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곡
-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악상의 자유로운 전개에 의하여 작곡한 낭만적인 악곡
- 어떤 명곡의 주요 부분만을 발췌하여 편곡한 악곡
전남의 군 단위 마을로 이사를 왔다. 이제 7개월이 좀 넘었다. 아예 낯선 지역은 아니고, 배우자가 어렸을 때부터 오랜 시간 지내온 곳이다. 태어나진 않았지만 유년 시절을 오래 보냈기에 고향이라고 볼 수 있다. 시골에 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만 말하자면—쫓기듯 오거나, 떠밀리듯 온 건 아니라는 점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시골행에 대해 사람들은 많이 궁금해했고, 그다음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기회에 확실히 해 둔다. 빚이 있어서 온 건 아닙니다!
아무튼 처음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먼저 면 단위 시골에서 40여 년 전 상경한 엄마. 아주 큰 한숨과 함께 딸의 시골행을 만류했었다.
"휴우....... 평생 도시에서 산 네가 거기서 어떻게 살겠니. 불편한 것도 많고."
40여 년 전 서울로 온 모 지역 출신의 아빠도 마찬가지다.
"젊을 때 시골에 가서 살면 어떻게 또 서울로 오겠니. 갈수록 집값이 오르니까 오기 힘들 거다."
그분들이 평생 품어온 일명 '서울 드림'이 읽혔다. '사람은 자고로 크게 되려면 서울에 가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 말이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기어이 시골에 첫 집을 사고 이사 준비를 하는 딸의 모습은 철없는 고집처럼 보였을까. 혹은 '나아쁜' 사위의 사탕발림에 순진한 자기 딸이 속았다고 느꼈을까. 그건 오해라고, 나도 주체적이며 고집 센 성인이라고 열심히 해명하여 넘어갔지만 아무튼 속상해하셨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거라는 흔한 말을 되새기며 말이다.
친구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대부분이 영화 '리틀 포레스트' 주인공처럼 지내면 좋을 것 같다며, 가서 글도 쓰고 쉬엄쉬엄 살라고 조언해 줬다. 연휴나 휴가 때 놀러 와도 되냐는 친구들도 있었다. 전형적으로 ‘목가적 삶’에 대한 기대처럼 보였다. 특이한 것은 이 반응들이 주로 도시 출신 친구들의 것이었다는 점이다. 정말 군, 면 단위의 지역에서 상경한 대학 친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네가 가는 지역 인구 몇 만 명인지 알아? 시골 애들은 다 알아.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스타벅스도 인구수 따라 들어오는 거 알지? 네 남편도 분명 알 거야."
한 친구는 시골 출신들은 자기 지역 인구수에 민감하다며, 그게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명 커피 체인점의 입점 사례가 대표적이라나. 인구가 많아야 이것저것 시설이 들어선다는 건 그럴듯한데, 그렇다고 일반 개인이 자기가 사는 지역 인구수를 외우고 있다고? 좀처럼 믿기 어려워 남편에게 물어봤다.
"여기 인구 몇 명인지 알아?"
"지금은 한 6만 명쯤 되려나."
거침없이 대답하는 그. 친구 말은 사실이었다.
살아보니, 친구의 말뿐 아니라 주변의 기대와 우려 대부분이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다. 시골 농촌 마을은 조용하고, 조금은 심심하다. 자연이 가깝다. 초여름 밤이면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고, 가을 해질녘에는 갈대밭이 노을에 일렁인다. 살면서 본 곤충보다 훨씬 다양한 곤충을 매일 만난다. 그게 곤충을 무서워하는 내겐 스트레스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어린이집 오가는 길에 만날 친구가 많아서 좋다.
참,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중장년층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보기가 어렵다. 그리고 소아과가 없다. 아이가 아프면 어른 환자도 보는 내과에 가거나, 인근 지역에 차로 20분쯤 가야 한다. 문화생활도 제약이 많다. 그리고, 그래. 그놈의 스타벅스도 없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다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진실의 전부가 아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각자 코끼리를 만져보고 의견을 나누는 이야기를 안다.
“길고 주름져요” (코)
“기둥처럼 커다란 원통 모양이에요” (다리)
“부채처럼 얇고 펄럭여요” (귀)
전부 다 사실이지만 이 조각들로는 코끼리를 온전히 그릴 수 없다. 각자가 보는 시선만으론 어떤 일의 전체를 조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골에서의 삶도 그렇다. 이 지역 어르신들도 모임이 있을 땐 비싸고 좋은 커피숍을 간다. 앞서 말한 '그' 브랜드 말고도 세상엔 정말 크고 쾌적한 커피숍이 많다. 시골일지라도 말이다. 또 이 지역은 가녀린 체구의 여성들도 트럭을 몰고 다닌다. 논과 밭을 다니는 것이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 수 있는 의외의 풍경은 파크 골프를 치러 갈 때, 브런치를 먹으러 모일 때, 멋진 옷을 입고 포터에서 내리는 중장년 멋쟁이들을 볼 수 있다는 거다. 이 외에도 할 말은 많다. 요는, 시골에 가진 편견과 환상은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다양한 삶이 어울리는 이 공간은, 생각보다 다채롭고 흥미롭다.
그렇기에 나 역시 단순히 시골에 산다는 이유로 시골의 삶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삶의 조각들을 성실히 쌓아가는 일은 의미 있다. 살아보니 '도시'에 알려진 '시골'에서의 삶은 너무 단순하게 뭉뚱그려져 있다. 내가 아는 시골, 우리 가족이 살아내는 시골, 나와 이웃들이 겪은 장면들을 모으다 보면 다채로운 이곳에서의 삶이 조금은 윤곽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골에서 육아하는 삶을, 가끔 수영도 하는 삶을 적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전 '환상곡'이라는 단어를 보고 뜻을 찾아봤다. 형식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전개되는 낭만적인 악곡. 또는 명곡의 주요 부분만 발췌해 편곡한 악곡이라고 했다. 익숙한 형식에서 벗어나 보고 듣고 겪은 인상적인 장면들을 내 식대로 풀어내고 싶다는 다짐과 겹쳐졌다. 시골 자연 속을 걷고, 아이를 키우고, 수영을 배우는 날들. 낭만적이면서도 우당탕탕한 시골 라이프!
나의 시골 환상곡은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