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공간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학생들이 생활하는 교실과 교직원이 근무하는 교무실, 또 하나는 전문 담당자가 상주하면서 학생과 교직원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특별실이다. 어학사전에서 ‘특별(特別)’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보통과 다르다는 의미 또는 보통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의미다.
특별실 중 아이들의 이용이 가장 많은 곳은 단연 보건실이다. 여러 고민과 어려움을 상담해주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내려는 아이들로 상담실도 인기가 있다. 내가 경험하고 생각해 본 바로는 보건실과 상담실의 중간쯤에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도서실(학교도서관)이다. 몸이 아프면 보건실을 찾고, 마음이 아프면 상담실에 간다. 몸과 마음이 다 아픈데 누구에게도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들은 도서실로 먼저 온다.
도서실은 그런 아이들에게 잠시 숨을 곳이 된다. 책으로 가득한 책장들 사이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편안한 소파에 앉아 누군가에게 용기 내어 말할 힘을 충전하기도 한다. 특별히 간섭하고 채근하지 않기에 조용히 몸과 마음의 힘듦을 덜어낼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건실, 상담실, 도서실 세 곳 모두 아이들을 위한 유기적인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도서관에 자주 오는 아이들을 보건실과 상담실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각각의 특별실의 역할은 다르지만, 학교 내에서 숨 쉴 곳이 필요하고, 숨을 곳이 필요하고, 자신을 보호할 곳이 필요한 아이들은 자주 특별실을 찾는다. 반복적으로 마치 삼각형 모양을 그리듯 번갈아 세 군데의 특별실을 드나든다. 학교 속 숨구멍인 특별실 트라이앵글에서 아이들은 잠시 복잡했던 머릿속의 걱정과 염려를 내려놓고, 학업 스트레스를 잊기도 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평소에도 종종 도서관에 오던 서빈이는 항상 친구 관계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아이였다. 2학년 때는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3학년이 된 후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서빈이의 우울 상태는 많이 심각해 보였다. 그대로 두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특별실 선생님들께 조언을 구했다. 보건 선생님께 확인해보니 이미 신체적으로도 과호흡, 소화불량, 위경련 등 여러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서빈이 스스로도 어느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지 인식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냥 힘든데 무작정 버티고 있는 느낌이었다. 상담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더니 아직 서빈이가 상담 신청을 하지는 않았다고 하셨다. 날이 갈수록 너무 표정이 어두워져서 담임선생님께도 상황을 말씀드렸다. 그렇게 담임 선생님과 여러 특별실 선생님들께 자문을 구한 후, 내가 서빈이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방과 후에 잠깐 서빈이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고 약속을 잡았다.
"서빈아, 요즘 어떻게 지내?"
".... 힘들어요 그냥."
"어떤 부분이 어떻게 힘든지 설명할 수 있겠어?"
",,,글쎄요. 그냥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사는 게 의미가 별로 없어요."
"사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이 들어...?"
"그냥...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애들이 딱히 뭐라고 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엄청 친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다 엉망인가 싶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데 나아지는 게 없다는 느낌인 거구나."
"그냥 끝내는 게 답인가 싶기도 하고. 제가 죽는다고 딱히 다들 슬퍼할 사람도 없을 거 같고요."
"서빈이가 죽으면 샘은 엄청 슬플 거 같은데..."
"슬퍼해 줄 사람이 한 명은 있네요."
"왜 한 명이야. 다른 사람들도 많지. 일단 서빈이 부모님도 계시고, 친구들도 있고. 슬퍼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냥 잘 모르겠어요. 애들이 저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건지 마지못해 잘해주는 건지."
"에이~ 애들이 너 좋아해. 샘한테도 서빈이 너무 착해서 계속 친구 하고 싶다고 좋다고 했는데?"
"그랬어요? 그건 몰랐네요."
"서빈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친구들은 너를 더 좋아해, 그건 샘이 보증할 수 있어."
"다행이네요... 근데.. 무엇보다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요."
"맞아. 학교 다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근데 어떤 것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지는 조금은 알 것 같아."
"설명하기 어려워요. 딱히 별일이 있는 건 아닌데, 저는 정말 너무 힘들거든요."
"샘이 보기엔 서빈이가 감정이나 생각들이 예민하고 민감한 편이라, 아무래도 그런 관계를 맺는 거나 공부를 하는 거나 학교에서 있는 모든 시간이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 같아. 그럼 너무 힘들지."
"맞아요. 진짜 그래요. 학교에만 오면 머리가 아프고, 배도 아프고, 너무 답답하고 힘들어요."
"학교에만 오면 더 힘들어지는 거야?"
"집에 있을 땐 나름 괜찮거든요. 학교만 오면 몸도 아프고 답답하고.. 그냥 살기가 싫어져요."
"서빈아, 그 정도로 큰 스트레스면 죽지 말고 학교를 관두더라도 살아야지. 선생님은 그게 맞다고 생각해"
"아! 그러네요. 학교를 안 다니면 되는 거였네요.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정말 네가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데, 학교가 중요해? 일단 살아야지"
"그러네요."
"네가 어떤 상황인지, 얼마나 힘든지 부모님과도 잘 상의해 봐. 일단 살아있어야 뭐든 할 수 있잖아.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너 좋아하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다른 선생님들도 언제든 도와주려고 하실 거야. 샘도 서빈이를 완전 응원해!"
“정말 감사합니다. 부모님이랑 잘 상의해 볼게요."
다행히 서빈이는 부모님과 상의 후에 여러 가지 불안의 문제들에 대해 상담실에서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전문상담을 통해 서빈이의 몸과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고, 여름방학 때는 또래 상담 특별요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건강해졌다. 다시 웃음을 되찾는 서빈이를 보며 나의 마음도 안심이 되었다. 서빈이는 도서관에 종종 놀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무사히 고등학교 진학을 했고, 그 뒤로는 소식이 없어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나도 학교를 이동하게 되어 따로 연락하지 못했다.
몇 달 전,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 중학교 때 선생님께 많이 도움받았던 서빈이라고 합니다.". 서빈이의 첫마디에 나는 냉큼 "내가 왜 널 기억 못 하냐! 이놈아!" 하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 사이 몇 년이 지났고, 서빈이는 스물한 살의 멋진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선생님을 뵐 용기가 이제야 났다고 전화를 걸어온 서빈이와 약속을 잡고, 시험 기간에 짬을 내어 만났다.
서빈이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괜찮았는데, 2학년 때부터 우울 증상이 다시 심해지면서 부모님과의 상의를 통해 학교를 자퇴했다고 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고 얼마 전에는 공부하고 싶었던 분야의 대학에도 합격해서 좀 다니다가 휴학했고, 2학기부터 복학한다고. 그때는 잘 몰랐는데 선생님의 조언과 도움 덕분에 어려웠던 시기를 무사히 넘긴 것 같아 항상 감사했다고. 여러 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선생님께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늦었다며 내게 카네이션 화분을 건넸다.
나는 "이런 건 왜 사 왔어. 미안하게." 하며, 언제든 빈손으로 찾아와도 되고, 언제든 연락해도 된다고 했다. 반가워하는 내게 서빈이는 거듭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그냥 서빈이가 행복해지고 의욕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눈물 나게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동안 특별실을 트라이앵글처럼 도는 아이들을 보고 만나면서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맞는지 때로 회의감이 들기도 했었다. 서빈이 덕분에 우리가 아이들을 만나는 이 시간이 헛되지 않음을 또다시 배웠고 증명할 수 있었다. 특별실 트라이앵글이 빚어낸 또 하나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되새겨보며, 앞으로도 서빈이의 멋진 앞날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