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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Apr 06. 2021

읽그64.<중앙역>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읽고 그리는 하루, 64번째_소설 <중앙역>(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오래전부터 밤이었는데 여전히 밤이다. (p.20)


이 소설은 끝없는 밤이다. 이야기의 끝에서 주인공은 새벽하늘을 쳐다본다. 하지만 따뜻한 아침의 온기는 어디에도 없다. 사위가 밝아진다한들 그 빛은 자신이 떨어진 나락이 어떤 곳인지 똑똑히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매 순간 사람들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밀려들어 오는 곳. 책 어디에도 '중앙역'이 그곳이라는 말은 없지만 구역사와 신역사에 대한 설명을 읽을 때부터 독자들은 그곳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떠나는 그곳에서, 그곳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 사람들은 하루 종일 역을 떠나지 않는다. 낮동안은 역사 내부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밤에는 근처에서 잠을 청한다. 열차 선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덜컹거림과 눈부신 불빛에 시달리면서도 아무도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캐리어를 끌며 그곳에 합류한 주인공 남자는 자신과 그들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원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몇 푼치 술을 사는 것으로 그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제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오는 최악을 기다리는 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인다. 그곳 사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바쁘게 드나드는 사람들 속에서 주인공 남자의 시간은 한 곳에 고여있다. 누군가 자신의 시간을 붙들어맨 것 같다고 여기는 그는 긴 하루를 주체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한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떼어 팔고 싶을 정도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여자'가 나타난다. 남자는 남루하고 추레한 여자를 처음 만난 순간 '깊이와 너비를 가늠하기 힘든' 눈동자를 마주한다.


그 속에서 희망과 기대를 발견했던 걸까. 남자는 여자와 가까워진다. 그들은 함께하게 된다. 여자는 남자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몸이 아프고, 몸이 아프면서도 밤낮으로 술을 끊지 못한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시답잖은 반응에도 둘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한 지붕 밑에서 잠들 수 있는 두 사람만의 방 한 칸을 꿈꾸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나이 많은 여자와 거리를 두라고 조언하는 목소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 여자가 돌아온 지금 나는 악착같이 최악을 상상하면서 어쩌면 그 속에서 아주 조그마한 희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p.262)


그러나 남자의 계획은  풀리지 않는다. 아니, 계획이랄  없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밤낮으로 술을 찾는 여자가 자기 파괴적이라면, 남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단단한 결심 없는 남자의 기대는 순진하다 못해 맹목적이고, 태도는 이중적이다.  곳에 머물러 오지 않은 최악을 상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근거 없는 낙관을 좇는다.


그래서 이 사랑 이야기는 함께 표류하다 끝내 좌초하고 마는 이야기가 된다. 잃고 잃고 잃으며 결국에는 사람의 자존을 잃는 이야기다. 남자는 희망과 기대 같은 실체가 없는 것을 얻으려고 했던 과거의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남자의 불행에는 연민이 생기지 않는다. 마치 신탁을 받은 주인공처럼 집요하게 불행을 찾아다녔으니.


다만 남자와 여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끈,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랑의 운명에 대해서는 연민이 생긴다. 벗어나지 않는 것이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든 현실의 누추함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연민해야 했던 처지가 애달프다. 결국은 자신의 발목을 잡은 상대를 원망하고, 상대와의 관계를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며 검열하게 되고, 동물적인 욕구라고 생각하며 냉소하게 되는 결말이 냉정하고 아프다.


그곳에 닿으려고 악착같이 애썼던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역사의 불빛 대신 불빛을 둘러싼 거대한 어둠을 본다. 더는 그것의 깊이와 너비를 의심하지 않는다. (p.276)


새드엔딩은 사랑의 방해 요소가 아니다.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사랑이 완성되기도 한다. 스노볼에 담긴 끝나지 않는 겨울처럼, 짧게 끝난 사랑은 때론 끝나지 않아 아름다운 한 계절로 남기도 한다. 정말 슬픈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이것이 사랑이었을까 자문했을 때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


아플 때 손잡아 주는 것이 사랑인데, 가난은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조차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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