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농장 체류기 6
추석과 땡스기빙이 가을에 있어서 먹을 건 대부분 가을에 수확하는 줄 알았는데
이 농장은 주요 작물 두 개를 모두 여름에 수확했다.
아기자기한 소규모 가족 농장은 귀여운 텃밭 뒤에 넓은 마늘밭
마늘밭 뒤에 그보다 더 큰 감자밭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좀 더 일찍 아님 더 늦게 왔더라면 고된 수확 일정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운도 없게 나는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마늘을 뽑았고
농장을 떠날시간이 다가오자
감자가 왔다.
잡초 뽑기 같은 잔일을 하며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아침
주인장은 며칠 후에 비가 올 거라고 그전에 감자를 모두 캐야 한다고 했다.
비가 오면 감자가 썩어버리기 때문에 앞으로 감자를 다 캘 때까지 추가 노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여기에 감자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날부터 우리는 쉬는 날도 반납하고 감자만 캤다.
작업방식은 마늘과 비슷했다.
트랙터가 밭을 한번 훑고 가면 흙이 고슬고슬해지고
줄기를 뽑아 줄줄이 달린 감자를 따서 박스에 넣는다.
우리는 박스 두 개를 갖고 다니며 한곳에는 괜찮은 크기의 감자를 넣었고
작아서 상품성이 없는 것들을 따로 모았다.
작은 건 어디에 쓴다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여러 품종을 다 섞어놨는데 그걸 다시 일일이 분류해서 씨감자로 쓰려나..?
그런데 감자 자체가 작아서 비품 상품을 나누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주인장은 종종 일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분류 상태를 점검했다.
내 박스를 보고선 이런 건 작으니까 상품 박스에 담지 말라고 해서
그렇구나 하고 다음엔 좀 작다 싶으면 다 비품 박스에 넣었는데
잠시 후에 와서는 이런건 상품에 넣으라고 했다.
그럼 나는 넹 하고 그냥 내 멋대로 분류했다.
한국과 영국의 노랗고 통통한 감자만 봐왔던 내게 이 밭의 감자는 신세계였다.
감자 종류가 열몇 개는 되었는데
마야 어쩌고 감자 아즈텍 어쩌고 감자도 있었고
빨간 것도 까만 것도 동그란 것도 길쭉한 것도 있었다.
근데 그 모든 품종의 감자가 아무리 커도 애기 주먹보다 작아서
탐스러운 수확의 결실 같은 느낌은 없었고
동그란 감자를 캘 땐 흙 속에서 구슬 찾는 느낌
길쭉한 모양 감자를 캘 땐 흙에 파묻힌 손가락을 구조하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감자가 아무리 예뻐도 일은 힘들었다.
마늘밭에 썩은 마늘은 없었는데
감자밭에는 할 일을 다 한 씨감자가 다 썩어서 흙 속에 숨어있었다.
뉴감자를 캔다고 올드감자를 만지면 한때는 감자였던 슬라임을 터트리게 된다.
그 냄새와 촉감은 잘 발효된 음식물 쓰레기와 같은데
나는 맨손으로 일했다.
주인장은 그 손으로 새 감자를 만지면 같이 썩어버린다고
썩은 손은 흙으로 잘 닦으라고 했다.
손 주름 사이사이 손톱 밑 사이사이에 흙이 끼는 것은
나중에 구두솔로 벅벅 닦으면 다 씻겨져 나가지만
쭈그려 앉아 일해서 아픈 무릎은 수십 년 뒤에 인공관절로만 나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감자 수확 이틀 차에 나는 트레일러에 있던 전 노동자의 티셔츠를 가져가
흙 위에 깔고 앉아서 다리를 쭉 펴고 일했다.
동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지만 20년 뒤 누구의 무릎이 웃고 있나 한번 보자
감자 수확 끝 무렵엔
자리를 옮길 때마다 감자 박스를 끌고 다니는 것에도 지쳐서
엉덩이만 옮기고 박스는 그대로 둔 채 감자를 상자에 던져넣기 시작했는데
그걸 본 주인장은 그러면 부딪혀서 껍질이 까지고 서로 멍든다고 박스에 살살 넣으라고 했다.
그럼 엉덩이가 무거운 나는 넹 하고 근처에 주인장이 없으면 또 던졌다.
몇 미터 뒤에서 던진 건 아니고 박스에 손이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서 던졌다.
그걸로도 감자 다칠까 마음이 아프면 박스에 솜이불 깔아줘야 한다.
땅속 감자를 다 캐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감자 박스마다 품종 이름을 써서 달고 트럭에 실어야 했는데
역시나 비실한 나는 박스를 들어 올릴 힘이 없어 감자 이름 쓰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밭에 남은 감자가 자라면 나중에 심을 품종이랑 뒤섞인다 뭐 그 비슷한 이유로
우리는 밭을 돌아다니면서 흘린 감자를 주웠다.
그 자투리 감자까지 쓸어 모아 트럭에 올리고
우리는 감자와 함께 트랙터를 타고 집으로 갔다.
마지막으로 박스를 품종별로 모아 창고에 넣었고
그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감자에서 손을 털 수 있었다.
하지만 먹는 일이 남아있지
서양인들이 기겁하는 마늘과 달리 감자는 그들의 주식이어서
고된 노동을 마치고 그 수확물을 먹는 기쁨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저녁으로 자투리 감자를 삶아 버터에 버무리고 소금 후추를 뿌려 먹었다.
버터를 묻히면 뭐든 맛있긴 하지만 이런 감자를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야속할 만큼 맛있었다.
감자에서 옥수수같이 달고 진한 맛이 났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희석돼서 슴슴한 감자도 맛있다고 먹었는데
마야인들이 먹었다는 원조 감자는 얼마나 더 맛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이런 게 왜 전 세계에 보급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는데
크고 무식한 감자에 비해 일만 많고 먹을 수 있는 양은 적어서 그런 것 같다.
3일을 꼬박 감자에 바치고 기억력이 조금 감퇴했는지
수확 후에 비가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진을 봐도 비가 온 것 같지 않은데
일기예보가 틀렸거나 마음 급한 주인장이 우리를 속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감자를 일찍 캔 덕분에
나는 주말을 쉬고 그 뒤로 하루 이틀 잡일을 하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또 다시 미친 일정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비교적 느긋했던 잡일을 하며
농사가 할만하다는 오만에 빠졌던 나에게
혹독한 농사의 현실을 알려준 감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오늘도 나는 밋밋한 삶은 감자를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