 그토록 공허했던 그의 눈에,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기어코 틈을 비집고 나온 빛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시우는 끝내 바닷속에 들어가지 않고도 자기 자신을 구하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것을. 그녀의 역할은 그를 물속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물가에 서서, 상처의 바다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리고 마침내 돌아설 용기를 낼 때까지, 그저 그의 곁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거면 충분해요, 시우 씨. 정말로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오늘 하루, 그들이 함께 살아낸 작은 기적에 대한 진심 어린 축하였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항구에 나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갈로 발코니에 서서, 멀리 쾌속선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섬을 떠나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시우는 돌아갈 것이다. 그의 상처와, 그의 죄책감과, 그의 도시로. 하지만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세상 끝의 작은 섬과, 그를 위해 기꺼이 침묵의 증인이 되어 준 사람들이, 그리고 ‘하루치만큼의 숨’이라는 작지만 단단한 주문이 함께할 터였다. 그녀는 떠나가는 배를 향해, 소리 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것은 작별 인사가 아니라, 또 다른 항해를 시작하는 동지를 향한, 고요한 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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