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이 넘치는 사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쓸 데 있게

by Pearl K

‘아무런 쓸모나 득이 될 것이 없다.’ 어학사전에 나와있는 '쓸데없는'의 의미다. 영어에서는 ‘불필요하다’를 뜻하는 useless, unnecessary로 쓰기도 한다. 만일 업무에서 쓸데없는 일을 한다면 기업의 성장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이 단어를 적용하면 결코 쓸데없거나 의미가 없지 않다.


두 사람이 열심히 잡담을 나누는 것이 쓸데없게 보일 수 있지만, 둘은 사이가 아주 좋고 몹시 가까운 친구관계라는 뜻일 수도 있다. 친한 친구 사이라면 의미 있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시간보다는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과거의 시간이나,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 요즘 생활은 어떤지 등의 신변잡기 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비율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무용해 보이는 이야기들로 서로의 친밀함이나 우정의 척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학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낯설다. 도서관 내 공간부터 학교 건물이나 위치, 방문하는 학생들, 동료 교직원들까지 익숙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런 상황이 여전히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신입생으로 이제 막 입학한 학생들도 그런 마음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학교를 이동한 해에는 먼저 신입생들과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신입생이 되니까 낯설지? 나도 이 학교가 처음이야. 같이 잘해보자.” 하면, 고맙게도 아이들도 마음을 열어준다. 아직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들이나, 눈에 띄는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 것은 어색한 대화를 유연하게 만들어 준다. “야, 지하 1층에 매점 있더라? 거기는 뭐가 맛있어.”처럼 먼저 알게 된 꿀팁을 전달하며 서로에게 그리고 학교에도 차차 적응해 간다.


교과 담당교사도 아니고 담임교사도 아닌 나는 아이들에게 일종의 깍두기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아이들은 내게 더하고 빼는 것 없이 많은 대화들을 솔직하게 건넨다. 때로는 쓸데없어 보이는 대화 속에서 아이들의 진심이 툭툭 튀어나오곤 한다. 많은 학생들이 한 번에 방문하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심각한 고민이나 스트레스받은 일을 꺼내 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교실에서 벌어진 내가 알기 어려운 일들이나 도서관에 자주 오는 어떤 누군가의 안부, 학원에서 있었던 일 등 소소한 이야기 속에서 나는 아이들의 고민을 발견한다. 사소해 보이는 대화를 자주 나눌수록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아이에게 어떤 고민이 시급한지,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쓸데없어 보이는 잡담들이 쓸 데가 생기는 순간들이 오는 것이다.


도서관에 거의 매일 같이 오던 수향이는 도서부이자, 처음 본 날부터 빠르게 친해진 친구였다. 그런데 자주 오던 수향이가 갑자기 일주일 가까이 한 번도 오질 않았다. 내심 걱정이 됐지만, 연락하면 더 부담을 느낄까 봐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하고 30분쯤 지났을 무렵,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수향이가 와서 데스크 옆 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너무 반가웠는데 수향이 표정이 너무 안 좋기도 해서 “수향이 잘 지냈어? 오랜만이네.” 하고 말하며 꼭 안아주었다. 왁 하고 나를 꼭 끌어안은 수향이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울어도 괜찮아. 편하게 울어도 돼.” 했는데 금세 꾹꾹 눌러 호흡을 정리하더니 “이러려고 온 거 아닌데.”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더니 그동안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수향이는 평소 엄하신 아버지와 새어머니, 부모가 다른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최근 새어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혼자 많은 일을 감당해야만 했다고 했다. 아빠가 병원에서 상주하시느라 빨래와 청소, 설거지 같은 집안일들과 고등학생인 오빠를 챙기는 일까지 해야 했던 모양이다. 거기에 새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중학교 1학년인 수향이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일들이었다.


가정상황은 다르지만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수향이와 비슷한 나이였던 6학년 때 엄마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몇 달간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심하게 다치셔서 아빠는 퇴근 후에 엄마를 돌보기 위해 병원에 가셔야만 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친오빠의 지휘 아래 삼 남매가 많은 집안일들을 도와야 했다. 중환자실에 누운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수향이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아시는구나. 선생님은 그 마음을 아시는구나.” 하며 울기 시작했다. 아무 데도 털어놓을 곳이 없이 혼자 눈물을 삼키며 집안일을 했을 그 마음이 안쓰럽고 기특했다. 눈물이 나는데 제대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꾹꾹 눌러 삼키는 아이를 다시 꼭 안아주었다. 수향이를 위해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에 가서 꼭 소리 내서 울라고, 그래야 마음이 숨을 쉴 수 있다고 얘기했더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향이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느라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 일을 잘 이겨내고 이 일을 계기로 수향이의 마음이 좀 더 자랄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학교도서관에서 아이들을, 선생님들을, 학부모님들을 만난다. 개개인 한 명 한 명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아이들에 한해서는 이야기를 마음껏 들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작은 창구라도 되어주고 싶다. 쓸데없게 느껴지는 사소한 이야기와 대화, 잡담 속에서 아이가 감추고 있는 고민들을 잘 들을 수 있게 귀와 마음을 더욱 활짝 열어야겠다. 그러한 다짐으로 오늘도 나는, 아이들과 쓸데없는 대화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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