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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티 Oct 23. 2021

내가 네덜란드 농장에 다녀왔다니

네덜란드 농장 체류기 에필로그

2주간의 보람찬 농장 생활이 끝나고 

나는 유럽 도시 몇 개를 속성으로 둘러보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염병이 발발했다.

내가 유럽에서 먹고 자고 일했었다는 게 현실이었는지 전생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 모든 일이 한 여름밤의 꿈이 되어 버린 듯했다.   


망가지기 일보 직전인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몇 개를 돌려보며 

한 세월 전 기억을 꺼내서 보니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는 힘들어 죽겠던 순간들 몇 개와 

거의 희미해져 가는 즐거웠던 기억 몇 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괜히 사람들이 브이로그를 찍고 블로그에 기록하는 게 아님을...

그렇지만 이런 자투리 기억만으로도 그때의 희로애락이 다시 생각났고

내가 네덜란드 시골 농장에 다녀왔다는 게 사실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내가 돈 내고 내가 내 발로 걸어 들어간 농장


길지도 짧지도 않은 14일간의 농장일은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은 경험도 아니었고 큰 깨달음을 얻을 일도 아니었다.

누구에게 자랑할만한 경험도 아닌 게 누군가 내게 가서 뭐했냐, 왜 갔냐고 물으면 

그냥 가서 일했다는 말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내 돈을 내고 농장에 걸어 들어가서 내 의지로 노동을 하다 빈손으로 나온 농장 생활은

시간이 돈이고 경험이 투자인 현대 사회에 다소 적절하지 않은 경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현대 사회의 짜릿함은 쓸모없는 것에 시간을 보내는데서 오지 않던가.

그래서 그런지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내게 남은 것이 거의 없는 아무 쓰잘 떼기 없는 일이었지만 

생산성에 얽매이지 않은 일에서 오는 만족감 덕분에 그렇게 즐거웠던 것 같다.


단순히 유럽에서 관광할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런 농장 생활을 하다니 

그때는 살면서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갔다 와 보니 자연 속에서 동물들과 함께 쉬고 일하면서 체력도 기르는 

꽤 괜찮은 선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때 얻은 약간의 체력과 근육은 집에서 전염병을 피하는 동안 원상 복귀되었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아주 약간의 쓸모가 있는 교훈이 있긴 하다. 


나는 그 전보다 음식 남기는 것을 더 죄악시하게 되었다.

나는 집에서 음식물쓰레기 처리를 담당하는데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게 귀찮아서 위장이 허용하는 데까지 남은 음식을 긁어먹곤 했다.

농장에서 비로소 엄마가 습관처럼 얘기하던 밥 남기면 농부가 화낸다라는 말의 농부가 직접 되어보니 

멀쩡한데 버려지는 음식을 보면 정말 너무 아깝다. 

그래서 썩은 게 아니라면 그냥 먹어치우자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음식물처리기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주말농장도 안 가꿔본 콘크리트 태생의 도시인이었는데

농장에서 하루 종일 흙밭을 헤집고 다니니 농사 지식도 얻을 수 있었다. 

아직도 아무 풀이나 눈앞에 갖다 대도 그 이름을 댈 수 있는 엄마에 비하면 택도 없지만 

이제는 적어도 감자와 당근과 콩 잎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적극적으로 텃밭 농사에도 도전하게 되었다. 


텃밭 a.k.a 무법지대

사람들이 집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냈던 전염병 창궐기에

나 역시 일종의 유럽병으로 상추와 깻잎이 주로 서식하는 텃밭에 

케일과 루꼴라 같은 이국적인 이파리와

바질과 딜같은 허브를 심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웠고

다사다난했던 새싹 시기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눈물적신 케일과 바질 한 장을 뜯어먹으며 

농사는 역시 쉽지 않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되새겼다.




그러나 또다시 걸어서 세계속으로와 세계테마기행을 보면서 

꿈만 같았던 유럽에서의 시간이 떠올라 여행병이 도질 때면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속세의 복잡함에 두통에 시달리는 대신

아무 생각없이 잡초를 뽑고

어두운 미래에 우울해하는 대신

이번 주의 날씨만 걱정하는 삶


아름다운 오색찬란한 작물들을 키우며 

집 앞엔 닭과 거위와 고양이가 뛰놀고 

이를 미끼로 나처럼 지갑이 가벼운 여행자들을 불러 모아 

같이 일하고 대충 먹이고 재우는 삶 


다음 생엔 나도 네덜란드 농부로 태어나고 싶다. 


- 네덜란드 농장 체류기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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