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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Aug 31. 2024

미스티, 보쏭!

2.

오늘은 브레방(Brevent 2,525m) 오르는 날. 원래 계획은 샤모니 시내 쁠랑브라 리프트 정류장에서 쁠랑브라(2,000m)까지 유임 승차 후 산길을 따라 브레방 정상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고 내려오는 일정이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가 내려 계획이 변경됐다. 쁠랑브라에서 그냥 브레방까지 리프트 타고 오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결국 날씨였다. 리프트 타는 거야 좋지만, 그걸 타고 올라온 방향으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데, 이것이 별게 없다. 올라가는 거야 오르려고 온 것이니 괜찮지만, 정상에서 내려가라고 트레킹을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뭔 소리지??

 쁠랑브라 정거장과 경치

올라올 때 다 본 경치를 무슨 재미로 또 보고 내려갈까 했던 염려를 알아챘는지, 다른 방향으로 계획을 바꾼 것이다. 그건 벨라샤 산장(2,152) 쪽으로 내려가는 것.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샤모니 시내에서 벨라샤 산장을 거쳐 브레방으로 주야장천 걸어서 올라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을 또다시 말하면, 그렇게 할 경우 아마 버텨낼 일행들이 몇 명 없을 거란 얘기. 이건 직접 이 방면으로 내려가 보니, 걸어서 이쪽으로 브레방을 오르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해 보시게나. 샤모니가 해발 1,035m에 있으니 무려 1,500m를 오르라는 말. 휴, 다행이다. 내려가는 거라서.

브레방에서 하산 하는 길.

몇몇 사람들은 브레방 정상에서 다시 리프트 타고 샤모니로 내려갔다는데, 그래서 뭘? 우린 보쏭(Bossons) 빙하 보면서 내려갔는데. 보쏭 빙하라고? 지역 이름이 보쏭이다. 와우! 이럴 때 기꺼이 쓸 수 있는 말. 대박! 내려가는 내내 산 밑에서 올라오는 구름과 운무로 그냥 절경이 되었다. 경치가. 가만? 그럼 브레방은 어땠는데? 밑에서 쁠랑브라까지 올라오는 거야 편히 올라왔는데, 이쪽 날씨도 계속 좋지 않다고 하니 이곳에서 걸어서 내려가는 것도 웃기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상까지 걸어서 올라간 들 브레방 산봉우리야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내려오다 보니 길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지 못하는 마음이야 어쩌겠는가? 기도발이 약해 비가 멈추지 않았으니, 그래서 케이블카 타고 정상에 내려 어물쩍거리지 않고 바로 하산을 했던 것이다. 일차 목표는 벨라샤 산장 방향.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앞서간 프랑스 등산객 도움으로 겨우 방향을 찾아서 갔다. 온통 안개와 운무와 구름과 비와, 또 뭐더라. 아, 그래 그냥 미스티. 미스티다. 앞서 브레방 정상도 미스티. 뭐 본 게 있어야지. 암튼, 그렇게 방향을 겨우 잡고 내려가는데. 바닥은 눈에 비가 내려 미끄러웠다.

샤모니 시내가 빗물에 휩쓸리지는 않겠지? 이 꽃이 뭐더라? 자주 눈에 띄던데.

가다 쉬다 가다 걷다 도착해 본 산장은 출입 불가. 공사 중인 것 같았다. 뭐 산장에서 맥주 생각이 애초 없었으니 그냥 내려가는데, 초목 지대를 거치는 것 같았다. 중간에 이정표도 나오고, 여기저기 사방팔방으로 나있는 작은 등산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제대로 내려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가다 보니 비도 어느 정도 그친 것 같고, 군데군데 물안개인지 구름인지 밀려왔다 사라지는 사이로 에귀디미디와 몽블랑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사람을 감질나게 만드는데, 이것이 더 기가 막히다. 볼만해서 사진 한 장 찍으려는 사이 구름인지 안개인지 시야를 가리고. 무슨 숨바꼭질하는 것도 아니고.

샤모니 시내, 에귀디미디 정상, 보쏭 빙하, 이꽃도 이름을 모르겠네.

우리가 걷던 산등성이 반대편 산등성이 에귀뒤미디 방향이 온통 물난리다. 산에서 물이 합쳐서 밑으로 내리는데 장관이다. 사람 장관 말고 경치 장관. 그중에서 단연 뽀송뽀송 자태를 뽐내는 보쏭 빙하. 아마 비가 오니 눈이 밀려 빙하가 더 아래로 처진 것 같은 모양. 그런데 이것이 좋다. 빙하야 눈 쌓인 것이 오래되면 빙하라 부르지 않던가. 눈앞 가까이에 이렇게 빙하가 나 좀 보라고 하다니!

사람들이 하늘에 붕 떠있는 듯한 사진.

제법 관목 지대를 지나 내려가니 울타리 안에 개들 세 마리가 달려든다. 에구 무섭다. 울타리가 있어서 다행인데, 이놈들이 뭔 일하나 봤더니 양을 지키는 것 같다. 종류가 뭐더라? 덩치가 산만해가지고. 이종이 세인트버나드 같다. 그렇고 보니 비가 그쳤다. 위라서 날씨가 더 짓궂었나 보다. 내려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이 싹 가신다. 여기서부터는 노 미스티. 여기서 선택지가 하나 더 있다. 시내에 남을 사람 남으라고. 당연히 남아야지. 그렇게 일행과 헤어진 곳이 하필이면 성 버나드(세인트 베르나르) 성당 앞이다. 가만있어라. 앞에 개가 세인트 버나드 아니었나? 이런 우연이. 개 이름을 성인이름 따서 지었다나 뭐라나. 그런데, 살면서 죄를 얼마나 많이 졌으면 내린 곳이 성당 앞이라니. 어쩌겠는가. 들어가서 참회해야지.

세인트 베르나르 몽블랑 성당. 보쏭 빙하와 양떼.


샤모니 몽블랑 역

정화된 영혼을 이끌고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역에 도착했다. 그 옛날 뚜르 드 몽블랑(TMB)하겠다고 열심히 준비할 때 제네바에서 여름에 한 해 운행한다던 그 열차. 그 열차가 도착하고 떠나는 기차역이라니. 샤모니 몽블랑 역. 하하! 세상은 말이다. 어떻게든 돌고 돌아 제대로 돌아오는 것이 세상인 것 같으니, 포기하지 말게나. 꿈과 희망을. 누구한테 하는 소린지? 마치, 그래서 이곳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곳 샤모니 몽블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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