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하나 Aug 29. 2024

03. 이방인의 위로


 이 작고 외딴섬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건 1940년대부터다. 태국 걸프만의 망망대해를 지나는 작은 어선들이 풍랑을 만날 때면 피신처로 쓰였던 무인도는 정국이 혼란해진 사이 정치범 유배지가 되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죄수가 풀려나고 수용소가 폐쇄되면서 이 섬은 다시 한번 버려졌다. 그러다 주변의 큰 섬 코사무이와 코팡안에서 이주한 초기 정착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며 수용소로 쓰던 건물을 집 삼아 코코넛을 팔며 생계를 꾸렸다. 태국어로 ‘꼬’는 섬, ‘따오’는 거북이를 뜻하는데 그때만 해도 이 작은 섬에 바다거북들이 가득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섬에 맨 처음 터를 잡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자라 아이를 낳아 3세대를 품고 있다.


 그녀는 싸이리 비치 해변가를 따라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초라하지도 않게 소소하고 단정히 자리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이 섬을 조각조각 나눠 이만큼은 네 것, 이만큼은 내 것, 어떻게 정했을지 궁금해하다가 그녀가 그토록 품으려 인내하고 노력하다 결국 말았던 서울의 불빛을 떠올렸다. 그러다 그녀는 인간이 지구의 모든 땅을 칸칸이 나눠 값을 매기고 소유를 주장하며 사고파는 일을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세상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또 그녀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하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인간이라면 자고로 욕망해야 한다는 그 모든 세상의 규율에서 벗어나고 싶어 24시간을 도망쳐야 닿을 수 있는 섬에 들어오면서도 여전히 그녀는 여러 등급으로 나뉜 비행기 한자리를 겨우 얻어 타고, 다섯 개의 별로 나뉜 숙소를 고르고 고르며 자신의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다. 그녀가 더 이상 무언가를 욕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 세상은 그녀 앞에 뚜렷한 기약 없이 흔들던 모든 보상의 불빛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하며 그녀에게 게임에서 이탈한 낙오자의 수치스러운 패배감을 안겼다. 더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책망과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는 세상의 조롱 속에 그녀는 스스로 사인한 적도 없는 계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폭풍 같은 불안이라는 위약금을 물어야 했다. ‘이 먼 곳까지 또 이걸 질질 끌고 왔네….’ 그녀는 또다시 습관적으로 자신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는 아랑곳없이 거울처럼 미동이 없는 잔잔한 바다와 보랏빛과 붉은빛을 섞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명도와 채도로 펼쳐 보인 노을이 섞인 풍경은 이 모든 마법 같은 시간이 끝나기 전에 좀 더 나은 걸 떠올리라고 타일렀다.

      

 그녀는 끝내 미루고 미루던 일을 시작했다. 언제나 바깥으로 향했던 시선을 그녀 안으로 돌렸다. 밝고, 명랑하고, 활발하고, 쿨하고, 상냥하고, 예의 바르며 언제나 긍정적인 그녀. 적당히 섹시하지만, 너무 헤프지 않고, 적당히 스마트하지만, 너무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으며, 적당히 유머러스하되 너무 솔직하지 않고, 적당히 노출하되 너무 드러내진 않고, 적당히 적극적이되 너무 내숭 떨지 않는 그녀의 역할을 관리하는 사회. 소란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조직의 효율과 능률을 높이기 위해 모든 구성원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그 적당한 역할놀이에서 그녀는 언제나 혼란스럽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하도 ‘척’만 하다 보니 이제 정말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알 수 없는 사람과 친해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 자신과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 자신조차 모르는 그녀 자신은 세상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은 이 세상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도망친 김에 용기를 내 볼 작정이었다. ‘우리’가 없는 곳에서,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이방인들에 둘러싸인 곳에서 자신은 무엇으로 만들어진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작정이었다. 그래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가늠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변 모래사장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다 그녀는 몇 걸음 떨어진 작은 과일가게에서 망고스틴 1킬로 한 봉지를 사 들고 다시 돌아와 같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검은 자줏빛에 딱딱한 껍질을 두 손으로 마주 잡고 적당히 으스러뜨리면 나오는 뽀얗고 보드라운 과육을 한입 베어 무니 천국이 따로 없다. 하지만 천국을 맛볼수록 껍질의 양은 배로 불고 양손엔 핏빛이 배어드는 발칙한 과일이다. ‘나는 망고스틴을 좋아해.’ 그녀는 그것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맛본 과일인 것처럼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 마치 누가 그 안에서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사이 수평선 너머로 거의 다 넘어간 해는 연보랏빛 잔상을 흩뿌리며 여전히 미련을 부리고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이 조금 더 상쾌해졌고, 꿉꿉한 열기와 습기에 그녀를 덮었던 미세하고 끈끈한 막이 서서히 날아갔다. 그녀의 얼굴과 등, 팔에 붙어있던 머리칼 몇 개의 은은하게 불편했던 존재감도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싫어해.’ 그녀는 또다시 말했다.     


 제임스 빈센트 맥모로우의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Gold’를 플레이하고 낮의 해와 밤의 달이 힘겨루기하는 몽환적인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계속해서 망고스틴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미련이 흘러넘쳐 제 갈 길 못 가는 낮의 해처럼 여전히 도시의 욕망과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가 다니던 헤어살롱 디자이너가 보면 한숨을 푹 내쉬며 혀를 끌끌 찰 그녀의 짙은 고동색 반곱슬머리는 뿌리에서 한 뼘이나 자라 있었고, 나머지는 여전히 시크하고 도시적인 애쉬톤이 도는 밝은 회갈색으로 물들인 염색 머리가 남아 있었다. 그녀의 손끝과 발끝엔 아예 떨어져 버렸거나 반쯤 남아 보수를 기다리는 빨간색 젤네일이 남아 있었고, 여기저기 자잘한 귀고리와 반지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갑자기 훅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얼굴이 다시 머리카락으로 뒤덮였다. 해변 모래사장 한가운데 주저앉아 망고스틴을 으스러뜨리던 벌겋게 물든 손으로 머리카락을 얼굴에서 떼어 내다보니 그녀의 얼굴에도 짙은 보랏빛 물이 여기저기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미련 넘치던 해는 완벽히 사라졌고, 이제 달빛의 시간이었다. 그녀는 한낮을 지배하고 떠나지 못하는 태양의 열정적인 미련도 좋아했지만, 초연하고 냉정하고 우아한 달빛도 그만큼 사랑했다. 달빛 아래에서 적당히 감춰지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녀의 얼굴에 물든 보랏빛 얼룩마저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거울로 비춰보지 않아도 그녀는 지금 제 모습이 꽤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 작가가 그녀와 인터뷰에서 했던 “행복은 순간의 합”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섬에서 그녀가 마주한 풍경, 그 속에 섞인 제 모습과 표정, 눈빛, 분위기, 기분, 그 모든 순간을 합하면 그녀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순간들을 더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사회에서 교육받은 욕망이 아닌, 그녀가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순수한 욕심이다.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다고 칭송하던 일에 익숙했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러지 않기로 한다. 그녀는 원래 가지고 태어난 머리카락 색으로 돌아가 모든 장신구를 빼버리고, 차려내지 않은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때였다. 한낮의 섬의 열정과 냉정한 달빛이 한 데 섞인 비릿하고도 상쾌한 체취가 갑자기 풍겨왔다. 후각에 특히 예민해 모든 기억을 냄새로 보관하길 좋아하는 그녀는 자기 옆에 낯선 누군가가 앉았다는 걸 직감했다. “안녕! 여기… 잠깐 앉아도 될까? 싫다면, 그냥 갈게.” 그녀는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만, 무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싫었다. 어디에선가 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모든 말투와 행동에 점수를 매기는 사람이 있는 양 구는 건 집단 문화에서 그녀가 체득한 오랜 습관이었다. “아니, 괜찮아. 여기 앉아.” 그녀는 이 작고, 아직은 낯설기만 한 섬에서 조심스럽게 차지한 모래사장 바닥 조금을 낯선 이와 나눠 앉았다. 이 섬에 아무것도 그녀의 것이 없는데 정중하게 허락을 구하는 이와의 우연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에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몸과 마음을 다해 호의일지 악의일지 모를 우연에 대한 경계심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내 이름은 벤쟈민이야. 넌?”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며 날렵하게 뻗은 금빛 머리칼에 살짝 가려진 깊고 움푹하게 자리 잡은 푸른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내 이름은 하나. 만나서 반가워.” 자연스럽게 그의 눈은 이제 시뻘겋게 물든 그녀의 손과 망고스틴 껍질로 옮겨갔다. “뭘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있어?” 이건 절대 나무라거나 놀리는 게 아니라는 호의가 한껏 담긴 눈빛으로 그는 물었다. “망고스틴. 겉으로 보기엔 이래도 반전이 있는 과일이지. 먹어볼래?” 몇 개 안 남은 망고스틴 중 하나를 집어 그에게 건네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라면 먹기 싫어도 일단 받아는 두었을 것이다. 거절하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고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녀가 살아온 세상에서 온 사람이 아니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상대가 어찌 받아들일까 개의치 않는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야.” 그녀는 몇 분 전만 해도 자신에게 일러주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와 누군가에게 전하는 선언이 되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는 뿌듯함과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러자 그는 거절했던 망고스틴 하나를 들고 그녀를 따라 양손으로 짓이겨 솟아 나온 우윳빛 과육을 베어 물었다. 그러면서 그의 입가에도 은은한 보랏빛이 돌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짐작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역시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크게 웃고는 처음 맛보는 망고스틴의 짜릿한 달콤함을 이어서 즐겼다. 그리고 그는 “그냥 벤이라고 불러”라고 말했고, 그녀는 “여전히, 하나라고 불러” 하고 말했다.      


 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맞닿은 국경의 작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영 강사로 일하다 스무 살 무렵 다이빙 강사가 되어 몰디브, 모리셔스 같은 바닷속 세상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전 세계 곳곳을 옮겨 다니며 오랜 시간을 보냈고,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일본 이시가키섬에 조그만 다이빙 센터를 열었다. 4월부터 10월까지 이시가키섬의 다이빙 시즌이 끝나면 나머지 시간엔 프랑스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이곳저곳을 여행한다. 예전에 몰디브 다이빙 리조트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를 보러 꼬따오에 들른 벤은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프랑스에서 살았던 시간만큼 프랑스 밖에서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 이제 나를 프렌치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여전히 어딜 가든 나는 ‘프록(개구리)’이지, 뭐…” 하며 크게 웃었다. 그녀는 수많은 유러피언(특히 영국인)이 프렌치를 구분해 비하하고 조롱하는 용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단어를 프렌치 당사자 입으로 들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암 쏘리(유감이네)’라고 해야 하나, 그냥 유감의 표정으로 침묵을 지켜야 하나 고민하던 그녀를 보고 벤은 또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너 지금 너무 당황한 표정인데?” 그러고 나서 둘은 까다롭다, 시끄럽다, 거만하다, 불평불만을 잘한다, 자존심이 세다는 등 일부 프렌치도 동의한다는 세상 사람들의 프렌치에 대한 고정관념을 얘기했다. 한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은 없었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수줍음이 많다, 예의 바르다,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하지 않는다 같은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세상도 이방인을 배타하고 얕잡아보는 ‘짱깨’ ‘쪽발이’ ‘깜둥이’ 등의 혐오적인 용어를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에서 쓰는 데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생각했지만, 이를 영어로 제대로 전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해 그만뒀다. 그게 이방인에 대한 이해가 달리는 무조건적인 적개심이든 세심하지 못한 친근감의 표현이든 언제나 당하기만 했던 민족의 본능적인 자기방어적 기질이든 사람들은 언제나 편을 가르고 층을 나누고 용어를 붙여 의미를 부여해 서로가 있어야 할 곳과 역할을 구분 지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목숨을 걸고 제 편을 만들어 ‘우리가 남이가’라는 견고한 연(緣)의 사회를 만들었다. 학연, 지연, 혈연을 통틀어봐야 아무 연도 없는 그녀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연도 실력’이라는 그 세상의 또 다른 버전이 이 섬에서도 계속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 그녀는 세상 어디에서 누굴 만나 무엇을 하든 ‘한국인’의 고정관념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둘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선량한 호기심 넘치는 자유로운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웬만해선 나이를 묻지 않는 문화를 가진 벤의 세상이 마음에 들었다. 상대의 나이를 몰라도 대화를 이어가며 친구가 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그의 세상. 그녀는 정말 지쳐있었다. 어딜 가든 함부로 나이를 묻고, 결혼했느냐 묻고, 안 했다고 하면 그 나이에 결혼을 안 하면 어쩌냐 묻고, 남자친구라도 있냐고 물어 없다고 하면 세상이 곧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를 절망스럽게 바라보는, 그 무작위로 사방에서 날아드는 폭탄 같은 눈빛과 무신경하게 선을 넘으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위한 호의를 베푸는 듯한 가식적인 무례함에, 남자 없이는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여자라는 삶에 대한 무력감에, 그녀는 정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새벽 두 시, 마감을 마치고 액체가 된 몸으로 흘러 들어간 택시 안에서 그녀는 저절로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여자가, 이 시간에, 혼자 뭐 하다” 쉼 없이 지껄이는 택시 기사 아저씨를 견뎌내야 했다. 헤어지고 택시를 태워 보내고는 일상의 루틴처럼 차량번호판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는 친구들도 없는 마감 퇴근길은 룸미러로 그녀를 내내 훑고 있는 아저씨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고 ‘제발 오늘만은 아니길’ 바라며 휴대폰에 112를 눌러놓고 통화 버튼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새벽이면, 그녀는 택시로 1시간은 달려야 닿는 서울 변두리에 사는 신세를 타령하며 내일 당장 서울에 집을 알아보겠다고 다짐하며 잠이 들었고 3시간 후 새벽 6시에 일어나 다시 강남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하며 모든 걸 잠시 망각했다. 사실 그녀가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건 언제까지 누군가가 선한 사람이길 바라며 일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무력감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이 지내온 세상의 드문드문 떠오르는 단편적인 풍경들을 벤에게 들려줬고, 그는 말없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끝내 남들처럼 견뎌내지 못했다는 실패감과 ‘남들도 다 그러고 살아’라는 엄마의 끊임없는 나무람에 대한 분노, 그 반대편에서 고개를 드는 죄책감에 관해 이야기했다. “서른넷이나 됐는데… 내가 이제 다시 뭘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 말을 뱉고도 그녀는 스스로 놀라 당황했다. 누가 묻지도 않은 나이를 스스로 고백하며 그 한계까지 인정해 버리자니 이제 모든 건 그녀의 도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였을 뿐 문제의 근원은 결국 구제 불능 그녀 자신이라는 걸 자백한 것만 같았다. 그때, 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아담한 해변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마치 저 멀리 누군가가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처럼 공간감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주위부터 둘러봤지만 삼삼오오, 혹은 혼자서 달빛 아래 앉아 있던 사람들 그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다 시선을 내리깐 그녀에게 그는, “너, X 나게 어려(You’re f**king young)”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제대로 듣지 못했을까, 그녀의 짙은 갈색 눈동자를 끌어올리고는 다시 한번 음절 음절을 하나씩 툭툭 끊어 말했다. “너. X. 나. 게. 어. 리. 다. 고!”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대체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Why not)?” 다른 세상에서 온 이방인의 입으로 소리가 되어 나온 한 문장의 강렬함에 그녀는 완전히 압도됐다. 낯선 이가 내지르는 이 용감한 선언이 앞으로 그녀의 길을 오래도록 함께할 것 같았다. 그녀의 세상에서 오래도록 알아 왔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것이 될 거라 생각한 적 없던 문장. 그 순간, 그 문장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다가와 그녀의 것이 되었다. 끝없는 자기 검열에 지치고도 아는 게 그뿐이라 또다시 그 고된 일을 이어가던 그녀는 갑자기 용기가 솟구쳤다. 그동안 그녀에게 가혹하게 굴어온 건 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너무 못살게 굴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어른 둘이 낭만의 달빛이 흐르는 해변에 앉아 두 손과 얼굴이 벌게지도록 망고스틴을 까먹으며 아이처럼 까르륵거리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어쩌면 이 우연이 만든 순간을 위해 이 섬에 온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호의 이면에 깔린 진의를 의심하지 않고, 서로를 남자와 여자를 넘어 인간으로 대하며 한없는 존경과 배려를 채워 넣은 어른스러운 대화는 그녀에겐 정말 오랜만이었다.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는 벤은 그녀에게 동행을 제안했고, 그랬다면 그들은 어쩌면 로맨틱 영화에 나올 법한 멋진 밤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섬에서의 첫날밤을 온전히 그녀만으로 충만하게 기념하고 싶었다. 그가 떠나고, 멈췄던 음악을 다시 플레이하고, 그녀는 이미 오래전 캄캄해진 해변의 짭조름한 밤공기를 쑥 하고 크게 들이셨다 천천히 내쉬었다. 반전의 과일 망고스틴 껍질 몇 개가 놓인 그가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며 그는 어쩌면 그녀가 만든 환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을, 누군가가 그녀에게 소리내어 말해주길 바라는 바람이 통한 걸지도 모른다고.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솔직해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비로소 엄격하기만 했던 자신에게 부드럽고 관대해졌다는 안도감과 편안함이 아득하게 몰려왔다. 이 섬의 아무도 그녀를 몰라 누구에게도 잘 보일 일 없이 오롯이 자신에게, 그리고 좋아하는 바다와 노을과 망고스틴, 싫어하는 머리카락에 집중하던 그녀의 알록달록한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제 도망이라도 상관없다. 후회와 원망은 미루고, 지금은 그 용기에 축배를 들 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