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8장 15절
해가 뉘엿뉘엿, 붉게 물들어 갈 무렵, 피곤해 보이는 한 사람이 루스 땅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어요. 그 사내는 누가 봐도 다른 여행자들과는 달랐지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누가 따라오는 건 아닌지 불안한 눈빛이었어요.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찾아오자, 그는 내게 다가와 조심스레 나를 집고는 베개 삼아 누웠어요. 금세 두 눈을 감았지만, 그 눈가에선 말없이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답니다. 나는 살짝 젖어오는 내 몸을 느끼며, 그의 곁에 머리를 대고 함께 잠들었어요. 그렇게 우리는 함께 꿈을 꾸었지요.
이른 아침, 그는 눈을 뜨자마자 조용히 누운 채로 밤새 꾼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나도 그 꿈을 같이 꾸었지만, 모른 척 조용히 귀를 기울였어요.
“어젯밤, 정말 신기한 꿈을 꾸었어.”
“그나저나... 마음은 좀 괜찮아? 어제 너, 이곳에 도착했을 때 정말 힘들어 보였거든. 말도 꺼내기 힘들 만큼 지쳐 있었잖아.”
“응, 사실은… 나, 쌍둥이 형의 장자권을 몰래 가로채고 외삼촌이 계신 하란으로 도망가는 중이야. 정신 차릴 새도 없이 고향을 떠났는데, 다시는 가족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괴로워. 앞날도 너무 막막하고…”
“그랬구나. 하지만 꿈을 꾸고 나니까 조금 괜찮아졌어?”
“응.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을 해주셨어.”
“정말? 무슨 축복인데? 빨리 말해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그를 재촉했어요. 그러자 그는 어젯밤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답니다.
“내 앞에 커다란 사닥다리가 나타났어. 그 꼭대기는 하늘까지 닿아 있었고, 그 위를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지.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어.”
“천사들은 아무 말도 안 했어?”
“대신 하나님께서 사닥다리 위에 서 계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어.”
“우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어? 뭐라고 하셨는데?”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나와 내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그럼 너의 자손들이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가겠네! 세상 모든 사람이 너와 네 자손 덕분에 복을 받게 되고!”
“어? 어떻게 알았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거든.”
“에이, 그냥 느낌이 왔어!” 나는 그만 말이 새어 나온 걸 얼른 감추며 입을 꾹 다물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어디를 가든지 지켜주시겠다고 하셨어. 내가 가장 바라는 것도 이루어주신대.”
“가장 바라는 게 뭔데?”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 꼭, 다시 이곳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꼭 지켜지잖아. 그분은 언제나 너와 함께하실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분명히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그의 눈에는 어느새 희망의 빛이 가득했어요. 어제 눈물짓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새사람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답니다.
“정말 하나님이 여기 함께 계시나 봐. 이곳은 단순한 들판이 아니야. 하나님의 집,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야. 사실 여전히 앞날이 어떻게 될진 모르겠어. 여전히 어둡고 불안하지.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만은 더 밝게 빛나는 것 같아. 길이 안 보일수록, 하나님이 더 뚜렷하게 보이거든.”
“맞아. 하나님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시니까. 너를 지켜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도 다 주실 거야. 그리고 우리, 꼭 다시 이곳에서 만나게 될 거야.”
“응, 그때가 되면 나도 진심으로 고백할 거야.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 중 열의 하나를 꼭 드릴 거야.”
그는 갑자기 나를 세워 기둥으로 삼았어요.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아끼던 기름을 내 위에 부어 제단을 만들었지요.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어요.
“꼭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반드시. 그때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 되어 있을 거야.”
그는 루스였던 이곳에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그러곤 힘차게 일어나 길을 떠났답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밧단아람 저 멀리로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손을 흔들어주었어요. 그리고 문득 깨달았지요. 그의 간절한 바람이 어느새 내 마음속 바람이 되어 있었다는 걸요. 우리 다시 꼭 만났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지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 날을, 꼭 기다릴게요.
창세기 28장 15절-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