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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Feb 21. 2024

누나, 내가 헬렌 이모 죽인 거 맞지?

영화 <월플라워>

영화: 월플라워(2012)
누나, 내가 헬렌 이모 죽인 거 맞지?
내 생일 선물 사다가 돌아가셨으니 내가 죽인 거지?


살다 보면 '나'라는 존재를 부정적으로 규정하게 되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온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한 후 스스로 사랑할 자격 같은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책하게 된다든가, 친구와 불화하고 내 성격에 심대한 모가 나있다고 느낀다든가, 가족과 다투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같이 느껴진다든가, 회사에서 동료들과 트러블을 겪은 후 자신의 사회성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는 순간들이 그렇다.


탁구를 쳐보면 '엣지(edge)'라는 것으로 점수를 따거나 잃을 때가 있다. 여기서 '엣지'란 공이 탁구대 끝에 걸려 미끄러지듯이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공이 테이블에 맞은 후 튀어 오르지 않고 그대로 바닥으로 꺼져버리기 때문에 이를 받아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이런 변수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아서 속수무책인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엣지'로 점수를 내주었을 때, 자신을 탓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해답 없는 자책만 계속될 것이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었던 무의미한 경우의 수를 계산하다가 경기 자체를 그르치게 될 것이다.


삶에도 이처럼 '엣지'같이 찾아오는 불운, 불화들이 있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삶의 불운에 너무 오래 매몰되지 않는 담대함이 오히려 필요한데도, 때로는 자책을 하거나 원인을 찾으려는 의미 없는 노력을 하다가 완전히 절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영화 <월플라워>에서 '찰리'는 어린 시절 이모가 죽은 것을 되뇌며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그는 이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일종의 불운을 자신의 잘못과 분리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가는 길에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라고. 오히려 이를 인과관계로 연결함으로써 절망을 자처한다.


'찰리'가 이모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자책대로라면 그는 이모의 죽음을 막기 위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내가 바뀌어서 될 일이라면 얼마든지 바뀌어야 하겠지만, 세상에는 내 잘못 없이 일이 틀어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럴 땐 오히려 마음껏 야속한 환경과 불운을 탓해도 될 것 같다.


새똥을 맞았을 때는 새를 욕하고 바닥에 침을 뱉는 거다. 이 길을 택한 내 잘못이라며, 자신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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