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리모델링을 하고 덤으로 병을 얻었다. 환경호르몬은 생각보다 무시무시했고 안온했던 내 일상은 파괴되었다. 1년 반 동안 약을 쏟아부었지만 건강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예쁘게 지어진 도서관의 이름을 직접 짓고, 현판까지 디자인했지만 결국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새로운 근무지는 개교한 지 채 3년이 되지 않은 곳이었다. 환경호르몬도 없고 외관도 무척 깔끔했지만 대신 보이지 않는 내부의 문제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몸의 건강을 되찾아 가는 대신 마음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업무적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하는 분위기 때문에 무척 답답했다. 외딴섬처럼 고립된 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무기력감에 빠져 자꾸만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에 파랑새처럼 날아온 한 친구가 있었다. 처음 볼 때부터 뭔가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연주는 정말로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바쁜 학교생활과 각종 수행평가, 지필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타이밍에도 언제나 해맑았다. 하이톤의 목소리로 "선생님~ 안녕하세요!" 건네주는 연주의 인사는 답답하고 삭막한 내 마음까지도 밝혀 주었다.
한 번은 음악을 틀어놨더니 1학년 축제 때 혼자서 Rain drop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혹시 아시냐고 물어왔다. 좋아하는 IU(아이유)의 음악이라 들어는 봤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제가 불러 드릴게요"하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내려온다 내 머리 위로 갑자기. 말도 없이 젖어버리겠네. 추억이 흘러내린다. 따라 눈물도 흐른다 바보처럼. 집에 가는 길 아직도 멀기만 한데, 우산도 없이 감기 걸릴 것만 같아. 이 길이 너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면 젖어도 좋은데. Oh Rain drop Oh Rain drop 사랑이 참 모자라구나. Oh Rain drop Oh Rain drop 사랑은 저 빗방울처럼 모두 까맣게 잊어버리고, 젖어버리고선 아파하는 감기 같은 걸까요."
낭랑하고도 귀여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했더니 한때 성악을 전공하려고 레슨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한 번은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고 하더니 몇 달 동안 미술학원을 다니며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가져와 자랑하기도 했다. 유난히 상상력이 풍부하고 꿈도 많은 연주는 항상 도서관에 올 때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바뀌었고 매번 다른 것들을 꿈꿨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마냥 밝고 발랄한 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주의 독특함이 그저 성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주에게는 경증 학습장애와 조울증이 있었다. 연주의 부모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선생님을 통해 조심스럽게 내가 짐작하던 것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모님도 연주의 상태를 알고 계셨지만, 고등학교까지는 평범하게 다니고 졸업하기를 원하셨다.
어떤 날은 예전과 다름없이 해맑은 모습으로 도서관에 왔지만, 또 다른 날은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는 한숨을 10초마다 한 번씩 내뱉었다. 어떻게 해야 연주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계속 고민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그저 연주가 어떤 기분일지라도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왠지 점점 미안해지는 마음을 안고, 나는 연주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맘때쯤 연주는 3학년 선배 진환이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도서관에도 자주 오는 과묵하고 말수가 적은 남학생이었는데, 서로 좋아하는 마음에 자칫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할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진환이가 혼자 있을 때 따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다행히 젠틀한 아이여서 연주에게 힘이 될 것 같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
예쁘게 만나던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달 후였다. 진환이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가끔 점심시간에 맞추어 도서관에 들렀다. 연주를 보러 온 줄 알았는데 사정은 전혀 달랐다. 자꾸 선을 넘는 요구를 하는 연주를 지켜주고 싶어 안 된다고 했더니 진환이에게 화를 내며 헤어지자고 했단다.
헤어진 후에도 진환이는 연주에게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 그녀의 하굣길을 지켜주었는데, 연주는 진환이를 스토킹으로 경찰에 신고하기까지 했다. 무엇이 진실이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주가 안전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진환이의 마음은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연주의 조울증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한참이나 빌려 간 책을 반납 안 하길래 하루는 연주를 불러서 이유를 물었다. 나는 연주의 대답을 듣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산을 등산하다가 기분이 안 좋아져서 산 위에서 가방을 아래로 던졌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가방을 던지면 어떻게 하냐고, 거기 중요한 물건은 없었냐고 물었더니 본인이 던져버린 책은 다시 사 오겠다고 말했다.
그 후로 내 건강은 다시 심각하게 나빠졌고, 두 달 정도 병가를 내게 되었다. 연주가 졸업할 즈음이 되어서야 다시 학교에 복직하게 되었는데, 졸업을 앞두고 3학년들은 체험학습으로 등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다시 연주를 만나지 못했다. 다만 SNS로 연주가 전문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여전히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면서 연주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특유의 해맑음과 기분 좋은 웃음으로 깊은 무기력 상태였던 나에게 큰 위로를 주었던 연주와의 첫 만남을 다시 생각해본다. 적절한 치료와 돌봄을 통해 조울증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소녀가 되었으면 좋겠다. 행복하게 맑게 자신 있게 계속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연주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의 밝음과 자유로움을 내게 전해줘서 정말 고마워! 연주 덕분에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서 샘은 네가 먼저 진짜로 행복해지길 바라. 지금처럼 언제나 너다운 삶을 살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