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샤모니 몽블랑
1편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16:50'으로 시작한 거꾸로 쓴 여행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에 다다랐다. 28일에 걸친 여행의 종착역은 샤모니 몽블랑이다. 결론적으로 이곳 샤모니 몽블랑에서 트레킹을 시작해서 로마에서 끝난 것이다. 항상 즐겁지 않은 것이 여행이지만 그걸 굳이 감수하면서도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후기를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이 알아주었으면 하지만 그 남이 누군지도 모르는 남이기에 이건 거의 자족에 가까운 작업이다. 그럼에도 무수히 사람들이 많은 여행기를 남기는 건 기억을 기록으로 만들고 싶은 거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더해서.
이곳에 오기 위해 그저께 한국을 출발해서 제네바에서 하루를 묶고 이곳에 왔다. 프랑크푸르트까지 14시간의 비행과 5시간의 대기시간을 거쳐 제네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렇게 온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인데, 프랑스인이라면 반대로 샤모니 몽블랑 역에서 출발해서 세상을 향해 나갈 수도 있다.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딜 때 느끼는 것은 처음이 끝이 아니고, 마지막이 또 다른 시작인 것 같다는 것이다. 설마, 내 생에 이번이 마지막 여행일까? 그렇지 않기를 바라면서 두발을 다른 세상에 내딛는 것이다.
어제 제네바 레만 호수를 걷다 오늘은 샤모니 시내를 걷는다. 몇 년 전부터 뚜르 드 몽블랑(TMB)을 몇 번에 걸쳐 시도하다 포기했는데, 하늘님(?)께서 은사를 내리셔서 이곳 샤모니에 온 것이다. 그러니 결코 포기란 있을 수 없어야 한다. 바라면 언젠가 될 것 같은. 되어야만 하는. 그렇게 시작된 하루. 시작은 샤모니에서 몽땅베르(1,914m) 역까지 열차 타고 편안히 오르면서였다. 샤모니가 협곡 사이에 있는 산악마을인지라 오르면서 왼편에는 그랑 조라스(Grand Joras, 4,208m), 오른편에는 몽블랑 산군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니 예쁠 수밖에 없다. 이런 모습은 체르마트나 그린델발트도 따라오지 못한다. 인터라켄이 좀 비슷하려나?
역에서 내리면 먼저 방문객을 맞는 건 빙하인데, 거의 눈이 다 녹아있는 상태이다. 제앙 빙하와 레쇼 빙하가 만나 메흐 드 글라쓰라는 빙하를 이룬 거라는데, 빙하의 표면은 흙먼지 풀풀 날 것 같다. 표면에 쌓여있어야 할 눈이 다 녹아 아쉽네 하던 차에 누가 그랬다. 겉은 그렇지만 저 밑이 다 얼음이라고. 이건 그곳에 있는 얼음 동굴에 들어가 보면 안다. 정말 얼음이다. 날씨가 더 더워지면 이마저도 녹겠지만. 인간의 탐욕이 여기서 멈췄으면, 이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으니 그 심각성을 바로 인식하지 못해 아쉽지만, 하는 바람을 가지고 걷다 보니 어린 학생들이 눈에 많이 띈다. 수업 때문일까? 앞에서 열일하는 노동자들은 잠시 쉬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학생은 수업을 노동자는 공사를. 그럼 그게 그거다! 일하나 공부하나.
이곳에서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메흐 드 글라쓰 빙하는 에귀이 듀 미디 봉우리 오른편에 있는 보쏭 빙하와 함께, 락블랑과 브레방 쪽에서 보면 항상 눈에 띈다. 샤모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들 못지않게 샤모니를 상징하는 빙하이다. 메흐 드 글라쓰 빙하에서 시작된 트레킹은 몽땅베르 역 반대 방향으로 시작된다. 이곳에서 시작해서 쁠랑 드 레귀이(Plan de L'Aiguille)까지 걷는 것이다. 반대편으로 걸어와도 된다. 보통 샤모니에 오는 사람들은 에귀이 듀 미디(Aiguille du Midi 3.842) 전망대를 꼭 오르고자 하니, 그곳에 올랐다가 쁠랑 드 레귀이에서 내려 트레킹을 시작하기도 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우리는 이날 에귀이 듀 미디를 오르지 못했다. 걷는 동안에 날씨가 급변한 것이다. 이건 우리의 뜻이 아니었다. 쁠랑 드 레귀이 정류장에서 아예 산 정상에 케이블카가 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건 안전을 위해서인데 다른 말로는 저 높은 곳에 바람이 엄청 세계 불었다는 말이다. 에귀이 듀 미디 전망대는 평소에도 올라가서 맑은 날 보기가 쉽지 않다고 했었는데 그 흔한 경우에 우리가 걸린 것이다. 샤모니 패스로 오를 수 있음에도 날씨 때문인 걸 어떻게 할까? 비록 티켓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이곳을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융프라우요흐에서 융프라우를 오르는데 망설이지 않고 바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곳마저 오르지 못하면 앙꼬 빠진 찐빵이 될 것 같아서 그 생각으로 융프라우를 올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들머리는 그랑 조라스를 보면서 오르는데, 남들은 열심히 그곳에서 뛰고 있다. 산악 마라톤이다. 누군 개까지 같이 달린다. 난 걷고 있는데. 조금 이국적인 모습을 걷다 보면 드디어 샤모니가 내려다보인다. 당분간은 오르막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 걷는 일정 중에서 가장 무난하면서 아름다운 구간을 걷는 것이다. 저 멀리 한 걸음이면 단숨에 샤모니 시내로 뛰어들 것 같은 풍경. 오른편 길게 나란히 늘어선 산군에 브레방이나 락블랑이 놓여 있다. 그곳은 내일이나 모레 걷기로 예정되어 있다.
이 길이 다른 어떤 구간보다 걷기에 좋고 시각적으로도 좋은 건 역시나 샤모니 시내를 바라보면서 걷기 때문이다. 걷다 보면 자꾸만 이곳 주인공이 에귀이 듀 미디처럼 느껴지는 건 원래 뜻처럼 남쪽의 바늘 같은 봉우리에 뾰쪽하게 서있는 전망대 때문이다. 몽블랑은 그쪽 방향으로 보면 뒤쪽에 보여야 함에도 워낙 뒤에 물러서 있는 위치에다 구름에 자주 가려서 몽블랑을 볼 수가 없다. 더욱이 워낙 떨어져 있어 설령 몽블랑이 보여도 더 낮게 보이는 착시효과도 한몫을 한다. 그러니 제일 높으면서도 높아 보이지 않으니 몽블랑 정상을 본 것인지 안 본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렇게 걷다 보면.
쁠랑 드 레귀이 산장을 만난다. 그럼 얼추 중간 정도에 온 것이다. 이곳은 전경뿐만 아니라 위치도 아주 적합한 곳에 있다. 이곳에서는 쁠랑 드 레귀이로 걷거나, 샤모니 시내로 내려갈 수 있고, 에귀이 듀 미디 봉우리를 뚜렷이 볼 수 있어서도 좋다. 산장에서 목이 마른 사람은 물을 어떤 이는 맥주로 갈증을 달랠 때까지만 해도 정상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추호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시 쉬다 오늘 목적지까지 발걸음을 재촉할 때 구름이 정상 부근에 몰려드는 것 같기는 했었다. 구름이 껴서 정상에 올라가서 봐도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면 이건 낭패지만 그렇다고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지 않던가. 그러니 가볼 때까지 간 것이다.
설령 에귀이 듀 미디 정상에 오르지 못해도 어떻게 해서든 쁠랑 드 레기위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시내까지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부터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지 않고 내려갈 수 있어도 몸은 어느덧 지쳤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벌써 5시간 정도 걸은 것이다. 쉬거나 걷거나 평이한 코스긴 하지만. 그곳 케이블카 정류장 쁠랑 드 레위기에 도착하자 바람이 세차게 몰아닥쳤다. 그럼 정상은 더 심할 텐데. 이건 예상 밖의 일이다. 어쩌겠는가? 개미 한 마리 위로 올로 가지 못하도록 통제를 했으니. 그렇게 우린 리프트를 타고 아주 쉽게 걷지 않고 서서 시내로 돌아왔다.
역시나 도착하니 산 밑 날씨는 쨍쨍했다. 해발 1천 미터와 3~4천 미터 차이란 이런 것이다. 샤모니 시내 날씨를 기준으로 저 위 봉우리들 날씨를 예측할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투덜투덜 대며 걸어가니 발머와 소쉬르가 수고했다고 반겨준다. 애썼다고. 발머는 소쉬르의 후원으로 1786년 최초로 몽블랑(4,807m) 정상에 오른 사람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이 몽블랑이다. 샤모니가 등산가들에게 사랑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알피니즘이 이곳에서 발화되었기 때문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그냥 무난한 안전한 산행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가장 바라는 일. 오늘 멋진 경치 보면서 소박한 바람을 기원했건만 비와 바람이 날려버릴 줄은 이때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일 날씨가 좋기를 바랐지만 기대와 많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