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농장 체류기 번외 편
네덜란드 농장에 오기 전
영국에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주방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플랫메이트 세명이 있었지만 다들 알아서 잘 지내는 듯했고
우리는 어쩐지 생활패턴도 겹치지 않아 밥을 같이 먹을 일도 화장실이 미어터지는 일도 거의 없었다.
세계 각지 젊은이들과의 떠들썩한 글로벌 파티 라이프 대신
혼자 수업 듣고 혼자 밥 먹고 혼자 놀는 고독한 외국 살이를 했는데
오랜만에 농장에서 단체생활을 하게 되었다.
단체 생활이라고는 했지만 같이 일하고 밥만 먹을 뿐 땀방울을 나누며 친해진 우정 같은 건 없었다.
우리는 일할 때도 각자 이어폰을 끼고 일했고 쉴 때도 각자 알아서 쉬었다.
2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공간에서 먹고 일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도 거의 없고 같이 나눈 대화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묘한 관계의 농장메이트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농장엔 이미 3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내가 온 다음날 떠났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삼시세끼 빵에 누텔라만 발라먹는 특이한 식성의 사람이었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누텔라맨이 가버리고 농장엔 D, A 그리고 내가 남았고
나중에 J라는 청년이 들어와 넷이 함께 일을 했다.
어째 다들 과묵하고 수줍은 사람들만 모이게 된 건지 서로 굿모닝 굿나잇만 하다가
가끔씩 제일 나이가 많은 D가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면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그는 미국에서 온 요리사였는데 여기에 한 달쯤 머물 계획이라고 했다.
D도 나처럼 여행 경비도 아낄 겸 농장에 들어왔고 이후에는 포르투갈 여행을 한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요리사답게 주말에 같이 먹을 저녁을 요리하기도 했고
내가 빵에 발사믹 식초를 찍어먹는 걸 보고 그게 뭐냐며 와서 먹어보기도 했다.
아메리칸 다운 여유를 뽐내며 D는 우리에게 항상 먼저 말을 건네고 농담을 하며
수줍은 학생들 사이를 메꿔주는 담임선생님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A는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었다.
그는 농업을 배우는 학교에 다니는데 이 농장에 인턴십 비슷한 걸 하러 왔다고 했다.
내 주위에 그런 친구들이 없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어린 학생이 농사일을 배우겠다니 참 기특하구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보다는 어렸지만 A는 건장한 프랑스 청년답게 손이 커서인지 섬세한 작업을 하다가 종종 실수를 하곤 했다. 콩 줄기를 지지대에 감아주다 줄기를 끊어버리고 잡초와 함께 작물 잎도 뽑아버렸는데
그때마다 나는 옆에서 주인장이 보기 전에 빨리 땅에 묻어버리라고 조언했다.
이렇게 서로의 실수를 눈감아주는 것 외에도 우리는 손에 가시가 박힌다든지 모기에 뜯긴다든지 하면
같이 잡초 욕을 하고 모기 욕을 하면서 모종의 동료애를 쌓아나갔다.
내가 농장에 온 지 일주일쯤 됐을 때 또 다른 새싹 농부 J가 왔다.
그는 A처럼 농사일을 배우러 온 네덜란드 학생이었고
주인장은 예비 농업인 둘을 모아 방과 후 교실을 진행했다.
감자 수확을 위해 트랙터를 꺼내온 주인장은 두 학생에게 트랙터를 모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수확 끝무렵에 둘은 번갈아가면서 감자밭을 갈았다.
쭈그려 감자를 캐다가 트랙터를 몰게 된 A는 아주 신나 보였다.
곧 내려서 다시 손으로 흙밭을 헤집어야 했지만
A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트랙터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반면 J는 엄청난 포커페이스에 과묵한 사람으로 항상 묵묵히 일만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가 농장을 떠나기 며칠 전 그와 나눈 짧은 대화가 우리 둘 사이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다.
그는 내가 살던 트레일러로 숙소를 옮길까 하는데 그 찜통은 어떠냐고 물었고
나는 아주 좁고 거미가 많고 깨끗하지 않다고 했더니 그는 알겠다고 하고 우리는 각자의 찜통으로 돌아갔다.
여기에 한국에서 온 나까지 해서 우리 네 명이 농장의 주된 일꾼들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트레일러가 달궈지기 전에 일어나 부엌에서 대충 아침을 먹고
현관에서 장화를 주워신고 집 앞에 모였다.
그러면 주인장이 나타나 너는 이거 해라 너는 저거 해라 하면서 일을 맡겨주었고
우리는 넹 하고 각자 일을 했다.
나를 제외한 서양인 셋은 몸 쓰는 일을 하는 요리사에 예비 농업인까지 다들 건장하고 체격도 좋아서
비실한 인문계 학생인 나 대신 궂은일을 맡아야 했다.
실제로 감자 박스를 트럭 위로 올리려던 내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고 그들은 즐겁게 웃었는데
그렇게 나의 나약함을 눈앞에서 봤으니 내가 쉬운 일을 하는 이유를 그들도 납득했길 바랄 뿐이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비교적 순탄한 강도의 노동을 할 수 있었으니
내가 농장 생활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들이다.
만약 나 같은 일꾼만 네 명이었다면 열여섯 개의 팔다리가 덜덜거리는 모습에
주인장이 꽤나 난감해했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SNS 아이디를 공유할 법도 하지만
우리처럼 말도 잘 안 하는 사이에서 그런 걸 물어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장을 떠난 이후로 그들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언젠가 다른 농장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때도 우리는 어색하게 헬로 헬로만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과의 일화를 소재로 글을 썼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