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떠나지 않고도 여행할 수 있기 위하여

아파서 떠났다. 그게 여행의 시작이었다

by 마고캐런



자기 사랑이 서툰
세상의 여행자들에게 바칩니다


prologue


여행을 할 때면 문득문득 지나온 시간들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충동적인 욕구가 일기도 했다. 떠날 때 가져갔던 묵은 기억들은 몸으로 흘러든 새로운 길에 휩쓸려 엉겨 가라앉거나 흩어져 옅어졌다. 새로운 세계는 과거를 흔적도 없이 집어삼킨 듯했고, 잠시 잠깐 나는 ‘이젠 끝났다’거나 ‘정리됐다’는 식의 자조적인 위안을 하며 낯선 길에서 다시 익숙한 길로 돌아왔다.

나는 왜 글을 쓰려고 했을까. 지나온 시간을 잊기 위한 여행이었을 터. 그럼에도 난 왜 기록하는 데 집착했던 것일까. 어설픈 글 실력으로 펜을 쥐고 써내려간 여행의 기록을 내 삶의 모퉁이에 가둬놓고 산 지 12년이 흘러서 다시 노트를 펼쳐든다. 긴 시간이었다. 삶이 여행이고 여행이 곧 일상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세월을 산 끝에, 나는 여전히 ‘왜 떠나는가’에 대한 질문에 막혀 버둥거리고 있다. 그런 내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다시 글을 쓴다.


아파서 떠났다.

그게 여행의 시작이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여행마저 위로가 될 수 없다면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기에 여행이라는 문밖세상으로 내 삶을 도피시켰다. 여행이 위로가 되어야 했으니 배낭을 짊어 멘 심정은 위태위태한 집착에 사로잡혔다. 이번에는 분명 묵은 기억의 짐들을 풀어버리고 올 수 있으리라는 막연하고 외로운 기대는 번번이 무너졌으나, 나는 또 번번이 다시 일어나 길을 나섰다.

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걷는 자는 투박한 자갈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길 위에서 굳은살이 차고 떨어져 나가기를 반복하는 동안 스스로를 찔러대던 모난 마음도 조금은 깎인 모양이다. 이렇게 시간을 더듬어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으니.


산더미처럼 묵은 기억들을 걷어내 물에 불리고 치대기를 반복한 끝에 더 선명해지는 나의 이야기와 감정들을 마른 하늘아래 빨래처럼 널어보고 있다. 순간순간 그때의 나를 다시 본다. 사건 하나하나를 떠올릴 때마다 기쁨과 슬픔, 놀라움과 두려움, 엄숙함과 외로움의 감정들이 교차하고 뒤섞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한걸음 떨어져서 과거를 바라보니 이제야 내가 조금씩 성장해온 여행의 역사가 보인다.

‘여행 없는 여행’을 해왔다 생각한 나는 이 글을 써가며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여행이 없었던 게 아니라 정작 없었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내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나라들이 있다.

이야기는 대부분 이들 나라로부터 시작되고 끝이 난다.

인도, 독일 그리고 아이슬란드.


인도는 죽고 싶어서 떠난 순례여행길에서 살 수 있도록 희망을 준 나라이며, 독일은 여행의 속도를 바꾸고 여행의 온도를 내릴 수 있도록 변화를 준 나라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될 아이슬란드는 나의 파랑새가 어디에 있는지,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 나라이다. 이 책에서는 지금껏 다녔던 그 외의 수많은 나라들을 과감히 제외했다. 오직 ‘여행 없는 여행’으로부터 나를 돌려세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내려갔다.

이리저리 방황했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생각해보니 결국 여행을 통해 내 모든 시간의 역사가 정리되었음을 인정해야겠다. 그 시간들이 글이 되어 구체적인 기억으로 완성되어간다. 쓰면서 깨닫고 깨달으면서 또 쓰기를 이어간다. 첫 번째 책 출간 이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독자들에게 소개하기에도 너무 오래 전에 독일에 관한 책을 한 권 낸 적이 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내 지난 여행의 시간들을 스스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싶다.


Travel makes you happy!


책을 쓰면서 생각했다. 여행을 멈추었을 때도 행복할 수 있는 여행이 진짜 여행이라는 것을. 흔히들 행복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그러나 당신이 향하는 그 어느 곳에도, 당신이 보려고 한 그 무엇에도, 찾고 있는 행복은 없을 것이다. 다니다보니 행복은 인간의 욕망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지금 상태 그대로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떤 여행도 텅 빈 공터를 배회하는 기분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일상도 여행자처럼 살 수 있다.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행복은 언제나 우리 마음 안에서 태양처럼 빛날 것이다.


이 글이 한 번은 떠나보았거나, 지금 떠돌고 있거나, 앞으로 떠나려는 모든 이에게 ‘여행 있는 여행’으로의 작은 나침반이 되길 바래본다.


2020년 6월

사유하는 여행자 캐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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