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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Sep 02. 2024

04. 그래도 되는 사람들


 그녀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새벽을 맞았다. 옆방에 머무는 유럽에서 온 젊은 남자 둘이 서너 명의 일행을 더 불러 모아 파티를 한 덕분이었다. 침대와 TV, 작은 냉장고가 있는 작은 방에 화장실이 딸린 객실들은 나란히 일렬로 붙어있었고, 객실 전면은 통유리로 된 미닫이문으로 이뤄져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복도로 연결돼 커튼을 제대로 치지 않으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섬에 있는 숙소 대부분이 방음이라곤 기대할 수 없었고, 대부분 ‘파티 금지’라는 팻말을 리셉션에 달아 놓았지만 가끔은 소용없는 밤들이 있다. 각종 힙합과 팝 음악의 쿵쿵거리는 베이스 진동이 그녀의 방으로 전해졌고,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내지르는 비명이 음악에 얹힌 랩처럼 들려왔다. 몇 번이고 밖으로 뛰쳐나가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만취한 외국인들을 상대로 자신이 조용히 잠들 권리와 그들이 밤을 즐길 권리를 따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만큼 괴로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누군가가 나서길 기다렸지만 2층이나 되는 건물 객실마다 들어찬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아무 문제 없이 잘 자고 있거나 너그럽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초대받지 않았지만, 옆방 홈파티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한 듯 진이 빠진 그녀는 그들만의 파티가 끝나고 동이 틀 때쯤 더 이상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바닷가를 산책하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옆방과 그녀의 방으로 이어진 복도 위에 따라 하얗게 덮인 정체 모를 흰색 가루와 술병이 나뒹구는 모습이 펼쳐졌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대학에 다니면서 주말엔 홍대 힙합 클럽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그녀는 사람들의 욕망이 뒤섞이다 폭발하고 난 후의 혼돈과 무질서의 광경에 익숙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들의 파티에 동참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 구하기도 듣기도 힘들었던 힙합 LP를 가져다 틀어주는 클럽 디제이들 때문에 서울 변두리 위성도시에 살던 그녀는 대학이 있는 인천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 집에서 내리는 역을 지나쳐 신도림에서 2호선을 갈아타고 날이면 날마다 홍대입구역으로 향했다.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면서 콜라만 홀짝거리며 음악만 듣다가는 그녀에게 클럽 사장님은 주말 아르바이트 자리를 제안했고, 그녀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돈까지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허락했다. 서울시와 마포구, 각종 주류 및 담배 브랜드들이 뛰어들어 ‘클럽데이’라는 상업적 행사를 만들기 이전엔 이삼십 명 내외 사람들만 들어서도 꽉 차는 매캐한 지하공간에 힙합, 트랜스, 하우스, 테크노 등 다양하고 세부적인 음악을 전문적으로 트는 각각의 클럽이 열댓 개는 넘었다. 그때 주말의 홍대 놀이터를 채운 건 미국의 힙합 MC들의 복장을 이태원에서 공수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라 한 힙합퍼와 보헤미안, 부유한 재미교포,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눈치 안 보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을 봤고, 한국 여자들을 당당하게 희롱하는 미군들을 봤으며, 그런 미군들에 일부러 접근해 술을 얻어 마시는 여자들도 봤다.      


 그 모든 욕망의 오해와 충돌과 혼돈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욕망의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이거나 해결사, 혹은 청소부였다. 그녀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고는 오직 자신만을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자부심과 성취감을 느꼈다. 욕망이 들끓는 곳에서 욕망하지 않는 그녀는 그렇게 보잘것없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채웠다. 그녀는 자신이 당장이라도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욕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술과 마약, 섹스에 빠져 영혼을 갈아낀 사람들을 관찰하고 판단하고 비난했다. 어둠이 모든 것을 덮어주던 시간이 끝나고 텅 빈 클럽 안에 환한 청소등이 켜지면, 부상의 상처로 꺼이꺼이 울며 뒤엉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나면, 그 사람들이 흘리고 간 핏자국 같은 술병들과 담배꽁초, 토사물을 치우는 걸 성대한 의식처럼 치르고 클럽 문을 닫은 후 푸른 수증기가 낀 홍대거리를 빠져나와 첫차를 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여전히 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그 거리에서 유일하게 술에 취하지 않은 그녀의 길을 막아서서 “한 잔 더 하자”라고 했고, 아직 한 잔도 한 적이 없는 그녀는 그럴 때면 경멸 섞인, 하지만 두려운 눈빛과 서글픈 마음으로 잔뜩 몸을 움츠리고 종종거리며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빛이란 빛은 모두 가리고 낮 동안 아주 길고 깊은 잠을 잤다. 낮보다 밤이 익숙해진 그녀가 하루하루를 그냥 그렇게 빨리 흘려보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정해야 했다. 한편으론 그 혼란을 일으키는 무책임과 방종이 부럽기도 했다는 것을. 살면서 매 순간순간, “남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살아”라고 신신당부하던 아빠를 떠올리며 문제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누군가의 문제를 목격하고 해결해야만 한다는 집착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모든 것에 예민하고 사사건건 불평불만을 품었지만, 그것을 세상에 따지고 소리칠만한 배포나 용기는 없어 그저 선을 넘지 않을 만큼 호기심을 부리다가 다시 돌아 나왔다.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중심을 잡는 게 내심 자랑스럽고 뿌듯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언제나 자신보다 남들 눈을 더 생각하는 게 답답하고 마음에 안 들기도 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엉망이 된 복도를 좀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숙소를 관리하는 앳된 얼굴의 태국 여자가 나타나 엉거주춤한 자세의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가 체크인할 때 본, 자신을 ‘난’이라고 소개한 여자였다. “어젯밤 아주 시끄러웠지?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난이 그녀에게 말했고, “아니, 네 잘못이 아닌데 뭘. 이런 일이 자주 있어?” 하고 그녀는 물었다. “가끔. ‘파랑’들만 그래.” 난이 말한 ‘파랑’은 태국인들이 백인을 칭할 때 쓰는 용어다. 태국에 있는 모든 외국인을 칭하는 말이 아닌, 오직 백인들만 일컫는 말이다. 파티의 주인공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그들의 방 역시 비어있었다. 문을 열고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과 쓰레기를 발로 휘적이며 길을 만들며 들어간 난이 전면 통유리창을 가린 커튼을 거두자, 복도에 서있던 그녀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객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익숙하다는 듯 난은 침대 쪽으로 다가가 낑낑대며 매트리스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얀 가루와 술 자국으로 얼룩진 바닥 면이 드러났고 그녀는 후하고 옅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곤 다시 방 안을 한번 둘러봤다. “아임 쏘 쏘리.” 하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며 난에게 말하고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커다란 쓰레기와 술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자기 나라로 돌아가선 절대 안 이럴 거야, 그렇지?” 씩씩거리는 하나에게 난은 너무 차분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그래도 되는 나라니까….”     


 난이 객실을 청소하는 사이 그녀는 복도를 대충 정리해 주고 산책길에 나섰다. 어스름한 새벽에서 햇살 가득한 아침으로 바뀌는 사이에도 게으른 섬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듯 고요했다. 바닷가 바로 옆에 난 좁고 길게 뻗은 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조깅하는 사람들, 키우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인다. 모두 파랑들이다. 세상에서 늘 앞서있고, 깨어있고, 진보되었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 세상 어딜 가든 본래 그 땅이 자신들의 것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 자신의 모국어만으로도 세계 어딜 가든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한 사람들. 영어를 잘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그녀의 나라가 더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언제나 롤모델 삼아 따라가야 한다고 배웠던 사람들. 그녀는 걷던 길을 빠져나와 해변으로 들어섰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태국의 하고많은 섬 중 이 작고 외딴곳에 끌렸는지 알 것 같았다. 몇 년 전 그녀가 푸켓 여행에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하는 태국의 풍경은 어딜 가나 마주쳤던 육칠십 대의 늙고 뚱뚱한 백인 할아버지들이 기껏해야 십 대 후반이나 이십 대 초반인 태국 여자들을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니던 모습이었다. 남자들은 ‘슈가 대디’라, 여자들은 ‘골드 디거’라 불렸다. 이 섬엔 적어도 그런 커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마도 들어오는 길이 험하고 대도시의 편의시설이 없어 나이가 많이 든 백인들에겐 그다지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때 푸켓에서 만나 친해진 태국인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는데 대부분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 많고 나이 많은 백인 남자를 만나는 거라고 했다. 그녀의 나라도 한때 그랬다. 한국전쟁이 끝나고선 미군을 상대하는 성매매로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여성들이 많았고, 비즈니스로 한국에 오랜 기간 머무는 일본인 남성들이 한국에 현지처를 두는 일도 쉬쉬하지 않았다. 그랬던 나라가 이제 필리핀에 갔다가 아이를 낳고 내빼는 통에 ‘코피노(코리안과 필리피노 사이에 태어난 아이) 마을’이 생길 정도로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타이밍만 다를 뿐 그녀의 나라에서 흔했던 일들이 지금은,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음은 어디일까. 유일한 게 바뀌지 않는 건 ‘그래도 되는’ 나라들, 그리고 사람들이었다.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나라들과 사람들은 그녀의 나라처럼 죽을힘을 다해 돈을 벌어 목록에서 벗어나거나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방법뿐이었다. 이 작은 섬에서마저 피부색은, 인종은, 출신은 권력이었다.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돈과 힘의 논리가, 잘사는 나라의 오만함과 못사는 나라의 체념, 좌절감, 그리고 피해의식이 이 작은 섬 곳곳에 배어있다는 게 불쾌하고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론 어쩔 도리가 없어 서글프고 서러운 그녀는 조금 외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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