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 때문에 시작된 시골 살이
"ㅇㅇ군으로 이사 가자." 어느 날 배우자가 말했다. 첫째 아이가 이제 막 걷고, 둘째는 가끔 태동으로만 존재감을 간간히 드러내던 시기였다. 꽤 파격적인 선언인데 크게 놀랍진 않았다. 며칠 전부터 남편이 '우리가 살던 지자체가 육아 수당을 없앴다'며 투덜거렸기 때문이다. 물론 중앙 정부에서 육아 수당을 늘렸기에 전반적으로 우리 가정이 받는 금액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배우자는 슬그머니 사라진 수당이 기분 나쁜 모양이었다. 인구 소멸의 시댄데 아이 있는 가정에 더 많은 지원금을 주는 지역이 있을 거라며 한동안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살던 도시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어느 지역을 발견했다. 본인의 고향이었다.
그가 떠나온 지역은 인구 감소로 곧 사라질 거라고 꼽히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가장 적극적이기도 했다. ㅇㅇ군이 당시 인구 관련 정책으로 홍보한 내용은 이렇다. '군민에게 산후조리 비용도 전액 지원하고 아이가 만 7세가 될 때까지 60만 원을 지역 화폐로 드리겠습니다.' 두 아이와 함께 이주하면 우리 가족은 산후조리 비용 400~500만 원가량을 아끼고, 매달 120만 원을 받을 거였다. 해서 우리는, 군민이 되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돈이 얼마나 된다고 수당 때문에 생활 터전까지 옮길 결심을 했을까. 하지만 정말 우리는 그 이유 때문에 움직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자며 우리 부부 둘 다 육아휴직을 낸 상태였다. 휴직 중 받을 수 있는 수당은 연봉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00만 원 중 후반 대다. 그래도 딱히 큰 지출이 없어서 둘에게 나오는 육아 수당으로도 가계를 잘 꾸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지자체의 지원이 더해지면 적어도 돈 때문에 힘들어서 휴직을 일찍 끝내고 복직하는 상황은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또 ㅇㅇ군에는 시부모님이 살고 계시기 때문에 육아나 생활에 있어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아이들이 오가는 차 걱정 없이 다니면 얼마나 좋겠어? 산이랑 바다도 가깝고. 만약 당신이 도시로 놀러 가고 싶어지면 내가 우리 부모님과 아이들을 볼 수도 있어."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지만 내가 놀러 가고 싶을 때 언제든 자유를 주겠다는 말도 달콤하게 들렸다. 사실 나에게는 이사를 거부할 개인적인 명분도 없었다. 이미 어린아이들을 돌보면서 내 생활 공간은 집과 마트, 놀이터 정도로 매우 단순하게 구성돼 있었다. 문화생활을 자주 하지도 않았고, 당장 직장에 출퇴근을 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딱히 사람들을 못 만나는 게 외롭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별 상관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집을 구하러 6개월가량을 왕복 3시간씩 고속도로에 올랐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지역은 아니었기에 매물 자체가 별로 없었는데 그렇게 가끔 나오는 집도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신축 아파트는 소유자의 빚이 너무 많아서 탈락. 어느 마당 넓은 주택에선 고기도 구워 먹고 정원도 가꾸는 낭만을 실현할 수 있었겠으나 쓰레기 처리가 곤란했다. 창문 밖으로 뱀이 지나다니는 집도 있었다. 어떤 집은 모기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세 들러 가는 기분이기도 했다.
조금 지쳐갈 때쯤 어떤 할머니 혼자 사시던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칠 곳이 아주 많은, 오래된 아파트였다. 하지만 아파트라 관리가 잘 되고 있었고, 1층이어서 아이들이 뛰어다녀도 좋았다. 공간이 넓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집이 매매로 나오는 바람에 우리는 첫 주택 구매의 혜택을 시골 아파트를 사는 데 썼다. 집 구하러 다닌 이야기를 부모님과 나누다가 이 지점에 이르러서 다들 한숨을 내쉬셨다. 하하. 아무튼 우리는 ㅇㅇ군의 정책이 의도한 대로 이사를 했고, 이런 사례가 흔치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국의 저출산 정책에 대해 기사를 준비하던 미국 뉴요커지 기자의 눈에 띄어 인터뷰도 했다. 그 후기는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고.
다소 단순하게 이사를 결심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살면서 '시골에 사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우선은 감사한 기회라는 것. 우리가 육아 휴직을 낼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아이들이 건강한 편이라 감사하다. ㅇㅇ군은 직업군이 다양하지 않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농업인이다. 그래서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수익을 얻는 활동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육아 휴직을 낼 수 없었다면 이 지역까지 와서 거주할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또 소아 청소년과 병원이 없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프면 여기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를 이동해야 소아과 전문의를 만날 수 있다. 만약 아이들이 어딘가 아파서 주기적으로 정밀 검진을 받아야 했다면 너무나 힘들었을 것이다. 건강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연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인생 전체를 놓고 봐도 정말 소중한 경험이다. 이 모든 건 감사한 우연이 겹쳐져 만들어졌다.
시골에서는 불필요한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의 경우는 영어 유치원도 없고, 학원도 다양하지 않다. 그리고 교육에 대한 불안감이나 경쟁이 적은 편이다. 학원 수가 적은 것과 교육열이 높지 않은 느낌은 선후 관계가 애매하고, 또 어쩌면 인구수 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아무튼 전반적으로는 아이들이 뭘 배울 때 치열한 느낌으로, 쫓기 듯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른 입장에서 보면 사람 자체가 적기에 어딜 가도 쾌적하다. 경쟁이 적다는 건 삶에 행복을 더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과 불필요한 비교를 할 필요 없이, 스스로의 삶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소하지만 수영 강습을 신청하거나, 아이들의 문화 수업을 신청할 때도 경쟁률이 현저히 낮다. 밤이면 개구리 소리가 논에서 들려오고, 낮에는 온갖 동식물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우리 가족을 좀 더 여유롭게 한다. 조용하고 안정적인 일상이 반복된다.
물론 아이들이 더 크면 또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학업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것이고, 또래 집단의 규모나 교육 환경을 고려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나 역시 언젠가는 '조금 더 자극적이고 치열한 환경에 있었더라면' 하고 뒤돌아보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경쟁 없는 계절 속에서 오늘을 산다. 어쩌다 시골로 왔지만 별다른 불편함 없이 계속 정착하게 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