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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Aug 30. 2024

비 때문이야, 락 블랑 너 말고.

3.

순간이었다. 미끄러지면서 넘어졌다. 중심을 잡으려다 잡지 못했으니. 스틱의 찍찍이가 잘못 붙어서 이를 바로잡으려다 생긴 일인데, 아프다. 누가  봤을까 주변을 둘러보고. 창피해서. 이런 곳에서 넘어지다니. 바지를 걷어 올리니 정강이가 바위에 찍혔다. 피도 나고. 비는 오고. 마침 비상약품을 숙소에 놓고 왔으니. 오도 가도 못할 수는 없어서, 가던 길 락 블랑(Lac Blanc 2,352m) 방향으로 올랐다. 나중에 하산하다 플레제르(La Flegere 1,877) 승강장 앞에서 선배가 가져온 의약품으로 나름 처치를 하고. 

플레제르 승강장 주변 모습. 프랑스 사람들이 떼로 나타났다.

선배가 약사라서 약품을 제대로 준비해 온 덕인데, 정강이뼈에 난 상처는 지금도 남아있다. 이건 날씨 탓이지만, 의자에 앉아 처치를 받던 중 옆에 서양 남자 두 명과 어린이까지 세 명이 있었는데, 그중 어른 두 명이 제법 심각하게 뭘 얘기하는 것 같았다. 뭐든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은 바로는 이곳 플레제르 어딘가에서 어제 누가 죽었다고 했었다. 죽어? 여기서? 이런 곳에서? 체온 변화 때문인가? 심장마비? 나중에 선배한테 물어보니 누가 죽긴 죽었나 보다. 그 선배는 미국 교포였으니 제대로 알아듣긴 했을 것이다. 

락 블랑 맞은 편 모습. 그 유명한 메르 드 그라스(오른편 아래)도 살짝 보이고.

아침부터 아니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도 비가 내려 친숙했으면 좋으련만. 오다 말다가 아니라 주룩주룩 비가 왔지만, 숙소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으니, 다들 여장을 매고 길을 나섰다. 오늘 일정은 락 블랑(호수 블랑)에 오르는 것이다. 샤모니에서의 일정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원래 계획이 먼지 아리송하던 차에 가보지 않은 코스를 간다고 하니 길을 나선 것이다. 레 쁘하즈(Les Praz 1,062)에서 플레제르까지 리프트 타고 올라서 거기서 락 블랑까지 걷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중생들. 어찌어찌 길을 만들어 내려왔다.

계획이란 건 바뀌라고 있는 거니 플레제르에서 랑덱스(L'Index 2,396m)까지 더 올라 락 블랑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워낙 리프트 타는 걸 좋아하는지라 쾌재를 부르고 떠났는데. 플레제르에서 오르면 오르막길을, 랑덱스에서는 내리막길을 걸어가야 하는 그 길에  눈이 쌓여서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왕좌왕. 눈 속에서 올라가자니 길이 보이지 않고, 앞에는 바위투성이에 경사져서 갔다간 사고가 날 테고, 왔던 길로 다시 가려해도 눈길을 해쳐온 것이라 뚜렷하지 않아서, 일행이 다 그냥 눈에 엉덩이를 대고 내려왔다. 언덕에서 아래 평지까지. 내 바지가 썰매가 되었다.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그냥 즐겼다. 누구 말에 의하면 내가 내려온 속도가 가장 빨랐다나! 

저 멀리 에귀디미디가 보인다. 몽블랑은 저 너머 어디라는데.


몇 미터를 순간 이동했는지 내려온 후에도 없는 길을 이리저리 바위와 물길을 피해서 없는 길을 길로 만들어 내려왔다. 신루트 개척?? 뉴스에 안 나오나? 플레제르에서 갔으면 만날 길을 중간에 만난 안도감에 다들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서. 잘못 미끄러져 내려온 두 사람은 근육통이 생겨 바로 그날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몸이 긴장을 한 거다. 그냥 마음껏 눈에서 엉덩이로 미끄러졌으면 괜찮을 텐데 말이다. 남이야 아프든 말든. 사실은 나도 내려갈까 하긴 했었다. 이러다 다치면 나만 고생 아닐까라는 몹쓸 마음 때문에 난 결국 어처구니없게 엉뚱한 장소에서 바위에 정강이를 찢고 말았던 것이다. 벌받았다 벌!

락 블랑 가는 길.

락 블랑 가는 길은 날씨가 좋으면 누구든 무리 없이 걷는 길. 날씨가 차라리 덥지 않은 것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알다시피 맞은편 빙하와 눈 덮인 하얀 봉우리들이 구름도 끼고 비도 오니 더 멋지게 보인 것 사실이다. 몸이 좀 고돼서 그렇지 경치는 정말 죽여준다. 이 맛이다. 이 맛. 그렇게 걷고 싶었던 TMB(뚜르 드 몽블랑) 프랑스 지역에서 걷는 일정이 같기 때문에 그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바늘 전망대 에귀디미디가 언뜻언뜻 보이고. 더욱이 락 블랑 가는 길이 여간 예쁜 것이 아니다. 그런 곳에서 다쳤으니.

이때는 잠시 날씨가 좋았었는데.

비는 와도 마음은 중간에 포기란 없으니, 어떻게든 호수에 도착해서 설산을 배경으로 얼음 호수를 앞뒤로 끼고 폼을 재던 차에, 날씨가 더 심술을 부렸다. 빗줄기가 더 굻어지고 바람이 새 차져서, 날씨 핑계 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호수 근처에 도착한 이들은 우리가 속히 내려가는 걸 보고 바로 따라왔는데, 그들 보고 좀 더 가면 호수가 나온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호수를 눈앞에 두고 철수하는 그들을 뭐라고 하기엔. 안전이 최고라서. 다치면 안 되기에. 날씨가 좋지 않아 이제는 속보 경쟁이 되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정신없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이혼 후 헤어진 부부 사이가 이랬을 거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내려오니 금방 내려온 것 같았다. 플레제르 승강장까지 말이다. 

락 블랑.

여기서부터는 자유 시간이다. 밑 정류장까지 알아서 내려가서 돌아가던지. 바라던 바였다. 혼자 있고 싶었다. 외국 여행자에 한해서 패스를 보여주면 버스가 공짜였기에, 저녁 시간에 맞춰 돌아가기만 하면 되고. 사실은 올라갈 때 봤던 성당이 눈에 확 들어왔다. 리 프라에 있던 성당이 나를 반겨준 것 같다. 그렇게 믿는다. 설산이 배경이고 날씨도 우중충하니 예쁘다. 예뻐! 탈 없는 산행이라 감사하려는 마음에 성당 안에 들어가니 어떤 여성이 제일 앞에서 앉아 있다. 묵상을 하는 듯. 이크, 방해하면 안 되니 바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얼쩡 거리다 아르젠티에르로  돌아왔다. 내가 머문 곳이 어떤 곳일까라는 호기심에 아르젠티에르 탐방에 나섰는데, 샤모니 변두리 이곳도 괜찮았다. 저 멀리 몽블랑이 보이고.

아르젠티에르에 있는 성당과 묘지. 리 프라 정거장 근처 성당이 더 예뼜다(왼편 위).

뻥쳐서 오늘 약간 죽음을 생각했다면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건 맞는데, 정강이뼈 다친 정도로 하루를 마무리해서 감사를 하긴 해야 할 것 같다. 남의 나라에서 그나마 덜 다친 게 어딘가 하는 마음. 그나저나 내일은 날씨가 어떨까? 하느님께 기도해야지. 비 좀 멈춰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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