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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찾는아이 Oct 07. 2021

라면 먹으러 가자.

고단했던 그 순간을 위로하는 달콤한 한 그릇.

 으레 대한민국 남자들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있다. 바로 국방의 의무. 이 의무를 경험한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순간, 군에 대한 수다는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질 준비가 되어있다. 군에 대한 경험은 각자 다르지만, 그럼에도 그 힘든 순간들을 견뎌내고 전역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기에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육군 중위로 전역했던 나는 군에 있었던 이야기를 엄청 떠들고 그러려 하지 않는다. 솔직히 내가 군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내 스스로 잘 알고 있기도 하고,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자랑할만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에서의 경험이 나를 성장시킨 것은 맞았고, 또 생각을 많이 넓혀준 계기는 맞았지만 엄청 군 생활을 잘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군에 있을 때는 항상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훈련을 받기 위해 입소할 때부터 경직되어 있는 나의 모습은 내가 맞는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생각으로 채워지기 충분했다. 집단 생활 속에서 스트레스 받는 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어쩔 때는 내 스스로가 왜 이렇게 모난 존재일까 싶어서 스스로를 자책하기에 바빴다. 매일 매일이 고단한 나날이었으며, 기초군사훈련을 받는 4개월과 병과(직렬) 교육을 받는 4개월 모두 나에게 쉽지 않았던 시기였다.


야, 라면 먹으러 가자. 미사 가면 라면 끓여준데.


 그렇게 서툰 나날을 군대에서 보내던 어느 수요일. 훈련 일과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나서 쉬고 있는데, 동기가 갑자기 성당에 가자고 이야기한다. 난 당시 세례 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왠지 처음 훈련 받고 통제 되는 생활 속에서 '햄버거'에 열광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서 가는 것이 영 미덥지 않았다. 하지만 재촉하는 사람들과 같이 다들 가는 분위기 속에서, 애라 모르겠다 하며 그냥 쉬러가자는 마음으로 갔다. 


 미사 때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앉았다 일어났다를 열심히 했던 것 하나만 기억한다. 하지만 미사가 끝나고 나서 신부님 인솔에 따라 이동한 곳은 라면과 소주가 마련되어 있는 어느 공간이었다.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전 기도를 마친 뒤, 신부님은 모두에게 소주 한잔을 따라주시면서 모두들 고생한다며 이야기하셨었다. 그리고 나서 라면을 맛있게 먹으면서 하하호호 즐겁게 떠들었다.


  군에 적응하느라 고단했던 나의 일상은 온데간데 없고, 즐거운 나의 모습만 보였다. 어쩌면 이것이 그 그림에서만 보던 '최후의 만찬'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림에서는 너무 엄숙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사실 예수님과 열두제자들은 이렇게 웃고 떠들면서 먹지 않았을까. 모두 쉽지 않은 일과를 마치고 와서 달콤한 식사를 먹는 것. 예수와 열두제자라고 특별한 행복이 아닌, 같이 먹는 즐거움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지 않았을까.


 그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하던 순간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술 한잔과 라면 한그릇은 내 인생에서 손꼽을만한 가장 달콤한 식사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때의 느낌과 맛은 잊지를 못하겠다. 





 그렇게 나는 수요일 저녁마다 뭐에 홀린 듯이 계속 성당에 가게 되었다. 그 때 그렇게 기분 좋게 먹던 라면을 잊지 못해서였을까. 잠시나마 고단함을 내려놓고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내겐 소중했다. 유체이탈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에도 그리고 어느 수요일 저녁. 성당에 어김없이 왔던 나에게 갑자기 군종 신부님이 물어보았다.


세례 받을래요?  


 순간 망설여졌다. 라면에 낚여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이것은 신의 큰 그림이었을까. 군종 신부님이 물어보시는데 대답을 바로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입교를 하게 되는 것이 맞을지부터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나를 움직였던 '라면'이 떠올랐다. 따뜻한 라면 한 그릇에 내 마음이 따뜻해졌던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을 떠올리며 나는 신부님께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사실 세례를 받는 것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내 고단했던 군대 생활 가운데에서 달콤한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누군가 라면을 끓여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그 라면과 소주 한 잔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라면 먹으러 가자 했던 그 친구에게도 고맙다. 고단한 삶 속에서 달콤함을 주는 것은 셰프의 역대급 요리가 아니어도 따뜻한 라면과 함께 웃을 사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어서. 고단한 누군가에게, 라면 한 그릇으로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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