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운 참견으로 완성된 브런치
그날은 좀 특별한 날이었다. 같이 수영 수업을 듣는 '언니'가 다음 주에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한 것이다. 말이 언니지 나만한 딸이 있는 선배 강습생이었다. "같이 수업 듣는 사람들끼리 점심이나 한 끼 하자고. 괜찮지? 강요는 아니니까 억지로 참여하지는 말고." 나뿐 아니라 함께 수업 듣는 모두에게 언니는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지 묻고 다녔다. 그녀의 제안을 거부하는 강습생은 없어 보였다. 평소에도 수업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고 수영 자세에 대한 피드백도 잘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반의 분위기 메이커랄까.
"네. 네..." 샤워실에서도 약속을 확인하는 언니 앞에서 난 몇 번이고 참석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실은 썩 내키지 않았다.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걸 선호하지 않는 성격 탓이었다. 타인과 친해지려고 무던히 애쓰는 과정, 어색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탐색하는 그 과정이 나는 힘들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적당한 대화를 끌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지내는 것이 생활 방식이 된 지금, 다시 그 거리를 좁히는 일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내 대답은 끝났다. 무를 수 없다. 그래서 약속한 당일에는 어느 정도 긴장감과 부담감에 해탈한 상태가 되었다. '사람도 많으니 적당히 웃으며 있다가 와도 되겠지.' 적당히 웃는 병풍 전략을 쓸 참이었다.
약속이 있는 날이 유독 바쁜 건 누구나 그런가 보다. 5명 정도 모일 것으로 예상했던 그날, 강습에 참여한 사람은 식사를 제안한 언니와 나 둘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른 언니가 한 분 더 있다는 거였는데 몸이 안 좋아서 사우나만 한다고 했다. 사우나 언니는 참고로 분위기 메이커 언니보다 더 나이가 많다. 하필 강습에 늦어서 정신없이 샤워하고 있는 내게 빨리 가라고, 수업에 한 명(분위기 메이커 언니)만 있더라고 알려줬다. 웃는 병풍으로 있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수업 후 샤워를 하며 애써 부담을 떨쳤다. 각자 차를 타고 미리 전달받은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수영장 근처에 있는 작은 한식집이었다.
나는 언니들의 등장 모습을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재빠르게 준비를 마친 내가 먼저 주차를 하고 잠시 서 있는데 먼지를 풀썩이며 어떤 흰 트럭이 주차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린 건 우아한 시폰 블라우스에, 단정한 바지를 차려입은... 사우나 언니였다. "어디다 차 댔어? 난 저 쪽 그늘에 댔는데~" 우아하게 웃는 언니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질 때 즈음 이번엔 다른 흰색 트럭이 또 들어섰다. 거기선 청색 재킷과 청바지, 스니커즈 운동화를 차려입은 분위기 메이커 언니가 내렸다. "빨리 왔네? 들어가자."
트럭과 시폰 블라우스 조합이 가능한가? 청바지, 스니커즈 운동화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방금 전 일을 곱씹는 사이, 언니들은 능숙하게 불고기 백반을 시켰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 간 수영 전용 샴푸 키트를 건넸다.
"오, 이게 뭐야? 고마워!"
"근데 여기 샴푸만 있어? 린스는? 바디 샤워는?"
"아니야, 뭘 받는 입장에서 그런 얘기를 해~"
농담과 웃음이 오갔다. 당면이 국물 속에 부드럽게 풀리듯, 우리의 분위기도 금세 풀어졌다. 그래서 접시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 언니들은 나와 남편의 직업, 아이들의 연령과 성별, 이름, 그리고 내가 육아 휴직 중인 상태까지 알게 됐다. 또 우리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도. 물론 나도 언니들이 주로 키우고 있는 작물과 동물들, 자녀의 연령과 거주지까지 다 알았다. 좀 인상적이었던 것은 언니들이 이런 식으로 밥 한 번 먹으면서 친해진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거였다. 수영을 오래 해서 얼굴이 익은 사람들끼리는 농사일이 한가한 시기에 파크 골프도 같이 치고, 풍경 좋은 곳에서 브런치도 먹으며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브런치... 언니들에게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단어여서 순간 생경했다.
우리 사이가 가까워진 걸 또 한 번 느낀 순간은 2차로 카페에 갔을 때였다. 사우나 언니가 말했다.
"복직하면은 차부터 바꿔야겠다."
"그래. 경차 가지고 어떻게 매번 고속도로를 타. 위험하지."
분위기 메이커 언니가 거들었다. 내 차를 보고 한 말이었다. 꽤 사생활과 가까운 참견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다 언니들의 걱정과 관심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스스럼없이 이어진 참견은 거의 일방적인 정보 전달로 이어졌다.
"맛집은 많이 가 봤어? ㅇㅇ 카페는 분위기가 좋고 커피도 괜찮아. ㅇㅇ는 많이 알려지긴 했는데 가격이 좀 나가더라. ㅇㅇㅇ는 직원 표정이 늘 안 좋아서 좀 그렇고."
"읍에선 ㅇㅇㅇ 음식점 가면 맛있어. 나도 처음에 되게 자주 갔어. 좀 멀리 가도 된다 하면 저~기 ㅇㅇ면 쪽에 아귀찜도 괜찮게 해."
지역 맛집과 지역 사회 소식들을 빠르게 흡수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정보만 주던 언니들은 또 한 번 거침없는 조언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애들 엄마들끼리 알면 좋잖아. 애들 등원하거나 하원할 때 다른 애들 엄마들을 유심히 보라고. 인사도 먼저 하고. 알겠지?"
아, 이 날 나는 무엇을 먹은 걸까. 시골에는... 브런치가 있다. 커피와 불고기, 그리고 기꺼운 참견으로 차려지는 브런치다. 이를 차려낸 사람들은 평소엔 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느라 편한 복장을 선호한다. 하지만 약속에 모일 땐 시폰 블라우스에 슬랙스 바지, 또는 청량한 청청 패션에 운동화를 신는다. 그리고 트럭을 탄다. 자기 몸보다 훨씬 큰 흰색 트럭을. 무척이나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