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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티 Oct 10. 2021

걸어서 문명 속으로

네덜란드 농장 체류기 7

2주간의 일꾼생활이 끝나가고 다시 여행을 할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농장에서 지내는 건 즐거웠지만 

유럽에서 사는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닌지 

여기 있을 시간에 어디라도 더 돌아다녀야 했던 건 아닌지 

그런 한국인다운 생각이 은연중에 들어서 

나는 아주 빡빡한 여행을 계획했다. 


그래서 농장을 떠나자마자

거의 하루에 한 도시씩 스쳐 지나가는 속성 유럽 여행을 하게 됐다.

이동시간을 줄이려고 새벽에 버스를 타고 있으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는데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시기가 오니 

그때 나의 그 무식한 엉덩이를 뚜들겨 주고 싶을 만큼 잘한 일 같다.


화분을 좋아하는 친구



나는 낮 동안 달궈진 트레일러가 식을 때까지 공용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알차고 독한 여행 일정을 짰다. 

농장에서 짱박혀 있다 보니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를 까먹어서

오만 데를 다 가려는 욕심을 부린 것 같다. 

그것이 노동보다 더 큰 피로를 안겨줄 것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여행 계획을 짜는 건 약간의 재미와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데

그때는 심지어 여름 성수기라 모든 게 동나기 전에 빨리 예약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지갑 얇은 여행자들은 부지런하기 때문에 

나 역시 저렴한 호스텔, 싼 버스 표를 사수하기 위해서 결제를 서둘렀다. 

그래서 중심지에서 먼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 관광지로 걸어가고 

저녁에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피곤하지만 꽤 저렴한 여행 일정이 완성됐다.


딸기밭의 노숙자




농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농장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아침에 일하고 밤에 일정 짜는 일이 반복됐다. 

갈수록 급한 마음과 졸린 눈으로 수많은 사이트를 뒤져보는 데 지쳐서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떠날 날이 다가오면서는 감자 수확이 끝나 쉬엄쉬엄 잡일만 했는데

그 시간이 생각만 해도 고된 여행을 앞두고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떠나기 직전까지 다시 여행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흙먼지 범벅이 된 옷을 빨아 이미 꽉 찬 캐리어에 욱여넣을 때도

더 이상 예약해야 할 숙소와 버스 표가 없어 저녁에 영화를 보고 있을 때도 몰랐다.

다시 20킬로에 달하는 무거운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트레일러를 나설 때야

내가 세운 무시무시한 계획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까지 거위 가족 염탐


농장을 떠나는 날 아침 

나는 2주 전과 정확히 같은 차림으로 공용 거실에 가서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농장에서 버스정류장에서까지 30분을 걸어야 해서 일찍 나서려는데 

주인장이 조금만 기다리면 버스정류장까지 태워주겠다고 해서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뻘쭘하게 주인장을 기다렸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땀을 질질 흘리며 걸어왔던 길을 

차를 타고 순식간에 지나가고 

주인장은 나를 버스정류장에 내려줬다.  

그가 잘 가라며 앉아줬을 때 나는 일하면서 수없이 맡아온 그의 암내의 독함을 알아 숨을 잠깐 멈췄다. 

주인장이 떠나고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버스를 기다렸다. 




마을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고 시골길을 달려 근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플릭스 버스를 타고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와야 할 버스가 오지 않았다. 

버스 회사에 연락했더니 다음 버스를 타라고 했다.

버스터미널이라고 했지만 작은 매표소랑 화장실 하나가 있는 큰 공터에 불과했는데

아무도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아무도 버스를 타지 않는 그곳에서 혼자 버스를 기다렸다. 


기다리지 않고 다른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이미 사버린 티켓이 아까워서 그걸 그대로 쓸 수 있는 다음 플릭스 버스를 기다렸다.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나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이런 게 여행이지 싶은 마음과 그래도 짜증 난 마음이 뒤섞인 채로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2주 전에 농장에 가기 전에 잠깐 들렀을 때 제대로 둘러보지 못해서 다시 머물기로 했다.   

골목골목 돌아다니면서 기념품도 구경하고 미술관에 가서 예쁜 그림도 보면서

노동이 아닌 관광의 맛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현대 문명의 맛




그렇게 재밌고 힘들었던 농장 생활이 끝났다.

지금도 가끔씩 일년 정도 이렇게 세계를 떠돌면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때 검색하면서 찾아본 여러 유기농 농장들과 동물 생추어리들은 또 얼마나 힘들고 재밌을까

전업 농부의 부담은 없이 

남이 키운 예쁜 작물을 구경하면서 게으른 일꾼으로 일하는 경험은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 지쳤던 내게 좋은 요양 체험이 되었다.  


비싼 돈 들여서 유럽 보내줬더니 

생판 모르는 남의 농장에 가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엄마는 어이없어했지만

자연을 좋아한다면

벌레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당한 더러움은 감수할 수 있으며

긴 여행을 하기엔 자본이 부족한 

신체 건강한 사람들에겐

꽤나 좋은 여행 방법 중 하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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