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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Oct 31. 2024

21. 삶을 고통으로 느끼는 재능


 그녀는 어김없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 해가 뜨기 전 바다에 나와 이미 한차례 다이빙을 마치고 또 지루한 수면 휴식 시간이다. 애초에 바닷속에 들어가 숨을 쉬며 머무는 게 허락되지 않은 인간이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은 그녀에게 생각보다 짜릿한 반항이었다. 수중의 압력으로 압축된 공기를 마시며 쌓인 질소를 빼내지 않고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다이버는 반드시 최소 1시간은 뭍으로 나와야 했다. 수면 휴식 시간 동안 그녀가 할 일은 간단했다.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 계속해서 날숨으로 온몸에 녹은 질소를 빼내는 것.     


 “넌 참 극단적이야.” 잘 다니던 잡지사에 사표를 내고 이름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섬으로 그녀가 떠나겠다고 했을 때 경환은 말했다. 사회에서 가장 화려한 깃털을 잔뜩 세우고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한 패션과 예술의 세상을 배회하며 끊임없이 가시에 찔리고 아파하던 그녀는 그의 앞에서야 온갖 불평불만을 펼쳐 냈다. 그녀는 화려한 공작새가 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며 스스로 그리되는 걸 경계했다. 인디 음악을 하며 수년째 수십 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는 삶을 이어온 경환은 기꺼이 그녀와 친구가 됐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절망과 고통의 깊이를 재는 대신 심연의 상태를 살피는 시간을 함께했다. 경환은 그녀가 결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걸 알았지만 홍대 골목 구석에 아무도 모르는 바에 턱을 괴고 앉아 새로 발견한 엄청난 음악을 하는 해외 인디 뮤지션과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며 지새던, 그나마 좀 덜 외로웠던 밤을 빼앗긴 것만 같은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 내가 그 극단의 미학을 보여줄게.” 그녀는 한국을 떠나는 날, 경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바다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 바다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수면 휴식 시간, 보트 위에서 끊임없이 떠드는 다이버들의 말소리가 공기에 떠다니다 사라졌다. 억겁의 시간을 간직한 바다를 제집처럼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드나들며 경외감에 사로잡히면서도 뭍으로 올라오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이 떠올랐다가 그립다가 흐릿해졌다. 그녀의 하루에서 바닷속 몰입의 시간을 거두고 나면 끝도 없는 신경질적인 불안과 안정의 안도감 사이를 오가는 한 줌도 안 되는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바다는 그녀의 모든 세월을 침묵 속에 목격 중이다. 그녀는 어떨 땐 바다의 무한함과 영원함에 마음을 잃었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와 내일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지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게 그녀는 오늘, 지금, 여기의 현재를 또다시 잃어버리고 방황한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현실을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 세상 그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몰랐으면 하는 마음과 누군가 그녀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사이에서 후자가 이기는 날이 아직 더 많다. 누군가 그녀를 얼마큼 알고 인정하는가, 딱 그만큼만 그녀는 자신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그녀의 엄마와 아빠의 삶을 확신 없이 좇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반대편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 망상으로 만들어 낸 헛헛한 허무함과 무거운 불안과 깊은 절망에서 벗어나 내일을 욕심내지 않고 오늘에 충실한 삶의 고귀함을 살아보고 있다. 정직하게 몸을 쓰는 육체노동은 그녀의 마른 몸에 단단한 근육을 붙이기 시작하고 단단한 중심을 잡아줬다. 밤 열 시만 되면 어김없이 하품이 나왔고 그녀는 마침내 불면증에서 벗어났다. 한 달에 월세 40만 원 정도 하는 스튜디오는 발코니 창문만 열고 한 발짝만 나가면 야자수가 우거진 정글과 끝없이 펼쳐짐에도 위협하지 않는 바다에 둘러 있다. 습관적으로 들른 스타벅스 커피도 없고, 정기회원권을 끊어놓고 결국 마지막 날 라커에 고이 잠든 새 운동화를 찾으러 가는 헬스클럽도 없고, 한 달 내내 고생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쓰지도 않을 보상 심리의 상자에 든 물건을 쇼핑할 일도 없다. 그저 그녀가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배부르지 않게 먹는 두 끼의 간단한 식사뿐이었다. 티셔츠는 다이빙 센터에서 공짜로 가져다 입고, 색깔만 다른 똑같은 디자인의 반바지 두어 개를 사다가 번갈아 세탁하며 돌려 입는다. 대부분 맨발로 생활하지만 그나마 격실을 차리는 자리에 갈 땐 플리플랍 한 켤레면 된다. 친구들과 바나 클럽에서 파티를 즐기는 날엔 술 취한 누군가 그녀의 플리플랍을 실수로 바꿔 신고가기도 하는데 다음 날 섬사람들이 모여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어김없이 “어제 내가 술에 취해 누군가의 플리플랍을 신고 갔네, 미안! 이거 본 주인은 연락해 줘” 하는 귀여운 메시지가 올라온다.  

    

 그녀의 단순한 삶을 지탱하는 것은 언제고 바닷속에 뛰어들어 몰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넘쳐나는 섬이기에 가능했다. 극단적이지 않았다면 영영 경험할 수 없었을 새로운 하루와 실수가 너그러이 용인되는 귀여운 사회에 그녀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행복을 좇기보다 작은 의미와 만족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생기를 띄기 시작했다.      


 “선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나요? 오늘 지하철 타고 출근하는 길에 선배가 예전에 했던 ‘섬’ 이야기가 생각나서 안부 전해요.” 보트 위층으로 올라가 한쪽 난간에 앉아 다리를 바다 쪽에 걸쳐놓고는, 그녀는 오늘 새벽에 날아온 노을의 문자를 떠올렸다. 기자가 달랑 둘 뿐인 독립 잡지사에서 한 달에 60만 원을 받고 계약직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편집디자이너 보조로 들어온 노을이었다. 그래봐야 몇 달 먼저 들어온 건데 노을은 그녀에게 ‘선배’라 부르며 깎듯이 챙겼다. 밤샘이 일상인 일에 이제 막 뛰어든 둘이었지만 노을은 그녀의 몇 년 더 산 나이를 인생 경험이라며 쳐줬다. 그녀는 그런 게 늘 불편했다. 그렇게 시간을 잘게 쪼개 서로 있어야 할 곳과 적당히 두어야 할 거리를 정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사회생활에서 가장 힘든 건 역시 사람이에요, 그렇죠?” 손목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작업 PC 모니터에 빠져들어 갈 듯 고개를 쭉 빼고 어깨를 한데 모아 마감하던 노을이 갑자기 그녀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는 그때 그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서로 연결되려고 안간힘을 써도, 결국 그때뿐이야. 사람들에겐 죽어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침범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섬이 있어. 그러니까 노을아, 너는 너만의 섬을 가꾸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해. 너만의 섬을 아름답게 가꾸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야.”     


 그녀는 지금 자신만의 섬을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하는 중이다. “그러다 나중에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모아둔 돈도 없이 어쩌려고?” 그녀가 회사를 떠날 때 팔짱을 끼고는 흘기는 눈으로 혀까지 끌끌 차며 그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 부른 한 선배는 나중에 아플 걸 대비해 오늘 죽도록 일하다 결국 스트레스로 큰 병을 진단받고 회사를 그만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는 이제까지 살아온 세상에서 근본적으로 갖고 태어난 강박 관념과 학습된 도덕의식이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새로운 세상의 바다에 섬처럼 떠 있다. 부를 탐하고 돈을 좇는 것은 근사하고, 반대로 그것을 경멸하는 것도 근사하다. 모든 희망을 버리고 체념에 휩싸여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 또한 멋지다. 또 세상의 유혹과 쾌락을 뻔뻔하고 열정적으로 좇는 것도 멋지다. 그녀는 세상과 타협하는 데 실패했고 그 사회의 고상한 일원이 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옳고 그름과 선과 악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로 했다. 그녀에게 이제는 바다가 욕망이다.     

 

 이 세계에서 그녀는 여전히 낯선 이방인이고, 바닷속에서도 그녀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그녀는 남들은 빠르면 2주에도 끝내는 다이브마스터 트레이닝을 몇 달째 이어가고 있었다. 다이빙 로그수 60회면 다이브마스터 자격을 얻는 데 충분하지만, 그녀는 이제 막 로그수 100회를 넘기고도 성에 차지 않았다. “좋은 다이버가 되고 싶어서”라고 말하며 다이브마스터 인증에 요구되는 모든 걸 다 끝내놓고도 클로드가 다이빙을 가르치는 수업마다 참관하고 보조하며 현장에서 실전의 경험을 배우는 그녀에 다이빙 센터의 동료들과 다른 강사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뭍에서의 인간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는 바닷속의 고요함으로 다이빙에 빠진 그녀는 이제 바닷속에 다른 소리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딸깍딸깍. 바닷속 자신의 호흡 소리를 잠재우면 미세하게 들려오는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가 바닷속에서 들린다. 바로 산호초들이 내는 소리다. 이제 그녀는 수면보다 바닷속을 보는 법을 탐구하는데 빠져들었다. 잊을만하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래상어는 그녀의 바다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행여라도 사라질까 주의라도 주는 것 같았다. 그녀가 바닷속에서 요즘 가장 사랑하는 순간은 바닷속의 모든 생명체가 그녀를 보고 놀라거나 위협을 느껴 피하지 않고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을 때이다. 여전히 그녀는 바닷속 세상의 이방인이지만 어차피 뭍으로 올라가 봐야 달라질 게 없다. 아닌 척하며 누군가의 곁에 머물고 또 누군가를 이해하는 시늉을 하겠지만 결국 인간들은 모두 저마다의 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녀는 태어나 지금까지 늘 어떤 방식으로든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꼈다. 인생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묘사하는 화가들이 잔뜩 들어찬 방에서 혼자 검은 물감과 붓을 들고는 인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제 나름의 욕구를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늘 삶의 주변부를 서성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잠깐이라도 그녀의 삶 정중앙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바로 그녀를 스스로 인정하고 힘을 북돋워 주는 바닷속에서의 체험 때문이었다.     

 

 그녀는 삶을 고통으로 느끼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 그녀는 절망이라는 감정에 익숙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삶이 좀 견딜만한 것이라는 아주 자그마한 힌트라도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기도해 왔다. 삶과 사회, 문화, 그리고 정신, 그 모든 요구를 진지하게 여기고 그에 부응하고자 노력할 때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었다. 그녀 나름의 정의와 이성과 인내와 책임에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자신만의 눈과 귀로 세상을 보고 말하는 용기를 감히 쟁취하지 못했다. 그럴 용기가 없는 자신을 가엾게 여기다가도 책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따지는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그녀의 삶이었다. 그녀는 작은 구원의 체험을 통해 절망을 견딜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해진다는 걸 느꼈다. 어차피 그녀는 완벽히 건강해질 수 없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절망을 넘고 또 다른 절망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사이, 그 찰나의 밝은 빛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도 그녀가 지금 뿜어내는 호기심은 그녀의 운명과 미래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잠시 뭍에서 연결되었던 섬들, 이제는 모두 제각각 떨어진 섬들의 사람들을 기억 속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녀가 익숙한 외로움과 고독, 고립감, 절망감, 수치심 등의 내면의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모르는 것은 오래 기억하기 어렵다. 그녀가 외면하지 않되 그 감정들에 정복당하지 않는 것. 그녀가 지금 기꺼이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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