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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덕 Jul 14. 2024

6화 새 시간표

왜 태극권?


국영수과미도사음체



다들 눈치챘겠지만 수업 과목의 앞글자만 딴 것이다.

학창 시절, 학기초가 되면 이처럼 과목의 앞글자만 딴 수업시간표를 교실 알림판에 게시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시간표를 보고 다음 시간의 교과서와 준비물등을 미리 책상 위에 펼쳐놓기도 하였고 행여 교과서나 준비물을 빠트린 친구는 빠트린 것을 빌리러 이 교실, 저 교실을 뛰어다기도 했다. 수업 시간표는 학생들에게 학교 생활의 지침이었고 일상이었으며, 경유지와 목적지를 향해 방향을 잡아주는 키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학교라는 거대한 바다의 마지막 섬을 빠져나와 마침내 부두에 닿으면 '딩동댕' 종소리와 함께 그제야 학생들은 육지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땐 배우는 과목도 적고 수업 시간도 짧아 시간표도 단출했다. 저학년의 경우는 끽해야 4개면 끝이 났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시간표는 점점 길어지고 복잡하게 변해간다.

국어 영어 수학1 수학2 물리 지구과학 생물1 생물2 정치경제 국사 세계사 제2외국어 음악 미술 체육 등등 언뜻 떠오르는 과목만도 15개다. 초등학교 저학년과 비교하면 최소 4배가 늘어난 셈이다. 그러던 것이 대학을 거치고 사회에 나오면서 또다시 시간표는 점점 짧아지고 단출하게 변해간다. 직장인이 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이제 시간표엔 일과 집, 두 개만이 남는다. 가끔씩 누군가와 함께 식사도 하고 문화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지키는 일상은 '일과 집'이다.


일하고 집에 오고, 일하고 집에 오고, 일하고 집에 오고, 일집 일집 일집 일집, 반복, 반복, 반복.....


단순하고 무료해 보이지만 많은 현대인들이 이 두 가지 일상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덕택에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이어가며 하루를 살아낸다. 그리고 내일을 기약한다. 1인 가구도 마찬가지다. 일과 집이란 두 가지의 일상은 단순하지만 중고교 시절의 십 수개의 과목을 합친 것보다 중요하다. 이 단순한 두 가지 일상으로 인해 우리는 독립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한 명의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이것은 움직이고 쉰다는 생명의 명제와 부합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일과 집은 바로 삶의 든든한 토대이며 기초다. 그렇기에 이 두 가지 행위만을 성실하고 꾸준히 해나가도 사람은 일평생을 살아가고 죽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정신과 욕구는 이 두 가지 만으론 늘 허전함을 느낀다. 인간은 늘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싶어 하고 몰랐던걸 알아내려 한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고, 취미를 찾고, 꿈을 좇고, 목표를 만들고, 때론 사람들과 교류한다. 그런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경험과 지식을 확장하며 새로움을 만들어내고 내면의 허전함을 채워 나간다. 그 과정에서 실패는 늘 따르지만 말이다.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


날마다 새롭고 새로워진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인간의 기본 욕구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움이란 긍정적인 것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니면 그 중간 어디쯤이든 사람은 매일을 새로워지려 하고 새로워지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습관이 이를 가로막는다. 날마다 새로워지려는 욕구는 습관이란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만들어 낸다. 하는 행위는 매일이 다를지라도 받아들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건 언제나 같다. 조금만 깊이 보면,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조금만 깊이 느끼면 매 순간이 다를 것이건만 늘 무감각하게 매일을 맞이하기에 다름을 같음으로 인식하고 주어진 상황에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렇게 언제나 같은 하루, 언제나 같은 나로 살아간다. 어떤 요리든간에 라면 스프를 넣으면 라면맛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습관은 곧 라면 스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매일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일과 집 두 가지 일상으로도 충분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고, 오늘과 같은 내일도 없으니 시시각각 변하는 그 미묘한 차이와 깊이를 충분히 음미하고 즐기며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기본 일상만으로도 매일이 새로울 것이며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처럼 뛰어난 감각과 지성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좀 무딘 편에 속하리라. 그래서 기본의 일상은 유지하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그로인해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매일의 새로움, 나아가선 매일의 나아짐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내가 태극권을 배우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것. 늘 해오던 일상에 새로운 변화를 주어 새로운 흐름과 인연을 만들어 내는 것. 그래서 새로운 배움을 하고 새로운 발견을 하며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새로운 나로 일신우일신 하는 것.


학기초가 되어 게시되는 새 시간표는 한편으론 부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기대되기도 했다. 시간표가 새로워진다는 건 새로운 과목을 배운다는 것이고, 새로운 책을 배운다는 것이고, 새로운 친구와 새로운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이니깐.

새로운 과목은 어떨까? 새 교과서는 저번보다 나을까? 재미있을까? 새로운 반친구들은 어떨까? 새로운 선생님은 또 어떨까?


나는 기존의 일상에 '태극권'이란 새로운 과목을 추가해 새 시간표를 만들었다. 이제 겨우 5주밖에 되지 않아 많은것을 배울 시간은 없었지만 태극권이란 새로운 과목은 아직까진 재미있고 흥미롭다. 그것은 태극권이 아주 조금이라도 매주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느림의 미학'. 누군가는 태극권을 이렇게 칭하기도 하지만 나는 거기다 '관찰'을 보태 '느림과 관찰의 미학'이라 하고 싶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느림과 관찰의 미학.

그래서 천천히 하려 한다. 앞으로 얼마나 태극권을 수련할지 장담하진 못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느리게 천천히 관찰하며 배워나가려 한다. 그렇게 조금씩 새로움을 발견하고 찾아내며 언젠가 일과 집이란 단출한 시간표보다 더 단출한 '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만족하고 매일이 새로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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