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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아끼고 살림을 돌보는 시간

25년 4월 12일 ~ 18일

by 대차게해봄

25년 4월 12일 토요일 / 꽃길만 따라 다녔다


작년 봄, 산책을 제대로 하지 못해 몹시 못마땅했다. 분하고 억울할 정도였다. 올해는 충분히 걸었다. 꽃놀이를 더 해도 좋겠지. 더 하지 않아도 아쉬울 것이 없다.


3일 연속 포도는 자전거를 타고 등원했다. 나는 그 옆에서 걷거나 뛰거나 포도의 자전거를 밀어주었다. 포도가 유치원에 들어간 뒤에는 유치원에서 요가원까지 걸어갔고 수련이 끝난 후에는 집까지 걸어왔다. 한 시간 넘게, 그렇게 봄꽃 속을 걸었다.


어제는 포도를 평소보다 일찍 하원시켰다. 포도는 유치원에서 호수공원까지 자전거를 탔다. 나는 또 걸었고 뛰었고 포도의 자전거를 밀어주었다. 그리고 간간이 포도의 입에 유부초밥을 넣어주었다. 포도는 지붕이 없는 곳에서 정신없이 흡입하는 스타일이다. 이럴 때 많이 먹이고 살을 찌여야 한다. 기회를 잡아야 했다. 네이버 지도에서는 유치원에서 호수공원까지 2km, 도보로 30분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한 시간이나 걸렸다. 빠른 길 대신 벚꽃길과 개나리길을 택했으니깐. 꽃길만 걷게 하소서. 우리를 보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꽃길만 따라다녔다.


길가에 예쁘게 꽃들이 피었네

햇빛을 받아서 더욱 반짝이네

아이들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예쁜 꽃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네

예쁜 꽃을 갖고 싶다 꺾지 마세요

멀리서 바라볼 때 더 예쁘답니다


포도는 노래를 불렀다. 계속. 연속재생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길가의 민들레란 민들레는 모조리 꺾었던 포도. 올해는 단 한 송이의 꽃도 꺾지 않았다. 엄마, 꽃은 멀리서 바라볼 때 더 예쁜 거야. 포도야, 정말 그래.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어. 개나리가 저 봄 한 철 피우기 위해 얼마나 지독한 추위를 견뎠을까. 포도야, ‘중꺾마’라는 말 알아? 몰라. 엄마, 나 달콤한 거 먹고 싶어. 포도야, 유부초밥이랑 물만 있어. 힝, 나 젤리 먹고 싶은데. 초밥이라도 줘. 포도는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나는 하나를 물어다 포도 입에 넣어 줬다. 예쁜 내 새끼.


애미는 애미에게 필요한 말을 해댔다. 포도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사실 나도 모른다. 말은 알지만, 그 말을 살아 내본 적이 없으니 모른다고 할 수밖에. 나는 능력 있는 여성이 되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런데, 일은 하기 싫다. 돈을 벌기 위한 힘든 과정을 감수하기 싫다. 희극은 좋지만 비극은 싫다. 스타벅스 슈크림라떼나 마시며 달콤하고 부드럽게 돈을 벌고 싶다.


오늘 새벽 6시에는 zoom기상모임<새파란새벽> 도중에 나왔다. 혼자 호수공원에 가서 달렸다. 벚꽃만 보며 뛰었다. 내 두 눈 가득 꽃을 담았다. 세 바퀴, 3km를 뛰었더니 이런 말이 나왔다. 별거 없네. 작년에는 벚꽃러닝을 하지 못해 아쉬움을 넘어서 내 팔자가 원통하기까지 했는데 막상 해보니, 이게 뭐라고, 별거 없었다. 혹시 지금 하지 못해 아쉬운 일도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닐까? 혹시 그 일도 별거 없을까? 그래도 해봐야 알 것 같은데. 꽃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나왔는데 포도가 보고 싶었다. 꿀꺽, 참았다. 이대로 집에 가면 오늘의 글을 정성스럽게 못 쓸 테니깐. 이 시각 7시 50분, 스타벅스에서 쓰고 있다. 안전 안내 문자가 3건이나 왔다. 강풍 예비 특보. 오후에 강한 비바람이 몰아친단다.


아몰랑, 아몰랑.


일단, 포도를 데리고 다시 호수공원에 와야겠다. 포도 두 눈 가득히 벚꽃을 차고 넘치게 채워주고 싶다. 오늘은 이게 제일 중요하다. 별거 아닌 꽃구경이 될 수도 있지만, 애미가 돈을 버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오히려 방해되는 꽃구경이겠지만, 나는 포도랑 꽃구경이나 더 하련다.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자기야, 포도 바꿔줘. 포도야, 외출 준비해. 오후에 비 오고 바람 불면 벚꽃이 다 떨어질거야. 비 오기 전까지 엄마랑 호수공원에서 놀자. 엄마가 데리러 갈 테니깐 준비하고 있어. 바로 나와. 엄마, 나 오늘은 아빠랑 집에서 놀래. 아빠는 얼굴에 점 빼서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아빠 혼자 집에 있다가 무서워서 울면 어떡해.


세 식구는 집에서 우리 방식대로 걸었다. 꽃길이었다.


<대차게해봄>

꽃길만 걸으며 꽃을 피우고 싶어요





25년 4월 13일 일요일 / 주주가 주가를 끌어올리는 방법

나는 카카오 주주다. 그냥 주주가 아니다. 매입가 99,392원. 현재가는 39,000원. 카카오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 수익률? 마이너스 60.84%. 육공팔사. 아름다운 숫자를 보니, 아오, 눈이 시리다. 육골빠샤. 육체와 골을 빠샤해서 시리구나. 카카오, 이놈, 내 돈으로 무슨 짓을 한 게냐.


오늘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주주로서 브런치 플랫폼 매력도에 기여해서 카카오의 브랜드 가치를 올려 주가를 끌어올려야겠다. 나도 안다. 이런 걸로는 주가를 올릴 수 없다는 것. 나는 주가를 움직일 수는 없다. 하지만 글의 조회수는 내 손에 달려있다. 혹시 몰라. 만일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어서, 사람들이 내 글을 읽으려고 브런치 어플을 마구마구 설치하고, 내 글의 조회수가 팡팡팡 올라 브런치가 들썩이고, 브런치가 들썩이니 카카오가 가만있을 수 없지. 너도 나도 카카오 주식을 사기 시작하면, 이 때부터 주가는 상승하는 거다. 오, 계산적이야. 나는 이 때부터 물타기를 시작하는 거다. 주식천재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얼쑤.


카카오 주가가 제발 오르길 기도하며 브런치 작가 신청을 눌렀다. 주가는 애타는 마음이고 작가는 가벼운 마음이다. 돈 걱정은 무섭고 글 쓰는 손끝은 가볍지. 내 인생, 균형이 잘 잡혔다.


되면 좋다. 안 되면 에피소드다.


<대차게쿨해봄>

뭐든 그렇다.

되면 되는대로 좋고

안 되면 안 되는대로 좋을거야.





25년 4월 14일 월요일 / 문장을 아끼고 살림을 돌보는 시간

“엄마, 대단해. 벚꽃이 하나도 안 떨어졌어. 그대로 있어.”

등원 길, 포도의 목소리가 반짝였다. 지난 금요일, 오늘이 올해 마지막 벚꽃 구경이 될 거라고, 주말 동안 강한 비바람에 벚꽃이 다 떨어질 거라며 꽃놀이했다. 벚꽃은 대단해. 견뎌낸 벚꽃. 비바람을 견뎌냈다.

“벚꽃은 연약해 보여도 진짜 강한 꽃이구나.”

나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흔들리되 떨어지지 않는. 쿠크다스처럼 보여도 단단한 사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살림 사는 시간은 줄어든다. 문장이 매끄러울수록 냉장고 안은 어지럽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살림도 곱게 챙기고 싶은데, 안 된다. 욕심임을 안다. 읽고 쓰기에 갈증이 날 때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싱크대를 보며 만족한다. 집이 난장판일 때는 평소보다 풍족한 읽기와 쓰기를 생각하며 짜증 내지 않는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단단한 전업주부가 되기로 한다.


지난주 친정과 시가를 오갔던 캐리어가 여전히 입을 쩌억 벌리고 있다. 입을 닫고 제자리에 둬야지. 문장을 아끼고 살림을 돌보는 시간. 나를 떳떳하고 기쁘게 만드는 시간이다. 살림 또한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서 그런가보다.


<대차게해봄>

벚꽃놀이도

살림놀이도





25년 4월 15일 화요일 / 아주 작고 귀한 성취

카카오, 너 나한테 진심 이럴 거니. 브런치 작가는 안 시켜줘도 좋다, 이 말이야. 내 피 같은 돈만이라도 살려줘. 카카오게임즈. 너도 인간적으로 너무 하잖아. 아, 너는 인간이 아니지. 수익률 –74.45%가 도대체 뭐냐. 어디서 게임질이야. 브런치 작가도 안 시켜줘, 주가도 안 올라, 에이씨, 너한테 투자한 돈 다 빼버릴 거야.


일요일에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떨어질 것 같아서 이런 글을 준비해 뒀다. 떨어져도 에피소드 두 개는 건지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하나는 신청했다는 에피소드, 다른 하나는 떨어졌다는 에피소드. 아, 생산적이야.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2013년 12월 어느 날,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한 강의 평가 점수, 5점 만점에 4.9점. 이후 처음이다. 내가 한 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게. 중등 임용 시험은 대차게 떨어졌고, 아파트 분양권은 마피에 털었고, 천안 구축 아파트는 손해를 겨우 면해서 팔았다. 주식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뭐라고요? 벌써 그 강을 건넜다고요? 삼성전자는 도대체 언제 오르냐고요.


브런치 작가가 된 건 ‘성취’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성취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하찮지 않다. 그나저나, 헤?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렀다고? 12년 만의 첫 성취라는 사실이 어매어매, 어매이징이다. 금방 거울을 보면서 흰머리를 다섯 개나 뽑아놓고 놀라기는. 슬퍼서 눙물이 앞을 가린다. 누룽지 궁물같은 눙물.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을까.


브런치 작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간단하다. 매일 블로그에 쓴 글을 일주일 치씩 묶고 퇴고해서 브런치에 연재할 계획이다. 같은 이야기이지만 글을 다듬으면서 나는 성장할 것이다. 내가 다듬어질 것이다. 내가 쓴 글을 3개월 정도 꾸준하게 수정해 봐서 아는데(어디서 잘난 척이야!), 내가 쓴 글을 퇴고할수록 마음이 정리되고 생각이 뾰족해졌다. 갈팡질팡 헤맸던 내 안의 소란이 고요해지고, 앞이 선명하게 보였다(맑게, 자신 있게!). 네, 이럴려고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습니다. 이런 과정이 제게는 필요한데 딱 한 사람이라도 지켜봐 주셔야 꾸준하게 할 수 있거든요. 딱 한 분만은 구독을 부탁드립니다.


어제 남편이 회사에서 비싼 와인을 받아왔다. 오늘을 축하하라고 신께서 미리 마련해주신 술일까. 이제는 주식 말고 주(酒)신을 믿어야 할까.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브런치 작가. 내게는 아주 귀한 성취다. 12년 간의 좌절은 어쩌면 오늘의 작은 성취를 빛나게 해주기 위해 미리 마련된... 미리 마련되기는. 내가 잘못했다. 내가 게을렀다. 내가 성실하지 못했다.


앞으로 바라는 건 없다. 아니다. 앞으로 바라는 게 더 커졌다. 매일 연속 3,650일 동안 쓰고 싶다. 기쁜 마음으로, 부지런히, 성실하게. 최소한 매일 10년은 써봐야 어디 가서 나 글 좀 써봤다고 잘난 척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차게하고싶음>

글 좀 써봤다는 잘난 척





25년 4월 16일 수요일 / 말랑말랑하다가 구축 아파트

한없이 말랑말랑해지고 싶다. 포도처럼, 벚꽃처럼, 아무 일 없는 오후 2시처럼. 하지만 삶이 어디 그리 쉬운가. 힘이 들어간다. 아니야, 삶은 쉽다. 말이라도 이렇게 해야지. 내 삶은 쉽다. 내 삶은 술술술술 풀리고 있지.


열흘 동안 미뤘던 가계부를 정리했다. 그동안 내가 돈을 많이 써서 도망 다녔다.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나는 돈을 왜 이렇게 많이 쓰는 걸까. 우리집이 부자가 되지 못한다면 바로 나 때문이다. 내가 돈을 많이 써서.


돈을 못 벌어도, 곧 죽어도, 샤워하고 나오자마자 미스트를 뿌려야 한다. 달바 미스트 17,920원. 매일 썬크림도 발라야 하고, 닥터지 썬크림 17,520원. 눈썹도 그려야 한다. 미샤 브로우 키트 5,000원. 얼굴을 뜯어먹고 살 수 있는 미모가 전혀 아니라서 마음을 뜯어 먹고 살 수 있도록 책도 읽어야지. 책값 73,200원. 그리고 저녁이 되면 세수해야지. 설화수 클렌징 오일 28,800원. 도대체 얼마야. 룰루레몬 요가복 한 벌 216,500원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지만 룰루레몬 요가복은 죽을 때까지 입을 수 있다. 미스트, 썬크림, 브로우 키트, 책은 죽을 때까지 계속 사고 또 사야 한다.


가계부만 쓰기 시작하면 마음이 돌처럼 딱딱해진다. 돈돈돈돈 거린다. 생각은 구축 아파트에 닿는다. 팔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만일 이재명 대통령이 탄생한다면 나 같은 다주택자는 어떻게 될까. 투자 빈민이 될까. 내가 한 거라고는 임대 주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헐값에 집을 내어준 것뿐인데. 그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 이재명 대통령 다음에는 누가 대통령이 될까. 그때까지 눈 딱 감고 버텨볼까. 구축 아파트만 아니었어도 이런 고민을 안 했을 것 같다.


책<돈의 심리학>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실패를 대할 때 중요한 것이 있는데, 투자를 잘못했고 목표 달성을 못 했다는 식으로 복기하지 말란다. 그렇게 복기해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투자에서 행운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 리스크의 존재는 실패를 판단할 때 나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의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의미이다. 똘똘한 한 채로 빠르게 노선 정리를 하지 못한 나, 너그럽게 용서하고 이해해준다.


사실 나의 투자에 있어서 가장 큰 리스크는 나 자신이다.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나에게 행운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좋은 생각을 많이 해야겠다. 생각이 현실이 된다고 하니깐.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돈을 왜 이렇게 많이 쓰냐는 타박을 거둔다. 눈썹을 그리고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기분으로 오늘도 구축 아파트를 팔지 말지, 고민해본다.


<아직도 대차게다주택자>

선생님,

여태까지 안 팔고 뭐했냐는 말씀은 거둬주세요.

저는 이미 강을 건넜어요.

내 물건과 사랑에 빠졌거든요.





25년 4월 17일 목요일 / 가지가지


이거 팔아도 되겠다.


남편 입에서 나오는 내가 만든 음식을 향한 최고의 찬사다. 이 말 뒤에는 꼭 이 말을 붙인다.

“근데 너는 손이 너무 느려서 돈은 못 벌겠다.”

어제 저녁 반찬으로 만든 계란말이가 맛있었나 보다. 남편은 또 팔아도 되겠단다. 내가 말을 바로 잡아챘다. 돈은 못 벌겠다는 말이 듣기 싫었다.

“반찬집 매출 1위가 계란말이, 2위가 메추리알 장조림이래. 인스타로 팔면 돼. 토요일에 주문 마감하고 일요일에 장 보고 월요일에 만드는 거야. 화요일에 일괄 배송. 계란말이랑 메추리알 장조림만 파는 거지. 손이 느려 터져도 돈은 벌 수 있다고.”


오전에 요가를 마치고 바로 하나로 마트에 갔다. 마트 입구에서 오늘만 세일하는 초록이와 노랑이가 나를 반긴다. 나는 초록이랑 노랑이에게 환장한다. 이거 안 사면 사는 게 아니지. 초록이 마늘쫑 한 단에 2,890원. 노랑이 파프리카 하나에 1,290원, 파프리카는 두 개 지름. 카트를 밀며 뽈뽈뽈 서둘렀다. 목요일과 금요일은 살림을 좀 더 살아놔야 주말에 빈둥거릴 수 있다.


마트 제일 안쪽 반찬 코너에서 마늘, 고춧가루, 물엿을 넣고 조리는 냄새가 진동한다. 저 작은 반찬 코너 안에 5명의 여사님이 바쁘게 움직인다. 평소라면 지나치는 반찬을 유심히 관찰한다. 내 주먹만큼 포장된 잡채. 잡채는 자고로 팥빙수처럼 소복이 쌓아놓고 먹어야 제맛이거늘. 저렇게 작은 양을 누가 사갈까. 누가 사가니깐 만들어놓았겠지. 그 옆에는 당근과 대파를 쫑쫑 썰어 넣은 계란말이가 보인다. 두껍고 큰 계란말이 두 조각, 내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의 양. 2,000원 하겠지? 가격을 본다. 눈을 깜박였다가 다시 크게 뜬다. 100그램당 2,300원. 두 조각에 5,244원. 내가 어제 만든 계란말이는 소비자 가격으로 얼마일까. 나란히 진열된 메추리알 장조림을 본다. 크게 잘못되었다. 내가 잘못되었을가. 100그램당 4,500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메추리알 열두 개. 다시 세봐도 열 두개에 4,500원이다. 우리집 냉장고에 메추리알 장조림이 120개는 있을 텐데. 그럼 그 한통이 45,000원짜리라고?


정녕, 사업을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계란말이는 눈 감고도 말 수 있다. 메추리알 장조림은 간을 안 보고 만들어도 입에 딱 붙는다. 쌔빠지게 일하기 싫다. 계란말이랑 메추리알 장조림만 팔면 스타벅스 슈크림라떼처럼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다. 나만 츄리하게 살아서 보기만 해도 썽질나는 인스타. 삭제했는데 다시 설치해? 인스타로 팔아봐?


운전하며 집에 오는 길. 차 안에 향기가 가득하다. 어머나. 예뻐라. 찰칵찰칵. 조수석 위에 놓인 내 가방을 사진 찍는다. 빵빵빵. 초록불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고 이 장면을 감상했다. 주차하고 가방을 메는데, 예쁜 거다. 누가? 내가. 눈곱만 뗀 얼굴, 시꺼먼 요가복, 가방을 어깨에 맨 나. 싸라있네. 남편은 가방이 아니라 장바구니라고 했지만, 내게는 갬성 숄더백이다. 이 모든 기쁨은 1,990원을 주고 산 대파 덕분이다. 대파를 무심코 가방에 찔러넣었을 뿐인데 이렇게 큰 감동을 선사할 줄이야.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도 찰칵찰칵. 오. 기다란 바게트를 가방에 넣어 다니는 빠뤼지앵 스타일이야. 잡지 화보 같군. 제주도 레몬처럼 상큼하고 유기농 케일에 딸려 온 달팽이처럼 생기가 넘쳐흘러. 사진이 잘 나왔나 확인까지 한다. 마늘쫑이랑 가지도 세워서 넣었다면 더 예뻤을까. 가지가지. 참, 가지가지 한다.


전업주부는 가지가지 할 수 직업이다. 베스킨라빈스처럼 31가지 직업도 가능하지. 자, 어디, 세볼까나. 어제 저녁에는 반찬코너 여사님으로 빙의되었다. 능숙하게 계란을 돌돌돌돌 말았다. 꼭두새벽에는 수전 손택의 책<해석에 반대한다>를 읽으니 이동진과 맞짱 뜰 수 있는 비평가가 되었다. 포도에게 아침을 내어줄 때는 공예가. 햄치즈햄 구이를 놓고 어떻게 형상을 잡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아, 오늘은 실패. 다음에는 빼빼로처럼 잘라줘야지. 요가원에 가서는 고요한 수행자가 되어 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나왔다. 마트에서는 사업가. 창업 아이템을 고민하고 시장가를 조사했다. 사진을 찍을 때는 포토그래퍼 겸 짜리몽땅한 모델까지. 이 모든 직업에 금전적인 보상은 땡 전 한 푼도 없지만, 그래도. 필(Feel)은 충만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지. 나는 필대로 사는 동물이다. 필 아니깐. 느낌 아니깐.


남은 하루도 가지가지 필을 더 살려봐야겠다(살리고, 살리고). 주방에서는 등갈비 요리사, 거실에서는 비용을 줄이고 효율적인 정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경영 컨설턴트. 그리고 포도와 남편을 대할 때는 세련된 친절을 베푸는 스튜어디스. 쪽머리라도 할까봐. 어떤 직업이라도 가지가지, 다 소화 가능하다.


나는 가지가지 다 할 수 있는 전업주부다.

이게 나다.

싸라있네.


<대차게해봄>

펄떡펄떡

싸라있네

씽크대에 바이올린이랑 트로피가 있어서 성질이 났지만, 오늘 사진 찍기에는 좋았다.





25년 4월 18일 금요일 / 어마어마한 목표를 또 세우기

오늘은 25년의 스물두 번째 요가를 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아사나 중에 힐끔힐끔 시계를 몇 번이나 쳐다봤다. 아, 이 고문은 언제 끝이 나는가. 파다 하스타사나를 할 때는 얼굴로 피가 쏠렸다. 얼굴이 터지고 눈알이 튀어 나갈뻔 했다. 눈알을 잡기 위해 눈을 얼마나 질끈 감았는지. 할라아사나를 할 때는 어떤 놈이 내 목을 졸랐다. 캑캑캑. 숨이 막혔다. 내 목을 조르는 저놈에게 욕을 퍼부었다. 할라아사나는 스트레스 감소에 효과적이라고 누가 그랬나.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뿜뿜했다. 이랬던 내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 모든 증상이 사라졌다. 아사나에 스며들었다. 아사나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 좋다, 좋아. 이 좋은 걸 매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 또 이런다, 안돼, 안돼. 작년에 365일 매일 요가하기를 목표로 세웠다. 후덜덜. 힘들었다. 요가 후에는, 아이고, 나 죽네, 드러누웠다. 포기했다. 그랬던 24년에는 며칠이나 요가를 했을까.


그런데 말입니다. 25년 4월 18일이 되어서야 뒤늦게 24년 요가 일수를 세어보는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게으른 인간일까요. 보시죠.


1월 8회

2월 13회

3월 14회

4월 17회

5월 10회

6월 16회

7월 15회

8월 5회

9월 12회

10월 11회

11월 14회

12월 5회


크하, 쏘맥 한 잔만 주소. 처참하다. 택도 없는 목표를 세웠던 내가 부끄럽다. 이렇게밖에 못했던 내가 쪽팔린다. 하지만 (산신령 버전으로 읽어주세요)부끄럽고 쪽팔리는 건 5초면 다 사라지나니. 정말 다 사라졌다. 25년 목표를 세운다. 25년의 4분의 1이나 지난 시점이지만, 오늘은 목표 세우기 참 좋은 날이니깐. 원래 목표는 천날만날 세우라고 존재하는 거다.


25년에는 매일 365일 요가하기. 요가원에 갈 수 있는 날에는 특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감사한 마음으로 요가원에 가기. 요가원에 못 가는 날에는 집에서 3분 요가하기. 딱 3분만 하겠다는 마음으로 요가 매트 위에 올라서기. 매트 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3분이 뭐람. 눈 깜짝할 사이에 30분이 지나간다. 그러니깐 딱 3분만 하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요가 매트를 촤라락 펼치는 거다.


몸이 풀리니 마음이 풀린다. 마음이 풀리니 기분이 왈츠를 춘다. 부드럽게, 고요하게, 기쁨의 필(Feel)을 그린다. 둥글게, 둥글게 하다가 필이 꽂힌다. 역시, 나는 필대로 사는 동물이었어. 매일 365일 요가하기라는 어마어마한 목표를 또 세운다. 오예. 너무 고돼서 포기하지 않도록 매일 3분만 해야지. 매일 3분이라는 작은 산 정상에 오르면 매일 상쾌해질 거다. 매일 필이 좋아지고 매일 기분이 좋아지면... 매일 이렇게 살다 보면... 죽을 때까지 매일 행복하게 살아버릴지도 몰라. 오예.


<대차게세움>

매일 365일 요가하기

오늘에서야 비로소, 냉장고장에 붙어있던 24년 요가 달력을 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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