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죄
서부극의 원죄는 낭만화된 시대 묘사 언저리에 존재하는 원주민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탄압이다. 미국 외부에서 이 원죄가 가장 비극적으로 공명하는 장소는 호주가 아닐까. 태고부터 애버리지니라고 불리는 원주민들에 의해 부족화된 사회를 이루고 살아왔지만, 18세기에 영국인을 시작으로 식민지화가 시작되어 원주민들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그들이 가져온 전염병에 의해 고통받으며 말살되었다.
호주 개척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약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2,500명에 가까운 영국/호주군 사망자 대비 최소 40,000명의 원주민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남미 원주민들과 같이 유럽인들이 옮겨온 바이러스로 사망했다. 지금도 애버리지니 호주인으로 집계되는 인구는 약 76만 명으로, 호주 전체의 3%에 불과하다.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은 단순히 전쟁이나 전염병처럼 표면적으로 표출되는 폭력으로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20세기 초반, 호주 정부와 기독교회는 원주민 교화라는 명목으로 애버리지니 호주인들의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탈해 수용소로 보내 가족들과의 교류를 완전히 단절시켰는데, 이 비극적이고 야만적인 인종 및 문화 말살 정책은 심지어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현대 호주 정부는 1910년부터 1970년 사이, 3명 중 약 1명의 애버리지니 아동이 가족들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자랐다고 발표했다.
1980년이 되어서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이 아이들과 원주민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호주국립대학교의 역사 교수인 피터 리드는 이들을 "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이라고 이름 붙이며 정책적 탄압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호주 정부가 이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를 발표하기까지는 그로부터 20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2008년, 호주의 총리인 케빈 러드는 연방 정부를 대표하여 호주의 원주민들을 지구의 가장 오래된 문화로 지정하고, 빼앗긴 세대들과 호주 원주민들에게 사죄 성명을 발표한다.
호주의 야생지역(아웃백)은 역사상 최초 장편 극영화의 산실이라는 기원적인 무대이기도 한데, 부시레인저라고도 불리는 호주의 황야를 기반으로 활동한 무법자 네드 켈리의 삶을 각색한 찰스 테이트 감독의 〈켈리 갱 이야기〉(1906)가 영화 사상 최초로 60분을 넘어가는 상영시간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켈리 갱 이야기〉는 첫 번째 장편 영화이자, 첫 번째 장편 서부극 영화라는 흥미로운 기록을 갖게 된다.
찰스 테이트 감독, 〈켈리 갱 이야기〉 [출처: Australia National Film and Sound Archive]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네드 켈리라는 인물상이다. 그의 부친 존 켈리는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돼지 2마리를 훔친 죄로 체포되어 호주로 추방되었는데, 식민지에 도착해서도 범죄자 출신이자 백인 중에서도 차별적 취급을 받는 아일랜드인 존 켈리는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하였다. 이 원죄는 후대인 네드 켈리의 삶에도 영향을 미쳐, 네드 또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범죄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정치인들과 언론사에 보낸 두 편의 편지를 통해 자신이 왜 범죄를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면서, 불합리한 사회적 제도와 아일랜드인에 대한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을 비난하였고, 이는 네드 켈리를 호주의 의적, 로빈 후드와 같은 아이콘으로 부상시키는 계기가 된다.
25세의 나이에 글렌로완의 한 여관에서 철갑옷을 입고 총을 쏴대는 경찰들을 향해 돌격한 그의 형상은 그가 교수형에서 짧은 삶을 마감한 지 불과 26년이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장편 영화의 주제로 그려진다. 네드 켈리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최식의 퍼레이드에서 가장 먼저 등장했을 정도로 호주라는 국가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장편 영화와 서부극의 시작에는 사회적 약자 계층 출신으로 기득권에 대항하는 의적의 미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서사가 호주의 애버리지니 원주민들의 문화에 대한 성찰 및 그들이 겪고 있는 오랜 부당함에 대한 고발로 이루어지는 데는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영화 사상 처음으로 2명의 애버리지니 배우를 주연으로 기용한 찰스 쇼벨 감독의 〈제다〉(1955)와 같이 간헐적으로 원주민 문화를 대변하려는 시도가 존재했지만, 상업 영화에 애버리지니 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대는 "빼앗긴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70년대부터였다. 영국 출신의 니콜라스 로그 감독은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한 〈워커바웃〉(1971)에서 호주의 야생에 표류하게 된 2명의 백인 소년 소녀와 그들을 돕는 애버리지니 소년의 이야기를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시선으로 그려낸다.
소년(뤽 로그), 소녀(제니 에구터), 〈워커바웃〉 [출처: FILMGRAB]
하지만 빼앗긴 세대와 애버리지니인들이 겪어야 했던 수모를 정면으로 돌파한 영화가 나오기까지는 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를 가장 직관적인 형태로 풀어낸 영화 작품은 호주 정부의 공식 사과와 같은 해에 개봉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오스트레일리아〉(2008)가 아닐까 생각된다. 〈로미오+줄리엣〉(1996), 〈물랑 루즈〉(2001) 두 작품으로 화려한 영상미를 인정받은 루어만 감독은 호주를 대표하는 영화, 호주를 무대로 한 〈오즈의 마법사〉(1939), 그리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를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작, 집필, 감독하였으며, 호주 출신의 A급 배우인 니콜 키드먼과 휴 잭맨을 캐스팅하여 문자 그대로의 대서사극을 연출해냈다. 하지만 인종적 담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는 달리 그의 〈오스트레일리아〉는 애버리지니 원주민들의 고통과 그들의 가슴 아픈 역사, 빼앗긴 세대에 대해 시선을 돌리지 않고, 이야기를 알리려는 사회적 목적성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어만 감독의 영화적 스펙터클에 대한 집착은 진정으로 잔혹한 역사를 알리기에는 너무 환상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만들었다.
애버리지니 원주민의 아픔을 정면으로 돌파한 작품은 약 10년 후에 공개된다. 호주 출신의 감독 제니퍼 켄트는 공포 영화 〈바바둑〉(2014)으로 데뷔하여 입소문을 통한 돌풍을 일으킨 후, 두 번째 작품으로 19세기 초 태스매니아 지방을 무대로 한 반-서부극 〈나이팅게일〉(2018)을 연출하였는데, 여기서는 영화의 기원에 있는 네드 켈리의 정체성과도 같은 아일랜드 출신 무법자와 그녀를 돕는 애버리지니 길잡이의 수라마도 복수극을 다루면서 식민지에서 가장 핍박받으며 살아가던 이들의 삶을 조명한다. 시드니 영화제에서 공개된 이 작품은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연출로 인하여 다수의 관객이 영화 중간에 극장을 떠나기도 했을 정도로 호주의 가슴 아픈 식민지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左) 바즈 루어만 감독, 〈오스트레일리아〉(2008), (右) 제니퍼 켄트 감독, 〈나이팅게일〉(2018) [출처: 네이버 영화]
10년의 간격을 두고 개봉된 두 작품은 고전-서부극과 반-서부극이라는 완전히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지만, 애버리지니 원주민들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 알리려는 사회적 고발의식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교차되는 지역이 있다. 이 지점을 임의로 2010년대 중반부터 유명해진 개념인 '깨어있음(Woke, Wake의 과거형)'이라고 부르고 싶다. 2019년, 〈나이팅게일〉의 개봉 이후 미국의 영화평론가 루크 힉스가 웹진 필름스쿨리젝트에 기고한 에세이 및 영화평론가 제나 워덤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비평 모두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개념을 끌어왔는데, 영화에도 이러한 개념이 유의미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회적 정의와 인종차별에 대한 민감한 시선을 유지한다는 의미인 '깨어남(Wokeness)'은 1930년대, 미국 흑인들의 사회 운동에서 발생한 '깨어있어라(Stay Woke)'라는 구호에서 시작되었는데, 2010년대 중반, 공권력과 흑인 사회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블랙 라이브즈 매터 (Black Lives Matter, BLM)' 운동에서 다시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곧 수많은 상황에서 남용됨으로 오히려 원 의미를 잃은 채, 빠르게 밈(meme)화되었고, 오히려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이들을 놀리기 위해, 또는 너무 대놓고 사회적 메시지를 드러내는 창작물 및 창작자들을 희화하기 위하여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그러나 '깨어있음'의 원 의미부터, 남용 및 희화적 오용으로의 변모는 어쩌면 수정주의-서부극, 반-서부극을 사로잡고 있는 원죄라는 망령과 죄악을 어떻게 작품적으로 접근할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도, 〈오스트레일리아〉의 낙관적 희망과, 〈나이팅게일〉의 비관적 저주 사이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감을 단축하고, 영화 내 역사의식, 그리고 예술성과의 관계에 대해 재고를 돕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MTV 스타일 고전 해석
바즈 루어만 감독 [출처: Variety]
호주 출신의 바즈 루어만 감독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MTV 스타일'의 화려하고 트렌디한 영상 및 편집이 아닐까. 재미있게도,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2000년대 중후반에는 MTV 스타일이란 별도의 설명이 필요가 없는 개념이었는데, 이 글을 집필하는 2020년대 초반에는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키워드가 되어 버렸다. 아마, '유튜브 스타일'이라고 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수도 있지만, 이렇게 말할 경우 'MTV 스타일'이 가진 영상 역사적 문맥이 퇴색되어 버린다.
다큐멘터리 〈커팅 엣지: 영화 편집의 마술〉(2004)에서 로렌스 캐스단 감독은 1980-90년대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케이블 채널인 MTV, 즉 뮤직비디오와 음악방송의 빠른 편집과 30초 광고를 보고 자란 이들은 영상 정보 흡수 능력이 이전 세대보다 뛰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더욱 짧은 숏을 요구한다고 해석한다. 음악 전문 방송 채널이었던 MTV는 정규 방송 외에는 하루 종일 뮤직비디오를 상영하였는데, MTV의 인기가 가장 높았던 1980년대의 디스코, 그리고 1990년대, 펑크 록과 힙합 음악에 영향을 받은 팝 음악은 이전 세대의 음악에 비해 높은 BPM 및, 그에 어울리는 빠른 숏이 연쇄하는 뮤직비디오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바즈 루어만 감독은 첫 작품 〈댄싱 히어로〉(1992)부터 이러한 MTV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영상미를 선보였으며, 차기작인 〈로미오+줄리엣〉에서는 원작이 가진 태생적 고루함을 긴박한 편집과 도발적인 카메라 워킹을 통해 타파하여,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국제적 스타로 등극시키고, 박스오피스에서만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셰익스피어 원작 영화 중 손꼽히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차기작으로 다시 한번 무대와 공연을 기반으로 한 〈물랑 루즈〉(2001)를 공개하며 다시 한번 대호평을 받아, 기어이 《레드 커튼 3부작 (Red Curtain Trilogy)》을 완성시키고 말았다.
바즈 루어만 감독, 〈댄싱 히어로〉, 〈로미오+줄리엣〉, 〈물랑 루즈〉 [출처: ANFSA, Rotten Tomatoes, IMPAwards]
《레드 커튼 3부작》에서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뾰족하게 삐져나오는 루어만 감독의 특색이 있다면, 짧은 숏을 사용한 편집, 현란한 색채의 조화를 통한 고전의 지루함에 대한 도전과, 영화의 심미성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다. 이는 물론 호흡이 길거나 차분한 영화를 선호하는 관객과 평론가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특색이며,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물랑 루즈〉를 평하며 "이 영화는 에로틱한 만남 직전에 과열된 상상력이 만들어낸 스냅사진처럼 구성되어 있다"라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버트는 "나는 보통 수많은 컷들로 이루어져 마치 영화가 선풍기 앞에서 상영되는 듯한 효과를 구사하는 감독들을 참을 수 없지만 루어만과 이 주제의 경우 올바른 접근이라고 보인다"라고 변호하면서 루어만 감독 특유의 MTV 스타일을 옹호하였다.
결국, 특색이 강한 스타일도, 주제와 잘 결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루어만 감독의 《레드 커튼 3부작》이 공통적으로 가진 키워드인 '무대'와 '공연'은 그의 열병과도 같은 영상미학과 결합해,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1490-1510)을 연상케 하는 기이하면서도 에로틱하고, 경박하면서도 순수한 미적 사유에 도달한다.
그래서인지, 작품 간격이 긴 과작 성향을 보이는 루어만 감독의 차기작인 〈오스트레일리아〉가 공개되었을 때, 그의 《레드 커튼 3부작》을 기대하던 관객들은 몹시 당혹스러워했다. 호주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들이 모여 만들어낸 이 작품은 세 시간에 가까운, 165분이라는 상영시간과 함께 마치 고전 할리우드의 서부극과 판타지, 영화가 시작되는 1939년 개봉한 빅터 플레밍 감독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감독의 또 다른 대작 〈오즈의 마법사〉를 연상케 하는 호흡으로 연출되었다. 또한, 영화의 내용은 영화가 개봉된 2008년 2월에 호주 정부에서 발표한 기념비적인 사과 성명, 호주의 원주민들에 대한 사죄의 내용을 인지하는 듯한 서사로 사회적 메시지 또한 함유하고 있었다. 트렌디한 사극을 원했던 관객들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루어만 감독의 작품군 중 가장 하위에 두지 않을까.
하지만 영상이 아니라 서사적인 측면에서 루어만 감독의 작품군이 간직하는 가장 큰 특징은, 냉소적인 면모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낭만적이고 순수한 인물들의 행동 양식과 목적이다. 이는 현란한 색채와 리듬으로 구성된 영상의 반대편에서, 그의 영화에 고전적인 면모를 부여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낭만극을 원작으로,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야심만만하게 그대로 사용한 〈로미오+줄리엣〉은 차치하더라도, 〈물랑 루즈〉의 매력이 현대적인 영상에 대비되는 클래식한 서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이들은 없으리라.
〈오스트레일리아〉는 인종적 갈등과 오욕의 역사를 가감 없이 공개하되, 그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순수(innocent)하고, 그와 분리된 의미로 순진(naïve)한 접근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접근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는 바즈 루어만 감독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던 서사의 근간인 고전적 낭만주의의 연장선이기도 하지만, 그가 견지하는 예술의 목적성에 대한 낙관주의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현세의 오즈에서
세라 애슐리(니콜 키드먼), 드로버(휴 잭맨), 〈오스트레일리아〉 [출처: Fanpop]
〈오스트레일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임박한 1939년, 영국의 귀부인 세라 애슐리(니콜 키드먼)가 호주 서북부의 아웃백에 파러웨이 다운이라는 목장을 짓고, 일확천금을 위해 돈을 펑펑 쓰고 있는 남편을 말리기 위하여 덜컥 호주로 출발하며 시작된다. 그녀는 도착한 후 본명을 밝히지 않고 '드로버'(호주의 카우보이로 소를 움직이는 드라이버의 방언)라고 불리는 사내(휴 잭맨)의 안내로 고생 끝에 파러웨이 다운에 도착하지만 남편과 상봉하기 직전 그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지불식간에 1,500마리의 소와 스러져가는 목장, 그리고 목장에서 일하는 애버리지니 고용인들과 남겨진 애슐리 부인은 드로버의 도움을 얻어 목장을 재건한다. 지역의 경찰은 남편의 살해범이 '킹 조지'라고 불리는 애버리지니 노인(데이비드 걸필리)이라고 주장하지만, 농장에서 일하는 원주민-백인 혼혈 소년인 눌라(브랜든 월터스)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킹 조지가 살인범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작고한 남편 사이에 자식이 없었던 애슐리 부인은 눌라를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면서 호주 개척지의 삶과 원주민 문화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녀는 1,500마리의 소를 처분하기 위해 드로버의 도움을 얻어 죽은 남편의 라이벌이었던 레즐리 '킹' 카니(브라이언 브라운)와 경쟁하면서 호주 서북부 야생지를 소떼를 몰아 가로지르는 모험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드로버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 애슐리 부인은 눌라를 키우면서 행복을 느끼지만, 2년 후 눌라는 모든 애버리지니 청년이 성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워커바웃(Walkabout)을 나서려 하면서 애슐리 부인의 행복한 삶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눌라는 워커바웃을 떠나기 전, 애버리지니 어린이 분리 정책에 의해 강제로 납치되어 먼 섬으로 이송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호주 본토에도 폭격을 시작하면서 애슐리 부인, 드로버, 눌라 세 명의 운명,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킹 조지, 레즐리 카니의 후계자인 닐 플레처(데이비드 웬햄)의 운명은 거대한 역사의 파도에 휩싸이게 된다.
호주의 광활한 야생에서 살아가는 연인,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가로지르는 전쟁이라는 서사적 특징은 바즈 루어만 감독이 이 작품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한 호주의 응답이자, 호주의 고전-서부극으로 연출했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1,500마리의 소를 몰아가며 호주의 야생을 종횡무진하는 전반부에서 무척 명확히 밝혀진다.
드로버(휴 잭맨), 〈오스트레일리아〉 [출처: Fanpop]
당시 호주를 대표하는 할리우드의 남녀 배우를 캐스팅했다고 하지만, 젊은 시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연상케 하는 외모를 가진 휴 잭맨과, 호주가 아니라 현대 할리우드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을 만큼 고전적인 미인에 선정되는 니콜 키드먼의 외모는 이 영화에 황금기(golden age)와 같은 감상을 더하는데 더없이 큰 동력으로 작용한다. 특히 이 영화의 원톱 주인공인 니콜 키드먼은 이미 5년 전,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콜드 마운틴〉(2003)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오랜 할리우드 서부극을 이끌어갔던 경험을 백분 사용해, 그녀가 연기하는 모든 장면에 클래식한 테크니컬러 감성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배우의 외모와는 별개로, 연출적으로도 영화에는 고전성이 살아있다. 단적으로 세라 애슐리 부인을 맞이하기 위해 드로버가 처음 등장하는 살룬 시퀀스를 살펴보자면 바즈 루어만 감독이 할리우드의 서부극을 어떻게 오마쥬 하였는지 포착할 수 있다. 살룬에 입장한 그를 보고 카니 수하의 카우보이가 그를 원주민 애호가(boong lover)라고 놀리자 드로버는 바로 그에게 주먹을 날려 날려버리고, 처음으로 그의 얼굴이 보이는 숏은 그의 눈과 모자의 클로즈업으로,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스파게티 웨스턴, "달러 3부작"에서 인물이 처음 소개될 때 사용된, 얼굴의 모든 주름을 세세히 보여주는 클로즈업과 몹시 닮아 있다. 심지어 휴 잭맨의 눈가가 《달러 3부작》 중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눈매와 지극히 흡사하다는 점도 의도된 바가 아닐까.
드로버(휴 잭맨), 〈오스트레일리아〉 [출처: Fanpop]
경쾌한 배경음악과 경박함이 느껴질 정도로 웃음을 자아내는 주먹 다툼은 존 웨인과 랜돌프 스콧 사이에 벌어지는 〈약탈자〉(1942)의 살룬 주먹싸움이 연상된다. 물론, 이 모든 시퀀스가 루어만 감독 특유의 'MTV 스타일'을 상징하는 짧은 숏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그가 추구해온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고전을 완성한다.
할리우드의 서부극과 연결되는 풍경에 있어서는 파러웨이 다운의 배경, 킹 조지가 딸과 손자를 지켜보는 계곡 꼭대기와 존 포드 감독의 서부극을 상징하는 콜로라도의 모뉴먼트 밸리와의 흡사성을 꼽을 수 있다. 모뉴먼트 밸리가 서부극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할리우드식 서부극에 대한 루어만 감독의 응답이자, 장편 영화의 기원이 되었던 호주의 아웃백에게 바치는 헌정사와도 같이 느껴진다.
(左) 존 포드 감독, 〈황야의 결투〉(1948), (右) 바즈 루어만 감독, 〈오스트레일리아〉 [출처: CBS News, Fanpop]
〈오스트레일리아〉는 단순히 서부극에 대한 오마쥬 및 응답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영화의 시작인 1939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함께 할리우드 영화 역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오즈의 마법사〉가 개봉한 연도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위시한 서부극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면, 〈오즈의 마법사〉는 더욱 직접적으로 영화의 서사에 개입하고 있다. 애슐리 부인은 눌라를 위로해주기 위해 주디 갈랜드가 연기한 도로시가 작중에서 부르는 노래,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가르쳐주고, 영화 후반부에 눌라는 호주에서도 개봉한 〈오즈의 마법사〉를 관람하기도 한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오즈는 당연히 마법적인 세계를 의미하고 있는데, 호주의 영미식 표기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첫 두 글자인 "오스"와 "오즈"는 영어에서는 거의 비슷한 형태로 발음이 된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라는, 거대한 대륙과도 같은 섬에 대한 낭만적이고 환상에 가까운 연출과 함께 루어만 감독의 고향에 대한 애정의 표출 및, 영화에서 연출되는 애버리지니 원주민들의 마술과도 같은 힘에 대한 비유로 사용된다. 영화의 전반부 종료를 알리는 씬에서는 엄청난 비를 맞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애슐리 부인과 드로버의 모습과 〈오즈의 마법사〉를 관람하는 눌라의 모습이 교차된다. 여기서 눌라는 〈오즈의 마법사〉의 종반, 선한 마녀 글린다가 도로시에게 "너는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갈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알려주는 장면을 보면서 자신의 귀향, 즉 원주민들이 야생으로 돌아가는 "워커바웃"을 결심하게 된다.
〈오즈의 마법사〉를 관람하는 눌라(브랜든 월터스), 〈오스트레일리아〉 [출처: Fanpop]
만약 고전 할리우드의 영화 작법이나, 계보에 대해 익숙한 관객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감상한다면 이 영화는 다분히 우악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고전극을 욱여넣어 그에 대한 호주의 응답이라는 형태로 풀어낸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이유는 신파 사이에 느껴지는 고향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애버리지니 원주민들에 대한 사과와 대우에 진심이 느껴진다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감상은 애버리지니 원주민이 아니며, 호주를 방문조차 해본 적이 없는 관객에게는 인상비평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작품이 개봉한 후, 호주국립대학교의 원주민 역사를 전공으로 하는 두 역사학자인 마리아 뉴젠트와 시노 코니시는 이 작품이 "애버리지니 민족의 경험과 넓은 범위를 놀라울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표현했다" 평가하고, "메인스트림, 블록버스터 대서사극이 이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애버리지니 역사를 접근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평하면서, 호주 국립박물관 주재로 〈오스트레일리아〉와 작품에 표현된 애버리지니 역사에 대한 학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결국 이 또한 메타비평으로 수렴하지만, 적어도 호주를 대표하는 애버리지니 역사 전문가들이 이 작품의 역사 감수성에 대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그에 대해 공적인 지면을 빌어 발표를 했다는 사실을 보자면 루어만 감독의 희망찬 접근의 순수성이 인정받았다는 점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연출적 면에서 〈오스트레일리아〉는 분명히 삐걱거리는 부분이 존재한다. 루어만 감독은 분명히 오래된 할리우드 영화의 호흡을 추구하고 있지만, 액션 씬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의 야생을 뚫고 가는 여정을 담은 1막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담은 2막 사이의 빗 속 갈라와 같이 화려함이 극대화된 시퀀스 중 본인만의 속사포 같은 숏 연사를 포기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이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달리 보자면, 165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이 어정쩡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존재한다. 서부극과 전쟁영화라는 두 개의 짧은 장르 영화를 억지로 붙여 넣은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이러한 감상이 더욱 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감독과 상영시간을 줄이려 했던 배급사간 타협의 흔적인지, 아니면 감독의 온전한 의도인지 알 수는 없다. 적어도 버라이어티의 보도에 따르자면 루어만 감독은 이 작품에서 최종 편집권(final cut privilege)을 쥐고 있었으며, 그에 따른 세계적 흥행의 실패로 인하여 배급을 담당한 20세기 폭스와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바즈 루어만 감독이 보여왔던 연출 성향을 감안하면, 165분이라는 상영시간은 2시간 안팎의 현대적 대서사극과 3시간이 넘어가는 고전 대서사극 사이에서 감독이 고민한 결과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이는 주연배우 3인을 제외한 등장인물에 대해 관객이 충분히 공감할 수 없다는 약점으로 이어지게 된다. 영화의 1막과 2막에서는 각각 주인공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돕는 조연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술에 절어 살아가던 파러웨이 다운의 회계사 키플링 플린(잭 톰슨)과 드로버의 친우인 마가리(데이빗 응굼부자라)의 희생정신은 루어만 감독이 원하는 비극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영화에서 애슐리 부인-드로버의 숙적을 맡고 있는 플레처는 파리를 실로 묶어 죽이는 등의 사이코패스와 같은 면모를 보이지만, 1막과 2막 내내 관객은 그를 동정해야 하는지, 미워해야 하는지, 두려워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주인공 3인을 제외한 이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어렵다는 난점은 단순히 영화 호흡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즈의 마법사〉를 적극적으로 오마쥬 하고, '오스'트레일리아와 오즈 간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루어만 감독이 그려내는 1940년대의 호주의 도심, 다윈과 야생지에는 마법적 기운이 드리워진다. 영화 전반에 드리워진 환상동화적인 필터가 이 서사와 등장인물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실제의 역사를 살아갔던 인물들이 아닌 어떠한 우화적 존재로 변모시키고 있다.
여기서 눌라의 할아버지이자 영화 내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초월적인 인지를 보이는 애버리지니 노인, '킹 조지'의 존재 또한 서사에서 논리적 비약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들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앞에서 논한 바대로 이는 감독의 의도이며, 의도가 적어도 영상미학적으로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 보이기 때문에 개연성의 부재 운운할 지점은 아니다. 다만 영화의 주제의식이라는 면에서 "빼앗긴 세대"라는, 실제 역사에 존재했던 가혹한 비극과 해결점을 제시하는 킹 조지의 마술적인 인물상이 양립하기 어려운 기호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물론 〈오스트레일리아〉는 실제 애버리지니 원주민의 자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애버리지니 역사를 다루는 학계에서도 호평을 받은 작품이었지만 작품을 온전한 하나의 영화로만 바라본다면 서사적 일면에서 킹 조지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쉽거나 심지어는 게으른 핑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비극이 마법적으로 해결되리라는 안일한 메시지로 귀결된다.
'킹 조지'(브라이언 브라운), 눌라(브랜든 월터스), 〈오스트레일리아〉 [출처: Fanpop]
그러나 적어도 〈오스트레일리아〉를 감상하는 순간에는 이 작품이 전하려는 서사가 게으르다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는 색채가 아우성치는 화려한 영상과 환상동화와도 같은 감각, 혼을 빼놓는 연출 사이에서도 루어만 감독의 역사적 진실에 대한 '깨어있음' 추구가 순수하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2008년, 호주 정부의 사과를 보면서, 루어만 감독은 고향의 역사를 사로잡았던 어두운 과거를 감추던 커튼이 들춰지고, 정말로 오스트레일리아라는 국가가 마술과 같이 하나의 자아로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피워냈다.
제니퍼 켄트, 환상을 통해 마주하는 현실
제니퍼 켄트 감독 [출처: The Cut]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감독 제니퍼 켄트 또한 바즈 루어만과 같이 '환상'에 가까운 필터를 드리워 고향의 풍경을 연출해낸다. 하지만 그녀의 렌즈에는 루어만의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시선과는 반대되는, 고딕 호러적인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켄트 감독은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통 인간에게 가장 현실적으로 공포스럽게 다가올 수 있는 고통을 잔혹한 환상동화처럼 연출해낸다.
커리어 초기에 배우로 호주 영화계에 입문하였으나 배우의 길에 흥미를 잃고 방황하던 제니퍼 켄트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2001)를 보고 감명받아 그에게 연출을 배우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다. 트리에 감독은 그녀의 요청을 수락하고, 켄트는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한 〈도그빌〉(2003)에서 제작 보조(PA)로 일하면서 트리에 감독에게 영화 제작과 연출을 사사한다. 그리고 2년 후에는 본인이 직접 감독한 단편 호러 영화 〈몬스터〉(2005)를 발표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10년이 지난 후, 그녀의 장편 영화 첫 작품인 〈바바둑〉의 원작이 되기도 한다.
호주의 TV 드라마 연출을 몇 편 담당했지만 눈에 띄는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던 켄트 감독은 자신의 첫 단편 영화를 장편으로 각색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2014년 개봉한 인디 호러인 〈바바둑〉은 촬영에 돌입하기 전 필요한 만큼의 제작비를 유치하지 못해 제작자였던 크리스티나 세이튼은 킥스타터에서 크라우드펀딩 캠페인을 열기도 했다. 3만 달러를 목표로 했던 이 캠페인은 총 30,071달러를 모금하면서 세트장 건축에 도움을 주게 된다.
2014년 5월, 호주에서 먼저 개봉한 〈바바둑〉은 호주 내에서는 큰 흥행을 하지 못했지만, 미국에서는 첫 개봉 당시 단 3개의 영화관에서 제한 개봉되었다가, 관객들의 입소문과 평론가들, 동료 영화인들의 극찬에 힘입어 흥행에 성공했고, 박스오피스에서 제작비의 5배가 넘는 수익을 벌어들인다.
남편과 사별하고 6살 된 아들 새뮤얼(노아 와이즈먼)을 홀로 키우는 아멜리아 바넥(에시 데이비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행동장애를 가진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심적 고통을, 초자연적인 존재의 저주를 끌어와 공포영화적인 문법으로 연출해내 큰 호평을 받았다. 켄트 감독은 자녀의 말썽이 마치 악령에 씐 결과가 아닐까 미약한 의심을 해본 부모의 모습, 그리고 그런 자녀를 대하는 본인의 끔찍한 마음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부모의 모습 등, 육아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자아내는 원초적인 공포를 놀랄 만큼 원숙하고 세련된 장르 영화로 구현해냈다.
아멜리아(에시 데이비스), 새뮤얼(노아 와이즈먼), 〈바바둑〉 [출처: FILMGRAB]
흥미롭게도, 제니퍼 켄트 감독 본인은 이 이야기를 자신이 아니라 홀로 자녀를 키우는 친구에게서 비슷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켄트 감독 본인은 무자녀로 보이지만, 모친과 자녀 간의 관계와 모성애라는 키워드는 차기작인 〈나이팅게일〉에서도 이어진다.
〈바바둑〉의 성공 이후, 켄트 감독은, 다양한 인터뷰에 따르자면, 현대 사회의 폭력성, 특히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고, 대대로 이어지는 폭력을 끊는 방법에 대해 고심해왔다. 〈바바둑〉을 〈인시디어스〉(2010)나 〈컨저링〉(2013)과 같은 공포영화 프랜차이즈로 발전시키자는 수많은 제안을 뿌리치고, 그녀는 1820년의 호주 남부의 섬 태즈메이니아를 배경으로 한 역사극 제작에 돌입한다. 켄트 감독은 〈나이팅게일〉에서 19세기 초반의 황무지에서, 여성, 범죄자, 이민자가 겪는 인간 이하 수준의 차별과, 영국의 식민정책 때문에 문화적 정체성이 몰살당한 애버리지니 원주민의 고통을 함께 다루기로 결정한다. 켄트 감독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의 철두철미한 자문 및 지독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폭력을 생생하게 묘사해낸 연출에서 연기자를 보호하기 위해 전문 심리치료사를 촬영 현장에 상주시켜 가면서 영화를 완성해냈다.
〈나이팅게일〉은 시드니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마치 가스파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2002)을 연상시키는 악몽과도 같은 성폭력 묘사로 인해 논란을 일으켰다. 2018년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한 이탈리아 평론가가 영화 크레딧에 켄트 감독의 이름이 나오자 "부끄러운 줄 알아라, 창녀야, 구역질이 난다"라며 큰 소리로 욕을 했던 사건 또한 기사화되었고, 추후 평론가는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이 성차별적인 욕설은 켄트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 출품작품의 연출가 중 유일한 여성 감독이었다는 사실 또한 재조명하게 된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을 역사적으로 차별받아왔던 소수자들에 대한 폭력을 피해자들의 시선에서 담아낸 사회고발적 영화, 또는 그러한 고발적 메시지에 함몰된 미완의 작품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함이 느껴진다. 물론 이제 두 번째 작품을 발표한 젊은 감독이지만, 켄트 감독이 공포 영화, 그리고 서부극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가져와 인간이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연출하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론에는 루어만 감독과는 또 다른 형태로 낙관적인, 혹은 단어가 와닿지 않는다면, 인간에 대한 연민 어리고 따뜻한 시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불멸의 새여!
클레어(아이슬링 프란시오시), 빌리(베이칼리 가남바르), 〈나이팅게일〉 [출처: FILMGRAB]
사실을 고하자면, 대부분 영화 비평을 위해서는 씬과 숏 분석을 위한 다회차 관람을 해왔는데, 〈나이팅게일〉은 〈친애하는 재커리〉(2008) 이후 처음으로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재관람이 불가능하리라는 확신이 든 작품이었다. 때문에 본 비평에서는 세밀한 연출 분석보다는, 영화의 서사적 흐름이나 사회적 배경에 대한 논의를 목표로 한다.
[주의: 작품 내 여성, 영유아, 원주민을 대상으로 연출되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호주가 아직 영국에서 독립을 하기 전인 1825년, 호주 최남단에 위치한 섬 태즈메이니아를 배경으로,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경범죄로 체포되어 추방당한 귀양 죄수 클레어 캐롤(아이슬링 프란시오시)의 비극적인 삶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7년의 귀양살이 끝에, 복역 와중 같은 처지에 있던 에이든 캐럴(마이클 쉬즈비)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기까지 가진 클레어지만, 그녀의 간수 영국군 중위 호킨스(샘 클라플린)는 그녀에게 자유, 즉 통행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호킨스는 군인들의 행사가 열릴 때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일랜드 민요를 부르는 클레어에게 공연을 시키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면, 통행권 발행을 미끼로 클레어를 강간한다.
호킨스 (샘 클라플린), 〈나이팅게일〉 [출처: FILMGRAB]
이러한 아내의 사정은 꿈에도 모른 채, 통행권을 받지 못하는 클레어가 답답해진 에이든은 호킨스를 직접 찾아가 그녀의 통행권을 요구하지만, 고압적인 태도로 나오는 호킨스 때문에 곧 대화가 험악해진다. 그런데 부대를 감찰하기 위해 파견을 나와있던 호킨스의 상사 굿윈 대위(이웬 레슬리)가 이 광경을 보게 되는데, 감찰 기간 내내 기강이 해이해진 부대의 광경에 아연실색해하던 굿윈 대위는 복역 죄수들에게도 존경받지 못하는 호킨스에게 진급 추천장 써주기를 거부한다.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호킨스는 두 명의 부하를 데리고 한밤중에 에이든과 클레어를 방문해 에이든을 제압하고 남편이 보는 앞에서 클레어를 또다시 강간한 후, 자신에게 덤벼드는 에이든을 총으로 살해한다. 심지어 이후에는 자신의 부하인 루즈(데이먼 헤리먼)에게도 클레어를 강간하도록 지시하고, 옆에서 일어나는 폭력 때문에 클레어의 아기가 울음을 멈추지 않자, 다른 부하인 야고(해리 그린우드)에게 아기를 조용히 시키라고 명령한다. 루즈보다는 순박한 성격의 야고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호킨스의 협박에 못 이겨 아기를 벽에 던져서 죽이게 된다. 클레어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진 잔혹한 비극에 공황상태에 빠지고, 루즈가 강간을 끝내자 호킨스는 야고에게 클레어를 죽이라고 윽박지른다. 야고는 총의 개머리판으로 클레어의 머리를 내리쳐 그녀를 기절시킨다. 세 명의 영국 군인은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범죄 현장에서 도망간다.
호킨스는 잔악무도한 행위가 벌어진 그녀의 집을 뒤로하고, 직접 굿윈이 아닌 상사에게 진급을 요구하기 위해 군대의 사령부가 위치한 론스톤을 향해 떠난다. 다음날 아침, 정신을 되찾은 클레어는 참극의 현장에서 호킨스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그의 뒤를 쫓는다. 그녀를 걱정하는 다른 아일랜드 동료들의 추천으로 원주민 길잡이, 빌리(베이칼리 가남바르)를 고용한 클레어는 태즈메이니아의 혹독한 야생을 가로질러 매일 밤 자신을 찾아오는 남편과 아기의 환영에 시달리며 호킨스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실제로 관람하는 경험만큼이나, 글로 요약하는 작업도 참혹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나이팅게일〉의 복수극은 주인공 클레어를 극한의 고통에 몰아넣고 시작된다. 고문에 가까운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최대한 건조하게 담아낸 연출은 관객을 클레어와 같은 아노미 상태로 만들며,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이후 벌어지는 그녀의 복수 여정은 그녀를 응원하는 마음, 불의를 용서하지 못하는 통쾌함보다는 떨칠 수 없는 피로감에 젖어 수동적으로 따라가게 되는 기분이 든다. 영화 관람 후, 촬영장에 심리치료사가 상주해있었다는 비화를 듣고 (피해자를 연기한 배우들만큼이나, 가해자를 연기한 배우를 위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는 사실이 클레어가 처한 지독한 상황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나이팅게일〉을 보통의 복수극과 차별화시키는 요소는 잔혹한 설정이나, 사건을 담담하게 비추는 연출 만은 아니다. 켄트 감독은 시스템적인 차별과 폭력의 대상을 이민자 출신의 백인 여성 클레어에 국한하지 않고, 원주민 남성 빌리로 확장시키고, 다른 백인 남성들에게 차별을 당한 클레어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원주민인 빌리를 만나자마자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묘사가 흥미로운 이유는 빌리를 향한 클레어의 호전적인 태도가 단순한 인종 차별적인 이유로만 시작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클레어의 태도에는 대부분의 백인이 가진 원주민, 또는 피부색이 어두운 인종 전반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감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남성들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한 이후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로, 아무도 없는 야생의 한 복판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오히려 더욱 사납고 가시 돋친 태도로 빌리를 대한다.
다시 보자면, 영화에는 절대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세 명의 군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악행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들이 자행하는 폭력이 대상을 또 다른 폭력 가해자로 변모시킨다는 사실이다. 클레어와 빌리의 여정을 따라가는 관객이 서서히 이러한 자각을 가지게 되면서, 하나의 질문이 고개를 든다. 과연 클레어의 복수가 어떠한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 복수 또한 사슬처럼 또 다른 복수로 이어지리라는 무력감이 영화와 관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호주의 야생에서 그녀를 퉁명스럽지만 신사적으로 대하는 빌리의 모습에 클레어는 점점 마음을 열게 되고, 빌리는 어느 날 자신의 본명은 망가나이며, 이는 태즈메이니아에 살고 있는 검은 앵무새를 의미한다고 알려준다. 그는 앵무새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면서 클레어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기쁜 듯한 감정을 보인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고, 노래를 통해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달래 왔던 클레어지만, 미성으로 인하여 자신의 고통이 시작되었음을 인지하고 있는 클레어는 복잡한 감정으로 빌리를 바라본다. 나이팅게일로 태어나 노래로 인해 자아를 유린당하고 자아로 살아가는 생존권 행사마저 공포에 사로잡힌 아일랜드 여성. 검은 앵무새로 태어났지만 타인에 의해 원하지 않았던 이름으로 불려 가며 자신의 자아의 인정 및 수용조차 거부당하는 애버리지니 남성. 관객이 두 주인공이 태즈메이니아라는 섬에 갇혀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순간, 어떠한 형태의 현실적 결말도 이들의 고통을 위로해줄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빌리(베이칼리 가남바르), 〈나이팅게일〉 [출처: FILMGRAB]
하지만, 이 둘보다 더 가혹한 운명을 겪은 인물은 호킨스 일행이 론스톤으로 향하며 포로로 사로잡은 애버리지니 여성, 로완나(마그놀리아 마이무루)다. 그녀는 산지에서 루즈에게 납치되어 끌려오게 되고, 호킨스와 루즈는 말도 통하지 않는 그녀를 성욕을 분출하기 위한 노예로 사용하기 위해 여정에 끌고 다닌다. 결국 그녀의 남편과 부족민들이 로완나를 찾아오지만, 호킨스는 위기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그녀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도망간다.
여기서 문득 켄트 감독이 이 3명의 군인들을 왜 이 정도로 악한으로 묘사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한다. 하지만, 영화를 관람하다 보면, 이 3명의 군인이 특별히 악독하거나,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 않는다는 감상이 든다. 오해가 없기 위해 다시 설명하자면, 이들의 행위는 분명 객관적으로 볼 때, 심지어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악랄하지만, 이들의 행위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특별히 악랄한 연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이 해석을 위한 비교대상을 들어보자면, 〈나이팅게일〉 이전 해 개봉한 테일러 쉐리던 감독의 〈윈드 리버〉(2017)에서는 본 작품과 유사한 서사가 등장하는데, 상황에서 폭력을 자행하는 성폭행 가해자의 우두머리 피트(제임스 조던)는 연출과 연기 양면에서 관객의 미움을 집중시키기 위해 조형된, 현실을 뛰어넘은 악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나이팅게일〉의 가해자 3인 중 호킨스와 루즈는 악을 위한 인위적 조형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지점이 그들의 악행을 더욱 소름 돋게 만드는 부분일 수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폭력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들은 차별과 비판이 당연시 벌어졌던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며, 동등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없을 때, 타인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얼마나 자연스럽게 폭력이 행해졌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인상이 아니라, 구조적 비판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클레어, 빌리, 호킨스라는 인물 모두 한 명의 살아 숨 쉬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인간 사회 전체가 포괄적으로 감상하는 극도로 충격적인 사건을 인위적으로 터뜨리기 위해 배치된 세트피스로 느껴진다는 감상이다. 본 작품에 대한 비판은 충격적인 폭력성만큼이나, 폭력성의 당위성, 또는 억지성에 대한 반발을 포함한다. 이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의견이라고 여겨진다.
즉, 사회고발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가상의 서사와 인물을 조형해 그들을 이렇게 고통에 몰아넣는다면, 창작자의 의도가 순수하더라도 방법론에 있어서는 어떤 불편함이 느껴진다. 만약 이러한 감상이 들었다면 영화의 후반부, 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빌리를 테이블로 초대하는 백인 노인의 존재는 그야말로 백인 구세주(white savior), 모든 백인이 다 악인은 아니었다는, 우악스럽게 구겨 넣어진 변명으로 보인다.
클레어와 빌리를 돕는 노부부, 〈나이팅게일〉 [출처: FILMGRAB]
이는 픽션을 사용하여 사회고발적인 목적성을 가진 영화가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딜레마 중 하나이다. 어차피 현실에는 소설을 우습게 만들 만큼 충격적인 실화들이 존재하는데, 굳이 픽션을 사용하면서 (개인적 인간의 반대편에 존재한다는 의미의)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는다면, 미심쩍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깨어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중압감에 영화적, 또는 서사적 완성도가 희생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다.
다만 켄트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배우들의 감정선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나이팅게일〉의 촬영 순서를 최대한 서사의 흐름에 맞추었다고 밝혔는데, 이 장면에서 감사가 아니라, 분노와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망가나의 모습을 보면, 결코 이 장면이 백인을 위한 변명이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의 분노는 한 명의 선한 백인이 위로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잊히기 쉽지만, 〈나이팅게일〉은 1.37:1이라는, 고전 영화에 가까운 화면비를 사용해, 태즈메이니아 지역의 가혹하면서도 서정적인 풍광을 담고 있다. 서사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의 미학은 영화의 마지막, 해변을 바라보며, 새로 돌아가는 클레어와 망가나의 모습에서 극대화된다. 그리고 이 결말 때문에, 〈나이팅게일〉은 '깨어있음'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동떨어진 위치에서 원죄를 다루고 있지만, 루어만 감독의 〈오스트레일리아〉와 켄트 감독의 〈나이팅게일〉은 유사한 낙관성을 보이고 있다. 두 감독 모두, 이 비극의 해결방안을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땅이 가진 주술적인 회복의 힘에 설명할 수 없는 낙관적인 희망을 품는다.
클레어(아이슬링 프란시오시), 〈나이팅게일〉 [출처: FILMGRAB]
클레어가 석양을 바라보며 부르는 아일랜드 민요, 그리고 흑조로 돌아간 망가나의 모습은 불현듯 존 키츠의 「나이팅게일에게」라는 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대는 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불멸의 새여!
어떠한 굶주린 세대도 너를 짓밟지는 못할 테니-
지나가는 밤 내게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태고의 황제와 농부 모두가 함께 들었을 테니.
클레어가 노래 부르는 새, 나이팅게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폭력을 끊기 위해 비폭력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복수는 더욱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자아의 인정 및 수용이었다. 복수에 있어서 빌리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선택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은 아니다. 그리고 옳은 선택, 또는 우리가 희화해버린 의미의 21세기 기준 '깨어있는' 선택은 더욱 아니다. 1825년, 상상도 못 할 만큼의 비극을 경험한 아일랜드 출신의 태즈메이니아 여성, 클레어의 선택이다.
마침
직접적으로 탄압되고 찬탈되는 수난을 겪었고, 피해자들이 아직 생존해있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고난의 시절을 다룬 대중 예술작품은 몹시 조심스럽게 제작되고, 정치적 해석과 정면충돌하게 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사회는 일제 강점기, 위안부, 6.25 전쟁을 다룬 작품들에 대해 몹시 불편해하고,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거나, 그에 대한 작품적 논의 자체가 불가해지기도 한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글과 영화 작품만으로 애버리지니 원주민들, 혹은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들이 느끼는 상실감을 완벽하게 공감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판단된다. 다만,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상처가 가득한 과거를 마주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을지언정, 그에 대한 접근이 불편하고 어렵더라도 과거에서 눈을 돌리는 행위는 완벽한 오답이라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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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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