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티 Oct 17. 2021

나의 글로벌 농장메이트

네덜란드 농장 체류기 번외 편

네덜란드 농장에 오기 전 

영국에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주방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플랫메이트 세명이 있었지만 다들 알아서 잘 지내는 듯했고 

우리는 어쩐지 생활패턴도 겹치지 않아 밥을 같이 먹을 일도 화장실이 미어터지는 일도 거의 없었다. 

세계 각지 젊은이들과의 떠들썩한 글로벌 파티 라이프 대신

혼자 수업 듣고 혼자 밥 먹고 혼자 놀는 고독한 외국 살이를 했는데

오랜만에 농장에서 단체생활을 하게 되었다.  


단체 생활이라고는 했지만 같이 일하고 밥만 먹을 뿐 땀방울을 나누며 친해진 우정 같은 건 없었다. 

우리는 일할 때도 각자 이어폰을 끼고 일했고 쉴 때도 각자 알아서 쉬었다.

2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공간에서 먹고 일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도 거의 없고 같이 나눈 대화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묘한 관계의 농장메이트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농장엔 이미 3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내가 온 다음날 떠났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삼시세끼 빵에 누텔라만 발라먹는 특이한 식성의 사람이었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누텔라맨이 가버리고 농장엔 D, A 그리고 내가 남았고 

나중에 J라는 청년이 들어와 넷이 함께 일을 했다. 


출근길


어째 다들 과묵하고 수줍은 사람들만 모이게 된 건지 서로 굿모닝 굿나잇만 하다가 

가끔씩 제일 나이가 많은 D가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면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그는 미국에서 온 요리사였는데 여기에 한 달쯤 머물 계획이라고 했다. 

D도 나처럼 여행 경비도 아낄 겸 농장에 들어왔고 이후에는 포르투갈 여행을 한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요리사답게 주말에 같이 먹을 저녁을 요리하기도 했고

내가 빵에 발사믹 식초를 찍어먹는 걸 보고 그게 뭐냐며 와서 먹어보기도 했다.

아메리칸 다운 여유를 뽐내며 D는 우리에게 항상 먼저 말을 건네고 농담을 하며 

수줍은 학생들 사이를 메꿔주는 담임선생님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A는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었다. 

그는 농업을 배우는 학교에 다니는데 이 농장에 인턴십 비슷한 걸 하러 왔다고 했다.

내 주위에 그런 친구들이 없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어린 학생이 농사일을 배우겠다니 참 기특하구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보다는 어렸지만 A는 건장한 프랑스 청년답게 손이 커서인지 섬세한 작업을 하다가 종종 실수를 하곤 했다. 콩 줄기를 지지대에 감아주다 줄기를 끊어버리고 잡초와 함께 작물 잎도 뽑아버렸는데 

그때마다 나는 옆에서 주인장이 보기 전에 빨리 땅에 묻어버리라고 조언했다. 

이렇게 서로의 실수를 눈감아주는 것 외에도 우리는 손에 가시가 박힌다든지 모기에 뜯긴다든지 하면 

같이 잡초 욕을 하고 모기 욕을 하면서 모종의 동료애를 쌓아나갔다.

 

내가 농장에 온 지 일주일쯤 됐을 때 또 다른 새싹 농부 J가 왔다. 

그는 A처럼 농사일을 배우러 온 네덜란드 학생이었고 

주인장은 예비 농업인 둘을 모아 방과 후 교실을 진행했다.   

감자 수확을 위해 트랙터를 꺼내온 주인장은 두 학생에게 트랙터를 모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수확 끝무렵에 둘은 번갈아가면서 감자밭을 갈았다. 

쭈그려 감자를 캐다가 트랙터를 몰게 된 A는 아주 신나 보였다.

곧 내려서 다시 손으로 흙밭을 헤집어야 했지만 

A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트랙터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반면 J는 엄청난 포커페이스에 과묵한 사람으로 항상 묵묵히 일만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가 농장을 떠나기 며칠 전 그와 나눈 짧은 대화가 우리 둘 사이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다.

그는 내가 살던 트레일러로 숙소를 옮길까 하는데 그 찜통은 어떠냐고 물었고

나는 아주 좁고 거미가 많고 깨끗하지 않다고 했더니 그는 알겠다고 하고 우리는 각자의 찜통으로 돌아갔다.  


솔직히 나도 배워보고 싶었다


여기에 한국에서 온 나까지 해서 우리 네 명이 농장의 주된 일꾼들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트레일러가 달궈지기 전에 일어나 부엌에서 대충 아침을 먹고 

현관에서 장화를 주워신고 집 앞에 모였다.  

그러면 주인장이 나타나 너는 이거 해라 너는 저거 해라 하면서 일을 맡겨주었고 

우리는 넹 하고 각자 일을 했다. 

나를 제외한 서양인 셋은 몸 쓰는 일을 하는 요리사에 예비 농업인까지 다들 건장하고 체격도 좋아서 

비실한 인문계 학생인 나 대신 궂은일을 맡아야 했다. 

실제로 감자 박스를 트럭 위로 올리려던 내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고 그들은 즐겁게 웃었는데 

그렇게 나의 나약함을 눈앞에서 봤으니 내가 쉬운 일을 하는 이유를 그들도 납득했길 바랄 뿐이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비교적 순탄한 강도의 노동을 할 수 있었으니 

내가 농장 생활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들이다. 

만약 나 같은 일꾼만 네 명이었다면 열여섯 개의 팔다리가 덜덜거리는 모습에 

주인장이 꽤나 난감해했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SNS 아이디를 공유할 법도 하지만 

우리처럼 말도 잘 안 하는 사이에서 그런 걸 물어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장을 떠난 이후로 그들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언젠가 다른 농장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때도 우리는 어색하게 헬로 헬로만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과의 일화를 소재로 글을 썼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이전 08화 걸어서 문명 속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