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작가 Jul 16. 2024

내 나이 만 31세, 초등학생에게 삥을 뜯겼다

어른은 아이의 본질, 그 선한 의도만을 꿰어 봐줄 수 있다

0. 내 나이 만 31세. 초등학생에게 삥을 뜯겼다. ”그거.. 제가 줘봐도 돼요?“ 자기 몸보다 더 큰 책가방을 맨 아이가 내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우리 아파트에서 치즈 냥이로 불리는 길고양이에게 간식을 주고 있었다. ”네가 한번 줘볼래?“ 간식 한 조각을 떼어주는 내 손가락은 경쾌했다. 그는 이내 또 물었다. ”제가 줘봐도 돼요?“ 나는 다른 조각을 내주었다.



1. 그의 요구는 계속됐다. 나한테 간식을 맡기고 간 사람마냥 자연스러운 요구였다. 내가 가진 간식 10조각 중에 8조각을 내주었다. 나는 빈털터리가 됐다. 그는 내게 더 이상의 간식이 없음을 확인하고, 홀연히 자리를 떴다.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인사도 없었다.



2. 헛웃음이 나왔다. ‘나 설마... 방금... 삥 뜯긴 건가?’ 살짝 억울했다. 편의점까지의 왕복 여정은 비효율적이였다. 좁은 편의점 한편에 쪼그려앉아 몇몇 간식들을 신중히 타진했다. 흐르는 츄르보다 떼어줄 수 있는 스틱이 깔끔할 것이다. 간식 하나만 띡 결제하는 게 미안해서, 쓸데없이 라면이랑 떡볶이도 집어 들었다. 떡볶이는 그제도 먹었는데 괜히 산 것이다. 라면은 더 심각한 문제다. 대체 왜 사고야 말았고, 대체 왜 끓이고야 말았나.




3. 후회가 무색했다. 아이는 제 갈 길을 간 것이다. 세차게 가버린 아이는 깨끗하고, 예뻤다.


4. 어른이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굉장하다. 우리는 아이의 행동만으로 그를 판단하지 않는다. 행동 자체는 남의 물건을 자기 물건인마냥 써버린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드러나진 것, 아이의 방식으로 표현된 것, 내가 두 눈 뜨고 봤다 믿은 것, 즉 <표상>된 것이다.


5. 표상 너머의 것도 있다. 그것은 눈을 가지고도 볼 수 없고, 손을 가지고도 만질 수 없다. 칸트는 이를 <본질>이라 불렀다. 고양이가 길바닥에서 잘 먹고 다닐까 걱정하면서도, 이 걱정이 모여 너무 많은 사람들이 대중없이 밥을 주는 건 아닐까. 걱정에 걱정을 얹어보는 마음.


6. 어른은 아이의 본질, 그 선한 의도만을 꿰어 봐줄 수 있다.


7. 어른이 어른을 바라볼 때는 표상과 본질의 구분에 왕왕 인색해진다. 내가 맞네, 네가 틀리네, 서로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하는 소란 속에서 길을 잃는다. 서로 같은 본질을 보고 있으면서도, 다른 표상에 대해서만 떠든다.

8. 저장하고 싶었다. 내가 아이의 당찬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선. 이 시선을 다른 어른에게, 그리고 내 자신에게 내어줄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의 만물을 눈 감고도 보는 후두엽 뒤편의 감각으로.


어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