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6월 23일 ~ 29일
“감자알이 딱 맞다. 딱 먹기 좋은 크기네.”
“이건 껍질만 봐도 맛있는 감자더라. 감자밥 했는데, 대박.”
“삶았는데 진짜 맛있어.”
가족 품에 팔봉산 감자가 도착했다. 좋다고 맛있다고 난리였다. 기쁨이 포슬포슬하게 피어올랐다. 뿌듯했다. 포도는 어제도 오늘도 감자볶음을 잘 먹었다. 오늘은 감자볶음에 다짐육과 버터를 더해주니 더 잘 먹었다. 자식 입에 팔봉산 감자 들어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부자는 이런 기분 속에서 살까. 포근하고 넉넉하고, 흐뭇한.
내년 이맘때, 나도 돈을 벌 수 있을까. 돈을 왕창 벌어서 팔봉산 감자를 더 많이 나눠 먹고 싶다. 여러 책에서 말했다. ‘돈을 벌 수 있을까?’ 같은 의심을 하지 말라고. 의심을 꿀꺽 삼키고 확언해 본다.
나는 내년 이맘때 돈을 왕창 번다.
그래서, 팔봉산 감자 축제에 가서 현질을 왕창 한다.
가족과 이웃의 식탁에서 감자 대잔치를 벌인다. 오예.
<대차게해봄>
감자 플렉스
“마음은 상황에 따라 늘 변한다. 마음은 변덕쟁이다. 마음에 집착하지 말라. 마음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스승님 말씀이었다. 나는 “암요, 암요, 진작에 잘 알고 있죠.” 하면서 고개를 응당 잘도 끄덕였다. 내가 다 아는 줄 알았다. 지나고 보니. 나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았고, 마음에 집착했으며, 마음을 철석같이 믿었다. “이게 내가 진짜 원하는 거야.” 소란스럽게 확신했다.
오늘, 아주 일찍 일어났다.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점점 환해지는 하늘을 왼편에 두고서 책을 읽으니, 요즘 내가 얼마나 내 마음에 후달리며 살았는지를 ‘문득’ 알게 됐다. 문득. ‘문득’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신통방통한 사실은 이런 ‘문득’은 어두운 새벽에, 꼭,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문득은 늘 스승님의 말씀과 닿아 있다.
새벽에 일어나면 내가 얼마나 바쁘고 요란하게 미친년 널뛰듯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경험적으로 그랬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지. 대신 내일은 서울까지 왕복 운전해야 하니, 조금만 일찍 일어나야겠다. 뭐든 과하면 짐이 되니깐. 책을 읽고 모닝 페이지도 써야지. 모닝 페이지를 안 쓴지 너무 오래됐다. 그렇게 좋았던걸, 왜 안 써. 내일은 꼭 써야지. 매일 꼬박꼬박 써야지.
또 이렇게 다짐을 한다. 다짐은 좋다. 다만 무게를 잰다. 어깨를 누르는 건 덜어내고 걸음을 가볍게 돕는 건 품는다. 다짐이 다 짐이 되지 않도록 알아차리기를 다짐한다.
<대차게해봄>
또 다짐
매일 다짐
맨날천날 다짐
다짐이 다 짐이 되지 않도록 다짐
왕복 5시간을 운전해서 서울 병원에 무사히 다녀왔다. 감사합니다. 아빠가 조직세포 검사 후 팔팔하게 퇴원하셨다. 고맙습니다. 우리 고장에서 열린 독서모임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더 감사합니다. 별거 아닌 일이 별거가 된 하루.
오랜만에 마음이 밝아졌다. 기념으로 막걸리를 마시는데, 우와, 왜케 맛있어. 달다, 달아. 온몸 구석구석에 짜져있었던 세포가 모두 벌떡 일어나 풍악을 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올해 최고로 반짝반짝했던 날. 소설 ‘운수 좋은 날’처럼 반전 따위 없었으면 좋겠다. 설령 반전이 와도, 나는 잘 통과할 것이다. 행복한 기념으로 막걸리 몇 잔을 더 마시면서 새벽에 다 못 쓴 모닝페이지, 아니지, 나잇페이지를 써야겠다.
행복이 꽉 찬 밤
막걸리가 차오르는 밤
‘감사합니다’만 나오는 밤
<대차게해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막걸리 몇 잔을 마시니 배는 부른데 속은 헛헛했다. 막걸리로 채웠는데 왜 헛헛했을까. 신라면 반 개(밤 11시에 라면이라니, 양심도 반 개)에 떡국떡, 어묵 한 장, 땡초 3개, 건강식 느낌이 풀풀 풍기도록 김치를 왕창 넣어서 갱죽을 끓여 먹었다.
“오늘만이야. 딱 한 번이야.”
여러 번 다짐하면서 신나게 해치웠다.
오늘 낮에는 얼마나 바쁜 척을 해대며 별나게 부지런을 떨었는지.
“어머,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이러면서 설쳤다. 남편과 포도가 먼저 잠든 뒤, 나도 이제 자야지, 하다가...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먹다 남은 황탯국, 떡국떡, 어묵 한 장, 땡초 3개, 역시나 김치를 산처럼 넣었다. 황탯국 덕분에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맛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일은 안 돼.”
비장하게 외치며 씩씩하게 먹었다.
어제의 야식은 오늘의 야식을 부르고, 오늘의 야식은? 내일의 야식까지 부르면 안 되는데. 내일은 야식 먹을 일 자체가 없도록 일찍 자야겠다. 늦게 자니 손해가 참 크다. 일찍 일어날 수 없고 야식 먹을 확률도 높다.
그런데, 야식은 정말, 참말로 맛있다. 매일 내게 한 끼만 허락된다면 야식만 먹고 싶다. 긴장된 일과를 끝내고 편안한 상태에서 내 입맛에 딱 맞춘 나만을 위한 음식, 나 혼자 고요하게 즐기는 만찬. 야식은 배보다 마음을 달래준다. 어제와 오늘 참 달콤했다. 달콤이 길어지면 괴로움으로 숙성되니, 내일은 절제해야겠다
<대차게해봄>
갱죽이 제일 좋아
사실
야식이 제일 좋아
저녁 7시 40분, 요가원에 가려고 아파트 로비를 나서는 순간 코에 훅 들어왔다. 초여름 밤 냄새. 두근두근 설렘이 시작됐다. 살짝 데워진 흙, 촉촉한 풀, 나뭇잎의 숨이 여러 명을 내 안에 불러들였다. 그들을 생각하다가, 그 시절 꽃띠였던 나를 생각하다가, 그때 내가 입었던 부드러운 원피스가 생각났다. 수련을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았다. 휴대폰으로 원피스 쇼핑을 했다. 아이쇼핑만. 예쁜 원피스를 입고 갈 데가 없으니 살 수가 없다. 집에서 입고 앉아 빨래를 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코끝에서 맴도는 초여름 밤 향기에 취해 잘 수가 없다. 잘 수가 없으면 먹어야지. 감자떡 4개를 먹었다. 어머나, 또, 야식. 오늘의 야식은 과연 내일의 야식을 불러낼 것인가.
<대차게야식>
갱죽을 먹으면
핑크빛 추억이 뻘건 고춧가루로 변해서
잘 수 있을 것 같다.
잠들기 전, 포도는 물을 마셨다. 꿀꺽. 작은 목구멍을 통과하는 소리가 방 안을 한 번 울렸다.
“엄마, 내일은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이 물에는 내일의 기쁨이 들어있거든.”
내일의 기쁨이라니.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엄마, 내일은 사랑의 여신이 찾아올 거야. 별의 마법을 부리지.”
“별의 마법을 부리는 사랑의 여신 이름은 뭐야?”
나는 재미 삼아 물었다.
“신디랑 스텔라. 내일은 좋은 소식이 찾아올 거야.”
포도는 진지하게 힘주어 말했다. 무슨 소식일까. 포도의 예지력을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어떤 소식인데?”
“바로 나야.”
헐. 낚였다.
“너? 네가 좋은 소식이라고?”
포도는 이불을 야무지게 덮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일은 내가 쑥쑥 클 거니깐. 그게 바로 바로 바로 제일 기쁜 소식이지.”
맞다. 내일도 네가 살아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 맞다.
포도를 재운 뒤, 욕실 거울 앞에서 양치질하다가 멈췄다. 내 생애 처음으로 이런 말이 나왔다.
“오늘 나 잘 살았어. 충분히 잘 했어.”
오늘은 이사 준비로 고단한 날이었다. 못한 일이 더 많았는데도 이 말이 문득, 내 안에서 또렷하게 올라왔다.
늘 이러고만 살았다. 오늘은 이걸 못했고, 저걸 망쳤고, 그래서 내일은 더 잘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내 손에 들려 있었던 채찍이 사라졌다. 잘 살았어. 잘했어. 이불처럼 포근하게 감싸줬다.
포도의 예지력은 정확했다. 내일의 좋은 소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쑥쑥 클 포도, 다른 하나는 스스로에게 너그러울 나. 별의 마법을 부리는 사랑의 여신은 내 안에 있었다. 내일도 내게 말해줘야지. 오늘 나 잘 살았어. 잘했어.
<대차게해봄>
나에게 칭찬해 주기
이것만. 하나, 둘, 셋.
아, 빨리 밥해야 하는데. 넷, 다섯, 여섯, 일곱.
뭐야, 한 자리에 이렇게 많아?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오호라, 백발백중. 원샷원킬. 열셋.
이것도 자꾸 하니깐 잘하네. 뭐든 그래. 자꾸 하다 보면 잘하게 되지. 열넷, 열다섯.
이쪽도 한 번 볼까? 열여섯, 열일곱.
이러다 곧 돌아가시겠다. 열여덟,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검은콩을 박박 갈아 먹어야 하나. 스물둘, 스물셋.
이제 그만. 끝이 없다, 끝이 없어.
날마다 새로운 날이면 참 좋으련만.
날마다 새로운 흰머리가 돋았나 보다.
새로 난 머리는 죄다 흰머리였다.
괜찮다.
새로움이 꼭 젊음을 닮을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도 뭔가가 분명히 자랐다는 증거다.
다음에는 흰머리 대신 다른 걸 뽑아 올리기로 해.
<대차게해봄>
흰머리 뽑기마저도 글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