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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과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림같은 풍경을 아픈 아이와 지나칠 때면

by 미지의 세계

전남의 산들은 암석과 나무가 어우러져 멋지다. 다리라도 건널 때면 강과 산이 엇갈리며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날씨 좋은 날 차를 타고 달리면 괜히 기분이 좋다. 시골로 이사 올 준비를 하면서 자주 설렜던 이유도 바로 이런 길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풍경이 쉭쉭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뒷자석에서 콜록거리는 아이를 백미러로 힐끔 봤다. 아이의 감기가 심해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아이는 그새 흘러내린 콧물을 열심히 핥아먹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엔 소아과가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소아 청소년 전문 병원 자체가 없다. 의료원과 보건소에 군의관이 가끔 오면 소아과 진료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믿고 가는 부모는 없다. 의료원이든 보건소든, 소아과는 해당 전문의가 이 지역에 오느냐 마느냐에 따라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보건소는 일주일에 한 번만 운영을 하다가 그 마저도 몇 달 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공공 의료기관들은 의사가 바뀔 때마다 진료 질도 천차만별이라 들었다. 아이가 아프면 신경쓸 게 많은데, 거기에 '소아과가 언제 운영하는 날인지', '이번에 새로 온 의사는 잘 봐줄지' 함께 고민할 여유는 별로 없다. ​


동네 내과 몇 곳엔 '소아과 진료'가 적혀 있다. 하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실제로 아이의 건강검진 기간이 되어 한번 근처에 큰 내과에 간 적이 있었다. 직원이 말했다.


"아이는 어른들이랑 몸이 달라서요. 다음엔 소아과로 가세요."


아이가 감기에 걸려 전화로 문의하고 간 다른 병원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기들이 먹을 만한 약이 여기 약국에 있을지 모르겠네요. 일단 처방해 드릴게요."


오해는 말았으면 한다. 병원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다만 나이를 '몇 개월'로 헤아리는 '어린 환자'를 보는 게 어색해 보였을 뿐이다. 몇 번 일반 내과를 다녀온 뒤 나는 깨달았다. 진료항목에 적힌 '소아과'는 그냥 글자일 뿐이란 걸. 그래서 이 지역에 사는 어린 아이들의 부모는 아이가 아플 때마다 소아과 병원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도.


그나마 다행인 건 인근 지역에 소아과 전문의가 있고, 친절하다는 사실이다. 병원이 문 여는 시간은 8시 30분. 그래서 평일 아침 8시에 아이를 차에 태우고 부지런히 달리면 병원 문이 열리자마자 진료를 볼 수 있다. 소위 '오픈 런 진료'다. 진료를 보고 약을 타서 돌아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 들어오면 아침 9시 10분쯤 된다. 이런 일이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있다. 좀 더 크면 아이들의 면역력이 좋아져서 괜찮아진다지... 어디선가 들은 선배 엄마들의 위로를 되새긴다.


아이들이 아프면 집에서 쉬어야 하지 않냐고?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은 감기 바이러스를 서로 묻혀온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예외가 없다. 여럿이 옮기고 또 옮기다 보니, 열 없이 콧물만 훌쩍이는 정도로 집에 있으면 그 아이는 어린이집에 며칠을 못 간다. 처음엔 콧물만 나도 병원에 갔지만, 그렇게 하니 몇 달 내내 약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열이 없고 콧물만 나면 집에서 보온에 더 신경 쓰고 따뜻한 물을 자주 먹이며 지켜본다. 병원에 가는 건 열이 있거나, 잠을 설칠 정도로 기침할 때다. 그렇게 해도 두 아이가 돌아가며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매달 반복된다.


그래도 여느 대도시의 병원처럼 새벽부터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은 점 같다. 아무래도 아이 있는 집이 대도시보다 드무니 그럴 것이다. 대신 병원은 단 하나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소아과를 선택할 권한은 부모에게 없다. 만약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차로 인근에 있는 다른 대도시까지 40분을 더 가야 한다. 그래도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매번 감사하며 콜록거리는 아이들을 싣고 고속도로에 오른다.


아이들이 우연히 건강하고, 별 탈 없이 자라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 우연이 우리 가족을 찾아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연만으로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만약 아이들에게 응급 상황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소아 전문 응급실은 전주에 있다. 차로 2시간 10분 거리다. 아이가 자석을 먹거나, 열이 펄펄 나는 일이 생긴다면 우리 부부는 구조차 안에서 2시간 동안 속수무책으로 울부짖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일이 아직 없어서 정말... 정말 다행이다.


인구 유입과 출산을 독려하는 이 지역에 정작 애들이 편히 다닐 병원 하나 없는 현실은 아이러니다. 아이가 감기 말고 다른 병에 걸린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시골살이가 좋은지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아이 건강부터 이야기한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시골 생활, 그걸 가장 크게 흔드는 건 결국 병원 문제다.


전남의 자연 풍경은 참 아름답다. 그 그림 같은 풍경을 종종 아픈 아이와 함께 지나칠 때면 산도, 강도, 하늘도 모두 회색이 되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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