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호신술로 나를 구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한번 다른 회원이 나에게 "이 운동 왜 하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이어 "다이어트 목적도 아니신 것 같고... 혹시 누가 시켜서 하세요?"라고 덧붙였다. 조금 이상한 질문에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30대 나이에 누가 시켜서 격투기를 배우러 다닐 사람이 어딨냐고요. 시켰다면 아마 나 자신?
그날 크라브마가 수업 파트너였던 그 회원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정시 전에 도복으로 갈아입고 비장하게 섰지만 끝나는 시간 5분 전에 도망을 갔다. 사실 더 이상 집중이 되지 않고 정신적으로 힘들어서였는데, 파트너에게는 미안한 상황이라 ‘속이 안 좋아서 오늘 조금 일찍 들어가겠다’라고 말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조금 후에 탈의실에서 마주친 파트너는 내가 마치 누가 억지로 시키듯 운동을 꾸역꾸역 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사실이다. 나는 크라브마가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배우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지만 가는 날마다 고역이다. 가드 올리기도 원투도 아무리 기본적인 동작이라도 내가 마스터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 내 자리엔 코치님이 다가오셔서 동작을 수정해주셨다. 벌써 6개월째 헤매고 있으니 가는 길이고 돌아오는 길이고 발걸음엔 그다지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깨우치는 재미가 있었고 절대 되지 않을 것 같은 셔플(등으로 걷는 동작)이 어느 순간 되는 등, 성취감이 있는 순간도 있었다. 나는 그 전체 과정을 좋아했다. 조각조각 보면 힘든 일이지만.
사실 영화 ‘아저씨’의 원빈 무술로 알려진 크라브마가를 배우는 이유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연습 때도 내가 동작을 제대로 못 하는 탓에 과연 위기 순간에 기술을 쓸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때 쓰고자 하는 목적이 무색하게, 배우는 상황 자체가 나에게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긴 막대기와 같은 몽둥이를 들고 상대가 달려들었을 때 방어하며 무기를 뺏는 동작을 익히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이 동작을 배우는 날, 나는 인간 초시계가 됐다.
파트너를 정한 후, 한 명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다른 한 명은 방어를 하는 것으로 번갈아 연습을 하는데 나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도 방어도 하지 못했다. 사범님이 친절하게 몇 번이고 다시 알려줬지만 '몸치'에 가까운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동작은 우연으로라도 하지 못 했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도 연습을 할 수 없잖아요. 차나씨 다시"
사범님이 몇 번이고 시켰지만 몽둥이를 휘두를 땐 방향을 아무리 설명해줘도 상대방이 맞을까 봐 끝까지 내리치지 못했고, 맞서는 동작을 배울 때는 맞을까 봐 무서워서 인지 오른손과 왼손을 겹쳐서 몽둥이를 막아서는 동작을 하지 못 했다. 나이프 디펜스도 발차기도 원투도 이렇게까지 안 된 적은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시간제한이 있는 탓에 결국 내 파트너를 공격해주는 역할도 사범님이 하게 되었다. 대신 나는 사범님이 평소 들고 있는 초시계를 들고 30분, 1분, 2분 단위로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무언가 할 일을 부여해줘서 고맙긴 했지만 울고 싶었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아서 마스크 속 입을 꽉 깨물었다.
결국 초시계와 잠시 시간을 보냈지만 이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범님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한다. 계속 안 되는 사람에게만 시간을 쓰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다음번엔 이번보다 아마도 나아지겠지. 나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몽둥이 방어 수업을 포기할지언정 크라브마가 수강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겨우 6개월. 옐로 벨트라는 목표가 있기는 하지만 꼭 옐로 벨트가 아니라도 좋다. 나는 지금 크라브마가를 그만 둘 생각이 없고 이 생각이 변할 때까지 '그냥' 할 것이다. 꼭 목표와 당위성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오늘은 눈물도 찔끔 나고 창피하지만 내일 또 나갈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마인드 컨트롤 때문이다. 일상에서도 곤경 속에 침착함을 유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실제로 협박 메일로 괴로울 때, 마치 내 마음을 알 듯 가장 먼저 나이프 디펜스를 배웠고, 그 후에는 펀치와 킥, 주짓수와 같은 그라운드 기법이 이어졌다. 낙법을 배운 후에는 상대방을 엎어치기 한 후 상대방이 매트를 손바닥으로 팡팡 치는 낙법 소리에 짜릿함이 있었다. 수세에 몰렸을 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대방을 도리어 엎어치기를 한다니. 몸무게와 그다지 상관없는 기술이었기 때문에 체구가 크지 않은 내게도 희망이 됐다.
또 상대방의 눈을 피하고 가드가 걸핏하면 내려가는 소심함에도 경종을 울려주었다.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는 것. 스스로 내 몸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것이 지금 당장 실전에서 크라브마가 기술을 사용하는 고수가 되지 못하더라도 다니는 이유다.
뭣보다 재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