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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우 Dec 20. 2023

여기,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서점을 찾는 단골손님들

 서점을 그만둔 지금까지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나의 최애 손님이었던 Y 씨와 P 씨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매주 주말 어머니와 함께 방문하던 Y 씨는 큰 판형의 아동만화 코너만을 집중 공략하던 타입으로, 그 외 도서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다소 특이한 손님이었다. 언제나 '응응' 하는 소리를 쉬지 않고 내는 탓에 출근 초반에는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Y 씨의 '응응' 소리를 기다리게 되었고, 소리가 들리면 반색을 하고는 계단 쪽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그가 오지 않는 주말에는 걱정스레 Y 씨의 근황을 떠올려 보곤 했다. 그러나 사실 내가 더욱 애정하였던 것은 Y 씨의 어머니 쪽이다. 그녀는 늘 Y 씨보다 조금 늦게 올라와 계단 오르기가 쉽지 않다고 투정 어린 불평 한 마디를 내뱉고는 책을 고르러 나선 아들을 뒤로하고 카운터 앞으로 직행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오곤 했다. Y 씨의 어머니는 중년이라기엔 조금 더 나이가 든 듯한, 노인이라기엔 젊다고 볼 수 있는 작고 앙상한 여인이었다. 날렵한 눈매가 자칫 매섭게 느껴질 수 있으나 까르르 웃음을 터트릴 때면 어김없이 소녀의 얼굴이 배어 나왔다. 그 절묘한 간극은 마주한 사람의 긴장을 녹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매주 아들이 골라오는 만화책을 결제하고, 때때로 시니어 활동북(치매 예방을 위한 낱말 퍼즐이나 컬러링 북 등)을 함께 구매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나를 향해 장난 어린 눈웃음을 지으며 "아들놈도 모자라 내가 지금 노노케어까지 하고 있다니까~" 하는 푸념 섞인 말 한마디를 내뱉고는 또다시 예의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고단함이 분명 그녀의 삶을 장악하고 있을 텐데도,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맑고 활기찼다. 어느새 나는 Y 씨의 '응응'소리를 기다렸던 것만큼이나 부인과의 소소한 수다를 기다리게 되었다.


 P 씨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서점을 방문해 오직 만화책만을 구매해 돌아가는 손님이었다. '대장'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한 자수로 새겨져 있는 볼캡을 쓰고 질끈 묶은 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의 비주얼은 첫 대면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M과 나는 P 씨를 '대장님'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했는데, 호기로운 애칭과는 달리 무척이나 수줍음이 많았던 타입으로, 그렇게 자주 와서 많은 책을 구매하면서도 회원가입을 하지 않아 우리의 애를 끓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 없는 만화책을 주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먼저 다가온 P 씨를 붙들고 용기 내어 말을 건넸다. "(제발) 회원가입 하세요! 우리 적립 10%나 된단 말이에요~!!"

 P 씨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그거 되게 복잡한 거 아니에요?"하고 우물쭈물 말했는데, 30대 중반은 돼 보이는 남자의 과하게 수줍은 행동 앞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나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야 했다. 웃음을 잘 참아내서였을까? 그날은 P 씨가 드디어! 회원 가입을 한 날로 서점 역사에 기록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부터다. 한번 말을 트고 나니 조금 편해진 것인지, 그날 이후로는 올 때마다 이 책 저 책 서슴없이 주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재미있는 만화인가 봐요?"하고 가볍게 건넨 질문에 해당 만화의 작품성과 특징 및 장단점을 장황하게 설명해 주고는 유사 장르의 다른 만화를 추천해 주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나는 여러 단계를 거쳐 그가 만화가 지망생이라는 정보까지 입수할 수 있게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10권 넘는 만화책을 주문한 것을 마지막으로 P 씨를 다시 보지 못했다. P 씨가 주문한 만화책을 찾아가지 않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이렇게 오랜 시간 서점을 찾지 않은 일도 없었던 터라 M과 나는 이 정도면 P 씨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니겠느냐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화가 데뷔를 하게 되어 바빠진 걸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말하긴 했지만 여전히 P 씨의 근황이 궁금하다. 우리는 예약 도서를 최대 2주까지만 맡아주고 그 후엔 취소 문자를 보내는 형식으로 관리했는데, P 씨의 예약 도서만큼은 여러 달이 지나 내가 서점을 그만두던 날까지도 창고 한 구석에 P 씨의 이름이 붙은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불특정 다수를 손님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때때로 불쾌한 상황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흥미롭고, 가끔은 특별한 마음을 쓰게 되는 일이다. 서점원으로서의 시간은 20대 초반 알바를 전전하던 때 이후로는 처음으로 소비자를 직접 대면해 본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을 통해 나는, 내가 오프라인 공간에서 손님을 직접 마주하는 일을 생각보다 훨씬 더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일이 나의 적성과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 사실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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