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을 하자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명상이 뭔지 몰라서 못한다는 사람과 왜 명상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이다. 과연 명상은 왜 할까. 명상을 알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모르고 해도 괜찮을까.
내가 명상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사는 게 힘들어서다.
거기에는 경제적인 문제보다 마음의 문제가 더 심각했다. 스스로 적응하지 못하는 여러 불편한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남녀문제까지 감당이 안 되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너무 힘들면 죽기 전에 종교를 찾거나 어디론가 사라지듯(그것이 여행이 될 수도 있다 ) 새로운 탈출구를 찾게 된다.
그러나 나는 힘든 그 순간에 종교나 여행으로 위로가 되지 않았고 결국 내 발로 찾아간 곳이 명상센터였다. 만약 내가 고대 인더스 문명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도 움막이나 자연에서 고요한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굴에서 구도자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러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가 명상 을 시작한 이유는 다르다.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올라온 서울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고 생존경쟁 속의 인간관계는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20대에는 불교 동아리에 가입하여 참선과 경전 공부를 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찾았다. 그러나 30대 이후 종교적인 위로도 한계가 느껴져 모든 활동을 접었다. 게다가 삶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나의 괴로움은 커져갔고 종교적인 해석으로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내면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까지 경험하면서 밀려오는 삶의 허무감과 첫사랑의 실패가 가져온 위험수위는 절벽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외로운 방랑자 신세였다.
밀려오는 마음의 고통은 육체적인 아픔 그 이상이었고, 일상을 버티지 못할 정도의 무력감에 출장을 핑계로 일탈의 여행을 반복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탈한국을 하더라도 귀국하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결국 죽으려고 떠난 인도의 순례여행 길에 우연히 위 빠사나 명상센터를 만난 것이 두 번째 명상과의 인연 이었다. 그 곳에서 크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 귀국 후 열정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40대 중반이 되자 다시 인생무상이라는 문제로 나의 방황은 극에 달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알 수 없는 공허함
낯선 여행자처럼 정착하지 못하는 방랑벽
학창시절에 사연 없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나의 초중고 시절은 야생상태로 돌아다니는 하이에나였다. 게다가 인생의 중요한 시기인 고 3 시절에는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반항을 했다. 10대 시절 내내 사춘기도 없이 시골의 농사일과 공부만 하던 여학생이 수험생한테 중요한 2학기가 되자 UFO에 열을 올리며 나의 미래보다 지구의 미래를 걱정했다. 대학을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야간자율 학습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불꽃 튀는 우주전쟁 같은 수다로 시간을 보냈다.
일상생활에 도움도 안 되는 미분 적분을 왜 배워야 하냐며 수학을 포기한 채 독수리 오형제처럼 용감하게 대입시험을 치렀다. 운좋게 들어간 대학 전공은 관광경영학이었고 그 때부터 우주와 지구의 문제는 완전히 잊었다. 대신 세계 일주를 꿈꾸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어학과 전공공부만 파헤치는 재미없는 여대생이 나였다. 동아리조차 가입하지 않은 나는 알바와 학원 그리고 강의실만 오고가며 추억도 없는 캠퍼스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사회생활은 만만치 않았고 계약직으로 시작한 직장생활은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가장 오래 다닌 회사가 일 년이었던 나의 20대는 고달프고 힘들기만 했다. 직장생활도 힘든데 당시의 연애는 더 순탄하지 않았다. 이런 힘겨운 삶에 대한 보상은 여행이었고 나의 여행경비는 나의 욕구와 비례하고 있었다.
내면의 허전함은 여행을 많이 다닌다고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알 수 없는 공허함에 우울증까지 더해져 술만 늘어갔다. 지인의 소개로 심리상담사를 찾아가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그 때 뿐이었고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았다.
아무리 유명한 여행지를 직업상 좋은 대접을 받고 다녀도 멋진 풍경은 사진을 찍기 위해 셔트를 누르는 그 순간뿐이었다. 고통은 길고 희열은 짧았다. 화려한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배우처럼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허탈해졌고 마음에는 서리가 내렸다. 차가워진 마음의 온도를 데울 낭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도 배낭을 메면 세계 일주를 꿈꾸는 멋진 여행자가 된다. 그러나 여행자의 욕구는 보상을 향한 욕망으로 변질되고 출장은 일탈을 위한 핑계가 되었다. 40 대에는 벌려놓은 사업들도 잘 돌아가 사무실은 매일 이벤트가 넘쳤고 저녁마다 술 약속 때문에 잠잘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나 겉만 화려할 뿐 내면은 어느 때보다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그 날도 오성급 호텔 오찬 행사에 초대되어 와인 몇 잔을 마시고 광화문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추자 질주하는 차를 보며 (술기운이었는지) 도로에 뛰어들어 교통사고를 가장한 자살 욕구가 일어났다. 그 때 길가에 세워진 명상 간판을 보고 홀리듯 들어간 것이 세 번째 명상과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