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교로 부임한 지 며칠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전 학교에서 도서부 학년 차장을 맡을 만큼 열심이었던 지현이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의 내용은 자신이 도서부장이 될 수 있도록 현재 사서 선생님께 말을 전해 달라는 거였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라 난감했다. 지현이를 잘 타일러서 지금 계신 사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2년 전 지현이가 1학년 입학 후 처음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 나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더랬다. 그 이유는 지현이가 그전에 도서부원이었던 서빈이와 너무 생김새가 똑같아서였다. 성도 엄연히 다른데 몇 번이나 지현이가 서빈이와 혈연관계가 아닌지 확인할 정도였다. 그 계기로 지현이와 빠른 속도로 친밀해지게 되었다.
지현이는 발랄하고 쾌활해 보이는 아이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늘이 있다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친구들 간의 사소한 다툼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지현이는 도서관에 와서 소리 내어 울곤 했다. 하루는 방과 후에 얼굴이 울상이 된 지현이가 찾아왔다. 자기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울고 있는 지현이를 달랬다. 그러자 지현이는 자신이 가진 오랜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관계가 좋지만, 어릴 때는 한동안 어머니가 지현이를 전혀 돌보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가 동생을 낳고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는 걸 이제는 이해하지만, 그 상처는 여전히 남아서 자기를 괴롭힌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도 가끔 엄마를 신뢰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지현이의 이야기와 눈물은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울고 있는 아이를 두고 집에 갈 수는 없어서 계속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다행히 지현이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지현이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메신저를 확인해보니 담임 선생님과 어머니가 지현이를 찾고 계셨다. 나는 지현이가 도서관에 있다고 알려드렸고, 지현이의 눈물이 잦아들 즈음 어머니가 도서관에 도착하셨다.
가방을 가지고 오라고 지현이를 교실에 보내고, 어머니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했냐고 하시며 자신도 그 부분이 미안하고 너무 안타깝다고 하셨다. 사실 그날 친구들과 부딪친 사건이 있었던 건데, 지현이의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함께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다음 날, 지현이의 표정이 한결 밝아 보였다.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신이 겪는 감정과 정서의 문제에 대해서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노력할 거란다. 기특했다. 지현이를 토닥거려 주고, 문제가 있었던 아이들과의 관계도 잘 해결될 수 있도록 담임 선생님께 이야기하며 부탁드렸다. 다행히 아이들은 금세 화해했고, 다시 친하게 지내기로 했다.
2년 내내 매번 마음을 쏟아 챙기고 돌봐주었던 아이였다. 도서부장이 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했던 그 전화 이후, 지현이에게는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들리는 말로는 도서부장으로 뽑혔던 남학생의 반에 찾아가 불러내서 행패를 부렸고, 그로 인해 그 친구 스스로가 부장이 되기를 포기했다고 했다. 그렇게 지현이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결국 도서부장이 되었다.
나중에 다른 아이에게서 그 후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도서부장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은 내가 지현이를 외면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학교도 옮겼으니 이제 우리 선생님도 아니라고까지 했단다. 솔직히 마음이 너무 상했다. 대가를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고마움은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것 같은 깊은 배신감은 잘 사라지지 않았다.
지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 주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무조건 외면당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 같았다. 내가 속상해하는 걸 알았는지 친한 동료 샘도 아이들에게 너무 마음을 주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역시 그래야 했나 보다. 나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쉽게 다 주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결심은 오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처음 만난 날 ‘왠지 샘이 너무 좋은데, 샘 좋아해도 돼요?’ 하고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고백 해준 예쁜 아이 덕분이었다. 딱딱하게 굳어졌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았고,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관심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아이에게 상처받아 부서지고 잃어버렸던 마음을 다시 아이를 통해 되찾을 수 있었다. 역시 나는 어쩔 수 없는 애들 바라기인가 보다.
이 아이도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가 속상해할 말이나 행동들을 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인간이기에 서운함도 느끼겠지만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또다시 상처받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 마음을 멀리하거나 외면하고 싶지 않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하나님과 다른 이들로부터 받았기에 지금 여기에 있고 사랑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