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괜차나 Sep 28. 2021

소원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Chapter 6. 싸움은 가드 올리기부터

나는 조금씩 내 일상을 되찾아갔다. 약을 먹는 것도 제법 익숙해져 눈 뜨고 잠들기 전 빼먹지 않고 하루 두 번 약을 챙겨 먹었다. 그러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세상의 소음은 잦아들었고 쳐지던 입가는 다시 올라갔다. 모든 게 호르몬의 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렇게라도 좋은 컨디션이 계속되는 것은 다행이었다. 생에 커다란 상처가 지나가는 중이라 느꼈다.


이 무렵 친구와 담양-광주 여행을 떠났다. 사실 가장 어려웠을 때 내 사건을 전 회사 법무담당에게 전해준 인사팀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떠난 건데 여행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먼저 들른 담양 죽녹원에는 중간에 아주 작은 동산이 있었다. 그 동산을 세 바퀴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적혀 있었다. 친구가 열심히 동산을 도는 동안 나는 멍하게 있었다. 소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번 다이어리에 빼곡히 올해, 내년의 계획과 소원을 적곤 했던 내가 소원이 생각나지 않다니.


 “왜 안 돌아?”

 “그게, 소원이 있었는데 없네.”

 “전에 얘기하던 그건?”

 “안 이뤄져도 상관없을 것 같아.”


가볍게 웃으며 동산을 지나갔다. 우리는 그날 광주 무등산 정상에 오르기로 한 일정을 취소하고 입구에 있는 루프탑 카페에서 멋진 노을을 봤다. 뭐든지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해야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오래된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금 있는 곳을 즐기는 것이 가장 편안한 순간이었다.


저녁에는 대학 동기인 친구와 대학시절 에피소드를 밤새도록 얘기하며 추억 여행에 빠졌다. 곤경이라 여겼던 모든 일들이 이렇게 웃으며 떠들 수 있는 일들로 남았다. 추억팔이는 항상 성공하는 장사다. 이상은의 ‘언젠가는’을 무한 반복으로 들으며 마시는 맥주의 맛은 짜릿했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네. 그런데 이제 뒤돌아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그날 밤 나는 충동적으로 대학 동기 모임을 추진하기도 했다. 맥주 3캔을 먹은 상태라 나온 용기지만, 보고싶은 사람들에게 보자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드디어 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이전에는 제주도 여행 중 파티가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가서도 사람들과 어울릴 자신이 없어서 숙소 침대에만 박혀있었다. 정신적인 에너지의 총량이 있다면 일정부분이 다 소진되어서 사교성을 낼 수 없는 상태랄까. 공허하고 부족한 느낌을 많이 받아 새로운 사람을 사귈 여유가 없었다.


그에 반해 이날의 모임 주선은 이랬던 내 마음 속 에너지가 회복기에 들어섰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전 09화 수영 선생님한테 어리광부리지 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