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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 전쟁

계속해야 이기는 여정

by 미지의 세계

요즘은 마트에 매일 들른다. 하루나 이틀에 걸쳐 소비할 만큼만 식재료를 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골살이의 정수는 5일마다 한번 서는 장에서 이것저것 구매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지만, 아직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게 영 낯설다. 흥정을 잘하지도 못하고 말이다. 재래시장을 활성화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번 글도 읽고 배웠으면서도 발길은 잘 안 간다. 익숙함을 이기는 학습이란 없는 걸까.


그래도 산지 직거래로 운영되는 하나로마트에 가는 거니까 괜찮겠지 싶다. 뭐 자잘한 소비까지 신경 쓰고 사나 싶지만 그래도 작은 것부터 시작되는 선순환이 많으니까.



하나로마트를 다니다 보니 기업에서 운영하는 마트들과는 다른, 좀 특이한 점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마트의 이름. 자세히 뜯어보면, 그 지역에서 소위 가장 힘이 센, 경제 규모가 큰 품목이 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지역은 '축협 하나로마트'가 있다. 그런데 옆 동네,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의 하나로 마트는 '수협 하나로마트'다. 물론 구체적인 지역 경제를 조사한 건 아니어서 단언하기 어렵지만, 마트를 운영할 정도로 큰 지역 조합이 어디인지는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도시에서는 농협 하나로마트를 많이 봐서 몰랐는데, 시골로 올수록 자연에서 생산하는 것이 꼭 농산품만 있지는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무항생제 계란, 한우, 각종 과일들을 꽤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계란은 각종 인증까지 받았는데도 도시에서 구매할 때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 처음엔 그게 믿기지 않아서 계속 포장지를 살펴보기도 했다. '산지와 소비지가 가깝다는 건 이런 거구나' 사회 교과서에서 글로만 배우던 걸 체감하며 기분 좋게 장바구니에 넣었던 기억이다.


아, 고기는 한우나 한돈만 판다. 가격만 놓고 보면 수입 고기보다는 비싸지만 그래도 같은 한우, 한돈과 비교하면 꽤 합리적인 소비가 가능하다. 좋은 식재료를 저렴하게 사는 건 특히 요리를 하면서 더욱 기분 좋은 경험이 되었다. 그냥 구매하는 것만으로도 몸에 좋은 영양분을 쌓는 것만 같다.



앞서 여러 이야길 했지만, 사실 하나로마트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농산품에 농부의 이름이 적혀있다는 것이다. 당근 (이ㅇㅇ), 상추 (김ㅇㅇ) 이런 식으로 품목 옆에 누가 농사를 지었는지가 적혀있다. 산지도 적혀있는데, 멀어도 그 마트에서 차로 20분 거리 내에 있는 곳들이다. 여러모로 신뢰가 가는 표기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아는 분이 직접 자신의 농산물을 건네는 느낌이 들어 따뜻하기도 하다. 계산을 하면 영수증에도 농부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자주 집어드는 채소들의 생산자는 진짜 아는 사람 같은 내적 친밀감이 있다.


그런데 훈훈하고 따스한 구매가 이뤄지기 전까지 과정은 소리 없는 전쟁에 가깝다. 채소 판매대가 농부 이름별로 나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로마트 채소 칸으로 가면 '이 ㅇㅇ 판매자'라고 써진 곳에도 당근, 파, 양파 등이 진열되어 있고 그 옆에 '김ㅇㅇ 판매자' 매대에도 같은 품목이 있다. 그 밑에는 또 '나 ㅇㅇ판매자'라고 되어있는 칸이 있고....


한마디로 당근은 당근끼리, 파는 파끼리 모여있는 게 아니라, 판매자 별로 비슷한 구성의 채소 칸이 나열되어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의 옆지기는 채소를 구매하다가 "저기에도 당근 있어요." 하는, 호객 비슷한 걸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작은 목소리의 그녀는 그 말만 하고 얼른 다른 곳으로 갔단다. 아마 그 옆에 있는 매대와 관련 있는 사람이거나 당사자였을 거라고 우리끼리 추측했다. 물론 이런 일은 평소엔 잘 일어나지 않지만, 일어나도 딱히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보통 구매자들은 자기 눈높이에 있는 매대에 가서 보이는 것 한 두 개만 비교한 후 장바구니에 넣을 텐데, 구석에 매대가 있는 농부는 영 불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직접 자신의 농산품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 자체도 대단한 것일 텐데, 자리까지 눈에 보이는 곳에 차지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궁금하다. 설마 그냥 선착순으로 배분을 하는 걸까. 그동안 읽었던 소비 심리 관련 책들과 마케팅 책들의 구절이 떠오른다. 조금은 복잡한 마음으로 채소 매대를 둘러보다가 괜히 구석에 있는 매대에서 물건을 집는다. 물론 내일은 아무 생각 없이 이 앞에 서서 보이는 대로 집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오늘만큼은.



방금 지나온 채소 전쟁은 마음 편히 구경하는 입장이었다. 그 채소를 들고 집에 오면 이제는 내가 당사자인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그건 바로, '아이들에게 채소를 먹이기 위한 전쟁'이다. 고기는 어떻게 조리를 해도 아이들이 잘 먹는데 채소는 영 먹이기가 힘들다. 특유의 맛이나 향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아이들이 튼튼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대한 채소의 문턱을 낮추고자 노력한다. 고기나 계란과 섞어서 볶기도 하고, 색깔을 다양하게 해서 먹음직스럽게 해보기도 한다. 간식처럼 쪄서 줄 때도 있다. 굽고, 찌고, 볶을 뿐 아니라 소금 치고, 설탕 뿌리고, 깨도 으깨 넣는다.


요리를 하려면 불 앞에서 오랜 시간 씨름을 해야 하니 준비부터 땀이 한가득 흐른다. 하루 중 가장 치열해지는 순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노력은 식사 시간 끝까지 이어진다. "얘들아, 이거 채소 색깔 너무 예쁘지? 엄마가 먹어보니까 진짜 달콤하고 맛있다. 한번 먹어봐." 호객도 해 본다. 승패의 결과는 설거지 무렵에 바로 나타난다. 아직까지 뚜렷한 대승을 거둔 적은 없지만 지치지 않고 계속 해내리라 다짐한다. 마트에서 좋은 식자재를 고를 때부터.



그러고 보면 마트에서 농부들이 벌이는 경쟁과 나의 노력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무더운 여름에도 땀을 흘리면서 소위 '전쟁'을 준비한다는 점, 가끔 호객을 하며 상대를 설득하려 나선다는 점,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성실히, 매일 해낸다는 점에서 말이다.


결국 마트에서든 집에서든 '채소 전쟁'은 끝내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지치지 않고 계속해나가는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전쟁을 성실히 해내기 위해, 오늘도 마트 매대 위의 작은 경쟁을 조용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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