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블랙클랜스맨〉과 블랙스플로이테이션 - 착취와 차용
필립 지머맨(애덤 드라이버), 론 스톨워스(존 데이비드 워싱턴), 〈블랙클랜스맨〉(2018) [출처: FILMGRAB]
스파이크 리 감독의 〈블랙클랜스맨〉(2018)은 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작품들을 서사의 전면에 직·간접적으로 배치해 전개한다. 영화의 오프닝은 빅터 플레밍 감독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서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연합군의 병사들이 부상당해 누워있는 거리를 황망하게 거니는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의 모습에서 줌아웃하면서, 찢긴 채로 흔들리는 연합군 깃발을 담는 씬을 그대로 영화에 가져온다.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주인공 론 스톨워스(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첫 잠입 임무에서는, 콰메 투레(코리 호킨스)로 개명한 흑표당 출신 흑인 인권운동가 스토클리 카마이클의 연설을 통해, 어린 시절 〈타잔〉 시리즈를 관람하면서 순진하게 흑인 원주민과 싸우는 백인 영웅을 응원하게 만들었던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암시된다.
론은 잠입 경찰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투레 집회에서 만난 콜로라도 대학의 흑인 학생 연합의 회장인 패트리스(로라 해리어)와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패트리스는 경찰이 흑인 운동의 적이라는 신념을 꺾지 않고, 론은 자신의 정체를 밝힐 타이밍을 놓친다. 영화 중반, 둘은 콜로라도의 자연 풍경을 가로지르는 산책로를 함께 거닐며, 흑인 장르 영화에 대한 잡담을 나눈다. 긴 산책로를 걸어오는 둘의 모습 위, 이들이 거론하는 영화들의 포스터가 날아들어온다.
론이 버니 케이시라는 흑인 남성 배우가 총을 든 암살자로 출연하는 〈히트맨〉(1972)에 대한 호감을 표하자, 패트리스는 그런 영화는 흑인에 대한 악랄한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한다며 오히려 흑인 여성 배우 타마라 돕슨이 잠입 경찰로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 존스〉(1973)와 같은 작품이 더 훌륭하다고 반론한다. 아직 자신의 경찰 신분을 밝히지 않은 론이 (경찰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던 패트리스에게) 클레오파트라 존스가 여경으로 등장하는데도 좋아하냐고 넌지시 질문하자 패트리스는 〈클레오파트라 존스〉나 또 다른 흑인 여성 배우 팸 그리어가 해결사로 등장하는 〈코피〉(1973)는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이며, 환상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는 어조로 대답한다. 팸 그리어는 필름 위에서 근사한 인물을 연기하고 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결국 경찰은 흑인을 부당하게 살해한다는 부연설명이 붙는다. 즉, 영화 위에서 그려지는 활동은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주장이다.
(左) 〈히트 맨〉(1972), (中) 〈클레오파트라 존스〉(1973), (右) 〈코피〉(1973) [출처: IMDb]
아직 경찰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있는 론은 공권력 안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냐고 반문하지만, 패트리스는 W. E. B. 뒤 보이가 자서전인 『흑인의 영혼』(1903)에서 주창한 '이중의식(Double Consciousness)' 이론을 거론하며, '흑인'과 '미국인'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이 한 신체 안에서 다투고 있기에 융합은 개념 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한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론은 패트리스에게 똑같이 남성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하고 있는 〈샤프트〉(1971)와 〈슈퍼 플라이〉(1972) 중 어떤 작품이 더 좋은지 질문한다. 패트리스는 동명의 사설탐정(리처드 라운드트리)을 주연으로 하고 있는 〈샤프트〉가, 포주인 영블러드(론 오닐)를 영웅화하는 〈슈퍼 플라이〉보다 훨씬 훌륭한 게 당연하지 않냐고 응수한다. 론은 그렇다면 단순히 배우로 보았을 때, 두 영화의 주연인 리처드 라운드트리와 론 오닐 중 누가 더 좋냐고 질문하고, 패트리스는 당연히 사설탐정인 리처드 라운드트리라며, 포주인 론 오닐의 역할은 흑인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대답한다. 론 스톨워스는 "어우, 그냥 영환데, 좀 내버려두어"라고 한숨을 쉰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스톨워스가 실제로 쿠 클럭스 클랜(KKK)의 수장인 데이비드 듀크가 참여한 모임에 경호 경찰로 참가하면서 천장에 숨어 그들의 활동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동시에 콜로라도의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콜로라도 칼리지의 흑인 학생 연합 모임에서 1916년, 텍사스 주의 웨이코에서 벌어진 흑인 제시 워싱턴 린치 사건의 목격자(해리 벨라폰테)는 흑인 학생들에게 사건의 참혹한 광경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는 이 사건이 벌어지기 1년 전, 〈국가의 탄생〉(1915)이 미국을 강타한 블록버스터로 개봉하고, KKK단을 부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고, 심지어 당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백악관에서 이 작품을 상영하면서 "번개로 쓰인 역사"라고 불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스톨워스의 눈으로, 현대의 KKK단이 의식을 마치고 단체로 〈국가의 탄생〉을 관람하며 황홀경을 맞보고 있는 장면과 교차 편집되어 등장한다. 영화를 관람하는 현대의 KKK단은 영화에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블랙페이스 흑인들의 악행이 정의로운 백기사, KKK단에 의해서 토벌되는 광경을 보며 환호한다.
(左) KKK단의 입단 의식, (右) 제시 워싱턴 린치 사건 증언자(해리 벨라폰테), 〈블랙클랜스맨〉 [출처: FILMGRAB]
스톨워스와 관객은 동시에 깨닫는다. 영화는 "그냥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미국 외부의 관객들은 영화 중간에 등장했던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영화 레퍼런스가 생소했을 수도 있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위 개념인 익스플로이테이션(Exploitation) 영화를 먼저 논해야 한다.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는 어떠한 시대에 유행하는 장르나 니치 마켓을 적극적으로 '차용 및 착취(exploit)'한다는 의미로, 어떠한 예산, 작가주의 접근, 또는 작품성에 대한 고민보다는, 단순히 장르의 특색과 충격성을 극대화한 영화를 찍어내듯이 만드는 작품들을 가리킨다. 이런 작품들은 장르 팬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임팩트 있는 선정성과 폭력성, 혹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굳이 한국에서 비슷한 예시를 찾자면 〈뽕〉(1986)으로 대표되는 80년대의 에로틱 사극, 〈조폭 마누라〉(2001), 〈두사부일체〉(2001)를 포함한 2000년대 전후의 조폭 코미디 장르가 있다.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역사는 할리우드의 기원과 함께 하고 있다. 진정한 첫 번째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영화 역사가마다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지만, 일단은 1927년, 미국 영화 제작자 및 배급사 협회 (MPPDA)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윌 헤이스가 고안한 헤이스 코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시대를 지나면서 할리우드는 점차 자극적으로 변화해가는 영화와, 그에 따른 영화계 안팎의 스캔들 때문에 큰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무성영화계의 유명 감독인 윌리엄 데스몬드 테일러의 살인 사건, 유명 배우였던 올리브 토마스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등은 신문 지상을 장식하면서 할리우드를 위험하고 향락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로 그려냈다. 윌 헤이스는 이러한 사태를 타파하기 위해, 메이저 제작·배급사의 영화 작품에 적용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냈다. 이 가이드라인은 영화에서 사용 가능한 욕설, 나체, 약물 사용부터 시작해, 노예 백인, 인종 간의 연애, 성직자에 대한 풍자 등, 다양한 "금지" 항목 및 "조심"을 위한 경고 항목을 포함하고 있었다.
(左) 윌 헤이스, (中) 헤이스 코드 커버, (右) 헤이스 코드 풍자 연출 사진 작품, 화이티 셰이퍼 作,〈Thou Shalt Not〉[출처: Wikimedia Commons]
메이저 영화사들은 1934년에 강화된 헤이스 코드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했지만, 당연히 이 당시에도 자극적인 영상을 위한 수요는 꾸준히 존재했고, 이들에게 공급을 하기 위해 할리우드 시스템 외부에서 움직이는 영화 제작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본인도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 제작자로 활동한 데이비드 F. 프리드먼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최전선에 서 있던 인물 S. S. 밀러드와 '40인의 도둑들'이라 불렸던 언더그라운드 제작자들을 언급한다. 밀러드는 충격스런 연출을 담은 단편 영화, 의학 녹화물을 편집해 도시 외곽이나 슬럼가 등지에서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했다. 이러한 엽기 다큐멘터리 컴필레이션 영화 제작 방식은 후에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가 꽃을 피운 1960년대에는 '몬도 영화'라는 분류로 이어진다. 밀러드와 '40인의 도둑들'은 헤이스 코드의 우회를 위해 자신들의 영화를 '교육 영화', 또는 '성교육 영화'라고 브랜딩 했지만, 당연히 눈 가리고 아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러한 언더그라운드 배급이 헤이스 코드를 준수하는 스튜디오 영화에 어느 정도의 타격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40년대 전체 영화 중 흥행 3위를 기록한 작품은 메이저 스튜디오를 거치지 않은 배급작품인 제작자 크로거 밥의 〈맘 앤 대드〉(1945)였다. '성교육 영화'를 의미하는 '성적 위생'이라는 다분히 작위적인 장르로 포장되어 개봉한 해당 작품은 67,000 달러에 불과한 제작비로 약 4천만에서 1억 달러 사이의 박스오피스 흥행을 올렸다 추정되며, 영화 역사상 제작비 대비 가장 흥행을 한 작품으로도 기록에 남는다.
1948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파라마운트 판결'을 통해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이 제작, 배급, 극장 운영까지 가치사슬을 수직 계열화하는 사업 구조를 금지하는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발생한다. 할리우드의 거대 배급사의 지배에서 벗어나 우후죽순으로 생긴 인디 극장들은 헤이스 코드를 준수해야 하는 MPDDA 협회 외부에서 활동이 가능했고, 당시 규제가 훨씬 덜했고,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자극적이고 자유로운 유럽의 영화들을 자유롭게 상영할 수 있었다. 심지어 1952년에는 미국의 연방대법원에서 '버스틴 대 윌슨' 사건의 판결을 통해 영화도 헌법 수정 제1조, 즉 '언론의 자유'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전례를 남겼다. 때문에 헤이스 코드의 적용과 준수는 점차 느슨해져 갔고, 1960년대에 와서는 유명무실한 규제로 남았다가, 1968년, 미국영화협회(MPAA)의 느슨해진 자체 심의제도로 완전히 대체됐다.
즉, '파라마운트 판결'의 폐지를 통한 인디 극장의 발전, 영화라는 매체의 '언론의 자유'가 미국 영화의 선정성 및 폭력성 가능 연출 수위를 대폭 높였으며, 때마침 이 당시 가정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전에 대항하기 위해, 텔레비전에서 상영 및 관람이 불가능한 수위의 작품들이 의도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익스플로이테이션 장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가 영화 계보학 상 독특한 이유는, 하위의 장르로 분류되는 작품군들이 단순히 영화의 장르 문법으로만 수렴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조폭'이 등장하는 '코미디'에는 적어도 '코미디'라는 영화의 장르 정의가 포함되어 있지만, 가톨릭의 수녀가 어떠한 금기를 깨는 행위(성적 일탈, 연쇄 살인)를 하면 넌스플로이테이션(Nunsploitation) 영화로 분류가 된다. 넌스플로이테이션 장르에는 에로, 공포, 지알로가 모두 공존할 수 있다. 터부가 포함하는 범위가 넓었던 과거에만 유의미한 장르로 볼 수도 있지만, 의외로 최근까지 폴 버호벤이라는 거장 감독의 손에서 연출된 〈베네데타〉(2021) 또한 넌스플로이테이션 장르로 취급된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경우는, 표면적으로는 간단해 보여도 파고들기 시작하면 의미가 복잡한데, 일단은 익스플로이테이션이라는 광범위한 개념이 포함하는 모든 B급 영화에 주연 배우를 흑인으로 대체한 작품들을 모두 총망라한다. 예를 들자면, 갱들에게 사랑하는 연인, 혹은 가족을 잃은 주인공 형사가 복수를 위해 혼자서 거대한 갱을 상대하는, 〈맨 온 파이어〉(2004), 〈테이큰〉(2008)과 같은 복수극도 흑인을 주인공으로 교체한다면 〈블랙클랜스맨〉에도 언급되었던 팸 그리어의 〈코피〉와 같이 블랙스플로이테이션으로 정의된다. 한편, 〈엑소시스트〉(1973)의 내용에서 주연을 흑인 배우들로 변경하고, 악령의 기원을 아프리카로 각색한 〈애비〉(1974)도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이다. 장르와 예산, 연출의 강도로 정의되던 분류학이 영화(의 인종) '색'에 의해 전복된 이 지점은 특기할만하다. 인종과 문화, 사회 통념이 내용과 연출에 우선한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 해서 초기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작품들을 제작하던 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작품들만으로 한정했을 때, 〈히트맨〉의 제작자 진 코먼(유명 제작자 로저 코먼과 형제 사이), 〈샤프트〉의 제작자 조엘 프리먼, 〈슈퍼 플라이〉의 제작자 시그 쇼어, 〈코피〉의 제작자 로버트 파파지안은 모두 백인이다. 이들은 70년대, 흑인 관객들의 수요를 일찍이 파악해, 최대한 빠르게 흑인을 주연으로 한 영화를 제작, 배급해냈다.
여기서 잠깐, 물음표가 생긴다. 예컨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필름의 제작과 배급, 관람에 있어 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왜 '차용 및 착취'를 하고 있는지라는 육하원칙의 질문이다. 두 가지 답이 가능하다. 백인 자본가들이 (초창기에는 대다수 흑인이었던) 관객들을 위해, 그들이 장르 영화에서 흑인 배우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를 차용해, 영화의 작품성과는 관계없이 도식화된 엔터테인먼트를 찍어내 수급한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또는, 흑인 영화 예술가들이 같은 관객들을 위해, 장르 영화라는 도식과 유행을 차용해, 흑인 배우들을 등장시켜 관객들에게 영상 위 대표자를 연출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두 답의 미묘한 차이는, 〈블랙클랜스맨〉에서 론과 패트리스가 산책로의 대화 중, 해당 장르를 접근하는 태도의 차이와 대응된다. 론은 전자의 입장으로, 이 전의 백인 배우들이 독점하고 있던 장르의 무대에서 흑인 배우들이 등장해 멋지게 활약하기만 한다면, 만드는 사람이 비-흑인이든, 주인공이 형사든 포주든 크게 상관이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패트리스는 후자의 입장으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이 상상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흑인 배우가 영상 위에 대표로 등장하는 순간, 어떠한 상징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문법을 따라, 할리우드 역사와 함께 해온 서부극 장르에 흑인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하면서도, 심도 깊은 고민으로 일경 해당 장르 레이블에 함유되어 있는 'B급', '저열한 작품성'의 평가를 뛰어넘은 두 작품을 논하려고 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 제임스 새뮤얼 감독의 〈더 하더 데이 폴〉(2021)은 백인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서부극에 흑인을 주연으로 기용하고, 흑인의 서사를 풀어내는 연출을 통해 〈블랙클랜스맨〉이 이야기한 모종의 지점에 다가가고 있다.
타란티노, 스파이크 리, 새뮤얼 잭슨: 삼각측량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2015년 샌디에고 코믹콘 [출처: Wikimedia Commons]
스파이크 리 감독의 〈블랙클랜스맨〉에서 나타난 영화의 힘으로 글을 시작해놓고, 그가 "도대체 명예 흑인이라도 되길 원하는 거냐"라고 비판했던 쿠엔틴 타란티노의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이야기로 넘어가는 순서의 아이러니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불편한 전개가 글의 종반부에는 하나의 논리로 묶이리라고 약속한다.
타란티노 감독이 B급 영화, 특히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지대한 팬임은 이미 너무나도 널리 알려져 긴 소개가 필요한 내용은 아니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펄프 픽션〉(1994)은 20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널리 읽혔던 대중을 위한 범죄 소설과 잡지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B급" 감성의 작품들은 대부분 질이 떨어지는 펄프지에 인쇄되어 마트 계산대나 주유소 등지에서 판매되고는 했다. 펄프 감성을 마음껏 선보인 타란티노 감독은 이후 〈재키 브라운〉(1997)을 연출했는데, 이 작품의 원작이 되는 『럼 펀치』는 펄프 범죄 소설의 수준을 순수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린 작가인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으로,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은 백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사족.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은 국내에는 4개의 장편 소설 정도만이 정발 되었지만, 미국에서 서부극과 범죄극을 오가는 그의 작품은 영화 및 텔레비전과 궁합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키 브라운〉을 제외하고도, 〈결단의 3시 10분〉(1957)과 〈3:10 투 유마〉(2007)로 두 번이나 영화화된 서부극, 폴 뉴먼이 주연한 〈옴브레〉(1967), 존 트라볼타와 진 해크먼이 주연한 〈겟 쇼티〉(1995), 〈조지 클루니의 표적〉(1998)의 원작 등을 비롯해, 미국 TV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를 꼽으면 높은 순위에 올라가는 〈저스티파이드〉(2010)의 원작이 되는 단편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타란티노 감독은 원작을 각색해 〈재키 브라운〉을 본인이 깊은 애정을 가진 익스플로이테이션 장르 중에서도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영화로 연출하기로 결정하고, 70년대 해당 장르의 스타인 팸 그리어를 주연으로 기용함으로 장르에 대한 헌정사를 표하기도 했다. 레너드의 인터뷰에 따르면 타란티노는 그의 작품을 영화로 각색하기로 결정하고 촬영 직전에 작가에게 연락을 했는데, 제목 및 주연의 인종을 바꿨다는 이유로 지난 1년간 전화를 하기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레너드는 타란티노에 대한 신임을 바탕으로 그에게 영화감독으로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대답했고, 영화의 결과에도 만족을 표했다.
재키 브라운(팸 그리어), 〈재키 브라운〉(1997) [출처: FILMGRAB]
〈재키 브라운〉에는 총 38회 "Nigger (깜둥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스파이크 리 감독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이 단어의 사용에 대해 불편함을 제기하면서, "나는 단어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고, 자주는 아니지만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쿠엔틴은 그 단어에 집착을 보이고 있다. 도대체 명예 흑인이라도 되길 원하는 거냐?"라고 반응했다. 노예제도 시절,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이 시작되었던 해당 단어는 20세기에 와서는 비속어로 치부되면서 공중파 방송에서는 "N-word"라고 치환되어 인용되기에 이르렀다.
스파이크 리의 반응은 어떠한 논리에 기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한 두 번이었으면 괜찮았을까. 그렇다면 몇 번 까지가 괜찮을까. 스파이크 리의 정확한 기분을 대신 설명할 수는 없지만, (38회라는 셈을 보아서) 어디선가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순간에 컴퓨터 앞에서 각본을 써나가며 "N-word"를 타이핑하고 있는 타란티노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을 수도 있다. 또는, 1997년 당시에는 존재하기는 했지만 학계에서만 지엽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문화적 전유'라는 개념과 어느 정도 영역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히려 〈재키 브라운〉은 백인이 주인공이었던 소설을 블랙스플로이테이션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내용 상 문화적 전유라 보기 어렵다. 만약 원작자인 엘모어 레너드가 주인공의 인종이 서사에 중요하다 판단해, 백인에서 흑인으로 바꾸는 각색을 반대했다면, 이 경우는 흑인이 백인의 문화를 전유한 형태였겠지만, 원작자는 상술했듯이 영화에 만족을 표했다. 그렇다면 흑인을 주연으로 하고 흑인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품을 백인 감독이 연출해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는 상황에서 '문화적 전유'와 유사한 감상이 들었을 수 있다.
해당 작품에서 38회 중, 대부분의 지분율을 차지하고 있는 새뮤얼 잭슨은 흑인 문화 잡지인 『제트』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스파이크 리가 마치 흑인 문화의 대변인처럼 행동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나는 [대변인을 뽑는] 선거 참가해본 기억이 없다"라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그는 "흑인 예술가들은 그들이 유일하게 그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재키 브라운〉은 70년대의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에 대한 아름다운 헌정사와 같은 작품이다. 좋은 영화다. 그리고 스파이크는 지난 몇 년간 그런 좋은 영화를 만들지도 못했다."라고 응답하면서,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감정이 섞여서 작품 비하까지 하는 등 멀리 나가기는 했지만, 새뮤얼 잭슨의 대답은 흥미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적어도 그의 입장은 '흑인 문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바탕으로 질적으로 훌륭한 예술 작품이 나왔다면, 어떤 피부색을 가진 예술가가 만들었는지는 크게 상관없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흑인을 주연으로 한 영화를 연출하고 싶어 하는 쿠엔틴 타란티노, 그의 집착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는 스파이크 리, 그리고 사이, 타란티노와 스파이크 리 양쪽과 친분이 있는 새뮤얼 잭슨의 공방전은 타란티노의 2012년 작품,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도 반복된다. 동명의 1966년 영화에서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을 빌려온 본 작품은 세르조 레오네, 세르조 코르부치과 같은 이탈리아계 감독들이 연출한 잔인하고 과장된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의 장르 문법으로 미국 노예 시대의 서사를 풀어나간다. 굳이 이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다수의 서부영화는 모종의 연유로, 노예제가 형식적으로는 폐지된 남북전쟁 이후, 1차 대전 이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문율의 역사적 맥락은 스파이크 리 감독의 반응에서 가장 명료하게 표현된다.
(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中) 새뮤얼 L. 잭슨, (右) 스파이크 리 감독 [출처: Wikimedia Commons]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는 총 110번의 "N-word"가 사용됐는데, 스파이크 리는 이번에는 단순히 논란이 되는 단어의 빈도수뿐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의 테마에 대한 반감을 공론화했다. 그는 트위터에서 "미국의 노예제도는 세르조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이 아니다. 홀로코스트였다."라고 의견을 표출했다. 즉, 미국의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오락 영화를 만든다는 구상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다. 실제로 일어난 참극인 노예 시대와, 기본적으로 오락성이 강한 서부극, 그중에서도 유난히 말초적 유희를 추구하는 스파게티 웨스턴 조합이 어울리지 않고, 심지어는 불쾌함을 불러일으킨다는 관점으로, 노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국가의 탄생〉 이후 영화 제작자들이 자기 성찰을 통해 이른 무언의 합의에 기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타란티노는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국인 NPR의 "Fresh Air"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실제 노예제도 시대에 일어난 사건은 제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수준보다 천배는 더 참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만약에 영화에서 천배 정도 더 잔혹한 참극을 연출했다 하더라도, 제 생각에는, 착취적인 영화가 아니라, 단순히 시대상을 그린 영화일 뿐입니다. … (중략) … 하지만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종류의 폭력성이 존재합니다. 245년 동안 노예들이 경험해야 했던 끔찍한 현실과, 장고의 복수극에 묘사되는 폭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후자는 영화적 폭력이며, 재미있고 멋지며, 즐길 수 있고 우리가 기다려왔던 연출이지요.
〈장고: 분노의 추적자〉 개봉 이후 새뮤얼 잭슨은 지난 15년 동안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심화되어 가는 두 감독의 논쟁에 대해 깊게 관여하기 꺼려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재키 브라운〉보다 훨씬 자주 사용된 "N-word"에 대해,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그 시절에 흑인을 부르던 다른 단어가 있었나? 만약 어떠한 시대를 화면 상에 그려내야 한다면, 언어 그대로 그려내야 한다. 그리고 ["N-word"는]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시대에 사용되던 단어였다."라고 답변하고, 스파이크 리와는 이 문제에 대해 별도로 할 이야기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잭슨은 해당 발언 이전에는 스파이크 리 감독의 출세작인 〈스쿨 데이즈〉(1988), 〈똑바로 살아라〉(1989), 〈모베터 블루스〉(1990), 〈정글 피버〉(1991)에 연이어 조연으로 출연했고, 발언 이후에도 〈올드보이〉(2013), 〈시라크〉(2015) 등의 작품에서 협업을 이어가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이 모든 논쟁이 어느 정도 사그라든 후, 스파이크 리가 연출한 〈블랙클랜스맨〉은 지난 20년간 타란티노가 연출한 두 작품에 대한 변증적 응답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론 스톨워스가 초반에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에 대해 견지하는 가벼운 태도는 타란티노와 새뮤얼 잭슨이 이 상황을 접근하는 방법론과 유사하다. 물론, 스파이크 리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논쟁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었는지, 이러한 영화의 가치를 완전히 매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중 예술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어찌 보면 제작자와 연출자의 순수했을 수도 있었던 의도와는 관계없이 벌어지고, 그들의 손을 떠나버린다.
스파이크 리는 〈블랙클랜스맨〉을 통해 타란티노에게 〈장고: 분노의 추적자〉가 일으킬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질 자신이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장고: You must go on
장고(제이미 폭스),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 [출처: FILMGRAB]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노예제도가 가장 만연한 미국 남부, 텍사스 주 어딘가에서 시작된다. 흑인 노예들을 판매하려 끌고 가던 노예상 스펙 형제 앞에 현상금 사냥꾼 닥터 킹 슐츠(크리스토프 발츠)가 나타나 카루칸 농장 출신의 노예가 있는지 질문한다. 사슬에 묶여있던 노예 중 하나인 장고(제이미 폭스)가 자신이 카루칸 농장 출신이라고 대답하고 슐츠는 스펙 형제에게 장고를 사고 싶다고 제안하지만 제안이 거절되자, 슐츠는 순식간에 스펙 형제 한 명을 총살하고, 노예들을 해방한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현상수배범 브리틀 형제와 일면식이 있는 장고에게 형제의 신원 확인을 도울 수 있는지 제안하고, 브리틀 형제에게 고생을 당했던 장고는 제안에 응한다.
그들은 브리틀 형제를 찾기 위해 동행을 시작한다. 방랑 치과의사로 행세하는 독일 출신의 이민자인 슐츠는 노예제도에 대한 반감 및 혐오에 가까운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장고를 노예가 아니라 동업자로 대우하면서, 심지어 사격 및 현상수배범 사냥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이 와중, 장고는 브리틀 형제의 사냥이 끝나고 자유인이 되면 아내인 브룸힐다(케리 워싱턴)를 찾아 그녀의 자유를 사고 싶다고 고백한다. 장고의 도움으로 둘은 테네시의 농장주 스펜서 '빅 대디' 베넷을 위해 일하고 있는 3명의 브리틀 형제를 찾아내고, 장고는 형제 중 2명을 손수 죽이기도 한다. 장고에게 자유를 준 슐츠는 장고에게 자신과 함께 겨울 동안 현상금 사냥꾼 일을 하면서 실력을 키우고, 봄에 함께 브룸힐다를 추적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를 받아들인 장고와 슐츠는 파트너가 되어 지갑을 불리고, 과정에서 장고의 사격 실력도 일취월장한다. 두 현상금 사냥꾼은 눈이 녹자 브룸힐다를 찾아 나선다.
장고와 브룸힐다가 헤어진 그린빌에서 브룸힐다가 미시시피 주에서 4번째로 큰 목화 농장인 캔디랜드로 팔려갔다는 기록을 확인한 슐츠는 장고에게 단순히 그녀의 소유권을 사려고 저택에 나타나면 주인이 거절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오히려 캔디가 관심이 있는 '만딩고' 노예 격투를 위한 투사를 사러 접근해, 브룸힐다도 함께 사서 데리고 나오기로 작전을 세운 둘은 유럽 출신으로 만딩고 격투 사업에 진입하고 싶어 하는 사업가와, 그의 사업을 돕는 노예 전문가, 다른 흑인 노예들에게 가장 미움받는 흑인 노예상인으로 변장해 캘빈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조우한다.
캘빈 캔디를 속이고 그의 저택인 캔디랜드까지 초대받아 브룸힐다와 만나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노예장이자, 저택의 집사인 스티븐(새뮤얼 L. 잭슨)의 직감으로 계획이 발각되고, 결국 슐츠는 자리에서 격투를 위한 노예가 아니라, 브룸힐다 한 명만을 위해 12,000 달러를 지불하고 그녀에게 자유를 선사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끝까지 악수를 요구하는 캔디의 뻔뻔함에 슐츠는 그의 가슴에 총을 쏘고, 장고를 돌아보면서 "참을 수 없었다"라고 유언을 남긴다. 곧이어 캔디의 수하에게 슐츠가 살해당하고, 장고는 혼자서 수많은 캔디랜드의 백인 고용인들을 살해하지만, 총알이 떨어지고 브룸힐다가 포로로 잡히자 항복할 수밖에 없다.
저택의 새 주인이자 캘빈의 누이인 라라 리(로라 카요우엣)는 스티븐의 충고에 따라 포로로 잡힌 장고를 죽음보다 더 가혹한 운명이라는 광산 노예로 보낸다. 하지만 장고는 기지를 펼쳐 수송 중에 탈출하고, 캔디랜드로 돌아와 브룸힐다를 구해낸다. 캘빈의 장례식이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온 남은 백인 고용주들을 모두 살해한 장고는, 다른 흑인 노예들은 살려 보내지만, 스티븐의 두 무릎을 쏘아 그를 쓰러뜨리고, 미리 설치해둔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이고 저택을 나선다. 장고와 브룸힐다는 폭발해 완전히 파괴된 캔디랜드를 뒤로 하고 새로운 운명을 찾아 나아간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킹 슐츠의 대사에서 보이는 타란티노 감독 특유의 장광설을 바탕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의 장르적 관습인 잔혹하고 과장된 총격전과, 장르의 대가인 세르조 레오네와 협업해왔던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으로 시청각적으로는 모범적인 타란티노 스타일 서부극을 완성해냈다. 하지만 영화를 찬찬히 펼쳐보면 내부에는 이념 및 자아의 충돌과 전복이 벌어지고 있다.
영화를 움직이는 가장 커다란 동력 중 하나는 당연하지만 노예제도와 그를 둘러싼 흑인과 백인 사이의 갈등이다. 일방적인 탄압과 인권 말살을 갈등이라 부르는 행위도 이상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만들어낸 세계 내부에서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타란티노와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은 이 갈등을 영화 내 시각적 신호의 변화를 통해 연출해간다.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남부의 대자연을 가로지르는 말을 탄 백인 노예상들과 사슬에 묶여 맨발로 묶여가는 흑인 노예들의 모습은 사회 계급적인 위치를 시각적으로 나타낸다. 노예상들은 말을 탔기 때문에 흑인들보다 높은 장소에 위치해 있다. 이들의 모습을 멀리서 와이드로 촬영한 숏으로 구성된 오프닝 씬은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보이는 동물들의 이동을 연상케 하는데, 노예제도를 이 시대의 '자연의 법칙'으로 규정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 [출처: FILMGRAB]
그렇기 때문에 킹 슐츠가 처음으로 스펙 형제들과 노예들을 만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차에서 내려 노예들과 동일한 시선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관객은 이미 슐츠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음에도, 슐츠가 노예들을 하대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암시된다. 스펙 형제들은 슐츠가 장고와 대화를 하는 태도에,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려운 위태로움을 느끼고 "노예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라고 경고한다. 앞서서 암시된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느끼면서 나온 반응이다. 결국 형제 중 한 명을 살해하고, 다른 형제에게 반강제로 장고를 구매한 슐츠는 그에게 말을 주어 함께 작은 마을로 향한다. 말에 탄 장고를 바라보는 백인들의 놀라운 눈빛을 본 슐츠는 의아해하고, 장고는 "깜둥이가 말에 탄 광경을 처음 봐서 그렇다"라고 설명해준다.
이 영화에서 말은 단순히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당연한 프롭이 아니라, 영화 내의 중요한 시각적 신호로 사용되고 있다. 슐츠의 말 프리츠는 슐츠의 소개에 따라 함께 인사를 하기도 하면서 그의 신체 일부처럼 표현된다. 말에 탑승했는지 아닌지에 따라 시각적으로 생성되는 고점과 저점은 심리적 우위를 표현하고 있으며, 오프닝에서 말에서 낙마해 쓰러진 스펙 형제의 절망, 캔디랜드를 방문하는 장고가 자신을 하대하는 캘빈 캔디의 수하 중 한 명을 말에서 강제로 끌어내리는 장면 등에서 은유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적극적인 상징적 기호로 연출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본인이 탄 말을 사지의 일부처럼 조종하는 장고의 모습은 그가 새로운 사회적 신분에 완전히 적응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장고가 말에 타는 순간부터, 그는 이미 '자연의 법칙'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내, 지금껏 자신을 탄압해왔던 '자연의 법칙', 백인의 탄압에 저항하면서 갈등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는 브리틀 3형제 사냥이 끝나고, 슐츠와 장고가 파트너가 되어 눈이 덮인 겨울의 산을 거니는 장면에서 더욱 명확히 자리를 잡는다. 영화 오프닝에서 가을의 대자연을 사슬에 묶인 채 끌려가던 장고였지만, 계절이 지나고 슐츠와 함께 말을 타고 돌아와 자신의 새로운 터전으로 삼아 누빈다. 타란티노는 인물의 변화와 계절의 변화를 통해 '자연의 법칙', 혹은 시대의 이념이 변화하고 있는 광경을 다면적으로 연출한다. 하지만, 이러한 흑인과 백인 사이의 갈등은, 내부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 간의 또 다른 갈등으로 심화된다.
장고(제이미 폭스), 킹 슐츠(크리스토프 발츠), 〈장고: 분노의 추적자〉 [출처: FILMGRAB]
먼저, 킹 슐츠와 캘빈 캔디의 대립이 있다.
영화 내 킹 슐츠의 행적에서는 타란티노 감독과 그가 가장 아끼는 배우 중 하나인 크리스토프 발츠가 무척 정성스럽게 조형한 인물이라는 흔적이 줄곧 보인다. 초반, 장고를 구해준 슐츠는 본인이 노예제도를 혐오하기는 하지만, 브리틀 형제 사냥을 위해서 임무 완수 전까지는 노예제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선언한다. 브리틀 형제에게 개인적 원한이 있었던 장고가 슐츠의 제안을 그냥 받아들였어도 서사의 전개에 큰 문제는 없었겠지만, 이 대사를 굳이 사용한 이유는 슐츠 역시 필연적으로 백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인물 묘사다. 하지만, 장고의 아내가 독일어를 할 줄 알고, 그녀의 이름이 독일의 서사시인 『니벨룽의 노래』를 각색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여주인공에서 따온 브룸힐다라는 이야기를 듣자 그의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슐츠는 궁금해하는 장고에게 브룸힐다가 등장하는 전설을 구술하는데, 그의 이야기는 원전이 된 서사시보다는 바그너의 오페라에 가까운 모양새를 보인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가 1858년의 텍사스에서 시작되고, 영화 중반에 슐츠 박사가 지난 4년간 독일어를 듣지 못했다는 설정을 감안하면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온 시기는 1854-55년 정도로 추측이 가능한데, 그렇다면 슐츠 박사가 1876년에 전체 4부가 초연된 오페라를 관람했을 리는 없다.
굳이 시대적 고증을 어겨가면서 바그너가 각색한 서사를 사용한 이유는, 『니벨룽의 반지』의 붙잡힌 공주를 구하러 가는 지크프리트의 이야기와, 브룸힐다를 구하러 가는 장고의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병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스』의 재커리 울프는 여기서 와그너의 원작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선전을 위해 전면적으로 사용되었고, 인종차별적 사상이 드러나는 와그너 본인의 기록을 들어서, 인종차별의 최전선에 놓여있던 작품을 노예 해방과 평등을 위해 사용하면서 타란티노가 신화의 의도적 전복, 혹은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조소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해석한다. 타란티노의 의도인지는 의미심장하지만 이 설정의 또 다른 해석은 작품 후반부에 돌출된다.
임무가 완수된 이후, 슐츠는 장고에게 파트너십을 제안하면서 이유로 자신이 첫 번째로 해방시킨 장고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 (vaguely responsible)"을 느끼기도 하지만, 오히려 독일인으로서 브룸힐다를 구하러 가는 영웅을 도와야 한다는 낭만적 사명감이 더 강하다고 반쯤 우스갯소리로 부연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보이는 슐츠의 행동들은 그를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초반 장고의 도움을 얻기 위한 노예제도를 이용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모습에서는 자신의 윤리적 가치를 실용적 가치 아래에 두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현상금이 걸린 범인을 앞에 두고 아들이 함께 있다고 주저하는 장고에게, 타깃의 흉악한 과거를 주지 시키며 쏘기를 종용하는 광경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반복된다. 그가 노예제도를 혐오하는 이유마저도 (영화 외적인 연구에 가깝지만) 어떤 계몽사상에 경도되어 있다기보다는 19세기 초반에 그의 고향 프러시아가 이미 농노제를 폐지했다는 인물 배경적 이유와도 연결되어 있다.
장고(제이미 폭스), 킹 슐츠(크리스토프 발츠), 〈장고: 분노의 추적자〉 [출처: FILMGRAB]
하지만 캔디랜드에서 캘빈 캔디와 만난 이후, 그의 내부에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다. 캘빈 캔디는 이 영화에서 슐츠를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달변가이며, 본인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함에도 (그의 입장에서는 문명 세계를 상징하는) 프랑스 문화를 동경하고 있다. 캔디와 슐츠는 완전히 반대의 인물처럼 보이지만, 기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둘 모두 미국이란 나라의 야만적인 세태를 지양하고, 유럽의 사상에 도취되어 있으며, 심복, 혹은 파트너로 흑인을 두고 있다. 인물 내부의 이해타산적인 면모와 감성적 면모 사이 갈등도 유사하다.
슐츠는 캔디랜드 근방에서 도망간 만딩고 투사 "달타냥"이 사냥개에 의해 찢겨 죽이는 광경을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캔디랜드에서 계획이 발각되고 나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으면서 참혹한 현장을 다시 떠올린다. "엘리제를 위하여"는 그가 타란티노 감독의 전작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악역이자 (논쟁의 소지가 있지만) 주인공, 언어 천재의 나치 장교 한스 란다를 연기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씬에도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 슐츠는 성질을 내며 베토벤을 그만 연주하라고 고함을 치는데,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세계 내에서는 자신의 고국의 음악이 이렇게 끔찍한 장소에서 연주된다는 상황에 대한 본능적 분노로 이해할 수 있지만, 만약 영화 외적의 세계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면, 캔디에게 브룸힐다를 구매해 그녀를 구출하더라도, 미국에 건너와 방관자의 입장으로 살아오면서 이러한 참극을 조장했던 (혹은, "엘리제를 위하여"로 인해 떠올린 나치 독일의 협조자였던) 과거에 대한 갈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슐츠는 캔디의 책장을 바라보며, 알렉상드르 뒤마가 오늘의 사태를 보면 어떻게 느꼈을지 질문한다. 캘빈이 이해를 하지 못하자, 슐츠는 도망친 만딩고 투사의 이름을 뒤마의 작품인 『삼총사』의 주인공에서 빌려왔다는 정황으로 보아, 캘빈이 뒤마의 팬임이 분명한데, 캘빈이 무척 사랑하는 문명적 프랑스 대중문화의 최고 히트 작가인 뒤마는 흑인이라는 현실의 역설을 비꼰다. 슐츠는 캘빈을 상징하는 가장 커다란 자아인 "프랑코필(프랑스 애호가)" 자체가 실체가 없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결국, 자존심이 상한 캘빈은 모든 거래가 완료된 이후에도, 슐츠에게 자신과 악수를 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심지어 악수를 하지 않으면 브룸힐다를 쏘겠다고 위협한다. 캘빈 내부에서 이해타산적 자아에 억눌려있던 감성적 자아가 외부로 돌출된 상황이다.
킹 슐츠(크리스토프 발츠), 〈장고: 분노의 추적자〉 [출처: FILMGRAB]
슐츠는 뒤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본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악랄한 노예 주인 캘빈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프랑스 흑인의 작품이고, 흑인 친구를 도우려는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오페라가 인종차별주의자 백인이 작사·작곡한 (역사적 미래 - 타란티노 작품 세계상 과거에서 나치 독일이 선전으로 사용하던) 작품이라는 대비는 무척이나 아이러니하다. 그는 만약 자신이 캘빈과 악수를 한다면, 둘의 위치가 완전히 동일해지리라는, 어떤 숙명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슐츠의 자아는 캘빈 캔디와 동일해진다는 결과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슐츠는 악수를 하러 다가가는 척하면서 숨겨둔 피스톨로 캘빈을 단 하나의 탄환으로 살해하고, 장고를 돌아보며 "참을 수가 없었다 (I couldn't resist)"라고 변명 및 유언을 남긴 후 캘빈 수하의 샷건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도 내부에서 갈등하던 두 자아 사이에서 결국 감성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캘빈과 슐츠 모두 감성적인 충동을 저지하지 못하고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해 버렸다. 물론, 죽음의 순간, 슐츠는 자신이 캘빈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결과에 대해 만족하고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이 두 인물의 파트너인 장고와 스티븐의 대립은 또 다른 자아의 갈등을 다룬다.
장고는 캔디랜드로 향하기 전, 슐츠의 제안을 받아들여 '애꾸눈 찰리 (One-Eyed Charly)'의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다. 장고의 말에 따르면 '애꾸눈 찰리'란 백인 주인을 도와 그들의 사업을 돕는 전문가 노예들을 칭하는데, 슐츠가 장고에게 준 역할인 만딩고 투사 노예를 선정하는 '애꾸눈 찰리'는 흑인 노예상이나 마찬가지로, 심지어 백인 노예주에게 기생하는 '흑인 집사'보다 더 가증스러운 직업이다. 하지만, 브룸힐다를 구출하기 위해 장고는 '애꾸눈 찰리'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캔디랜드에서 캘빈 캔디의 '애꾸눈 찰리'이자 흑인 집사인 스티븐과 만나게 된다.
캔디랜드 입구, 〈장고: 분노의 추적자〉 [출처: FILMGRAB]
장고는 브룸힐다를 구출한다는 일념으로 역할의 수행을 위해 도망친 만딩고 투사 달타냥을 구하려는 슐츠의 제안을 대신 철회하고, 달타냥은 슐츠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추후 슐츠가 평정심을 잃고 그가 충동적으로 캘빈을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뼛속까지 백인 주인을 위한 '애꾸눈 찰리'인 스티븐은 장고의 '애꾸눈 찰리' 역할 놀이를 신속하게 간파하고,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슐츠와 장고는 실제로는 동등한 관계를 주인과 애꾸눈 찰리로, 캘빈과 스티븐은 실제 주인과 애꾸눈 찰리 관계를 동등하게 위장하고 있다는 관계이다. 물론, '애꾸눈 찰리' 역할에 과몰입했다고 생각한 슐츠가 장고를 나무라는 장면, 그리고 스티븐이 서재에서 동등한 높이의 소파에 함께 앉는 장면 등에서 이러한 역할 설정이 가끔씩 역전되는 상황이 암시되기도 한다. 때문에, 마지막에 장고가 캘빈에게 아부를 하던 다른 여성 흑인 노예들은 도망갈 수 있게 허락을 하고, 스티븐만 유일하게 살해한다는 전개는, 슐츠가 캘빈을 살해한 문맥과 유사하게, 작품 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던, '장고'가 실제 '애꾸눈 찰리'와 차이가 무엇이냐라는 고민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상대방의 파괴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확립하면서 여정에 종지부를 맺는 결과로 끝이 난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분명히 오락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화려한 액션을 자랑하지만, 타란티노의 작품답게, 액션을 차치하고라도 일상적인 대화 및 자연스러운 시각적 신호를 통해 인물의 조형과 갈등의 구성을 심화시키고, 영화 내 우직하게 밀어가던 질문의 대답에 성공한다. 그의 장기인 비선형적 서사 전개가 완전히 결여된 본 작품이 (어쩌면) 그의 영화 중 가장 사회적인 담론에 예민하고 섬세한 응답을 내놓았다는 구조적 변곡점도 무척 흥미롭게 다가온다.
노예제도를 오락 작품의 무대로 삼는 영화의 윤리성에 대해 타란티노는 광산 수송중에 자신들을 풀어주고 떠나는 장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 흑인 노예 로드니(새미 로티비)의 표정을 통해 대답하는 듯하다. 캔디랜드로 수송되던 당시, '애꾸눈 찰리' 역할로 위장했던 장고에게 위협을 당했지만, 결국 장고의 기지로 자유를 얻게 된 로드니는 떠나는 장고의 호쾌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물론 이 장면도 타란티노의 의도적 연출이지만, 어찌 보면 이런 영화를 만든 그가 느낀 일말의 책임감이 녹아있다.
타란티노는 노예제도가 오락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하고 있지 않다. 그가 예상했던 바는 아니겠지만, 본 작품이 불러일으킨 논란은 미국 내부 오욕의 역사와 그를 관통하고 있는 인종적 갈등을 어떻게 마주하고 묘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 불을 지폈다. 어떤 영화는 대화의 시작만으로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흑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인종들의 역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소룡이 생전 구상했던 트리트먼트에서 시작되어 HBO의 자회사인 씨네맥스 채널에서 방영을 시작한 〈워리어〉(2019)는 19세기 후반, 미국으로 이주해 노예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던 중국계 철도노동자들의 삶을 서부극과 무술영화의 문법을 통해 풀어나간다. 〈워리어〉의 시즌 1, 에피소드 5 "피와 오물"은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을 훌륭하게 오마주한 구성으로 『인디와이어』, 『더 할리우드 리포터』와 같은 주류 영상 매체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물론, 스파이크 리가 담론을 시작한 인물이 백인이라는 현실에 본질적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제작·연출한 〈블랙클랜스맨〉으로 대화를 유의미하게 이어나가는데 일조하지 않았는가. 우연이지만, 영화의 주제가 "장고"에서, 비가 그치면 태양이 비추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가사가 떠오른다. 영화를 둘러싼 과열된 논란이 사그라든 이후에, 영화가 야기한 대화는 계속 나아가고 있다.
제임스 새뮤얼, 흑인에 대한 서부극
제임스 새뮤얼 감독 [출처: KCRW, Photo by David Lee/Netflix]
〈더 하더 데이 폴〉의 감독 제임스 새뮤얼은 본 영화의 공개 전에는 뮤지션인 더 불리츠(The Bullitts), 또는 영국의 유명 R&B 가수인 씰의 동생으로 더 유명했다. 그는 대중음악계에서는 소소한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영화 제작 및 연출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는데, 〈장고: 분노의 추적자〉와 거의 동시에 촬영한 〈데이 다이 바이 던〉(2013)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서부극 시대의 흑인 카우보이들을 중심으로 한 각본에 본인의 음악을 가미해 단편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영화감독 데뷔작임에도 본인의 음악 활동 덕분인지 마이클 K. 윌리엄스, 로사리오 도슨,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보킴 우드바인, 아이제이아 워싱턴, 에리카 바두 등 유명 흑인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하는 데 성공한 이 작품은 추후, 〈더 하더 데이 폴〉이라는 장편 영화로 확장된다.
〈더 하더 데이 폴〉은 (비록 엄청난 수준의 각색을 겪었지만) 등장인물들을 모두 실제로 서부극 시대에 존재한 흑인 카우보이나 범죄자들로 설정함으로 이전까지 등장했던 흑인 주연의 서부극 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영화는 거칠게 요약하면 선역인 냇 러브 갱과 악역인 루푸스 벅 갱의 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는 영화의 주연들이 이름을 빌려온 실제 역사 인물의 생애를 최대한 간단하게 요약한 내용이다.
선역 리더인 냇 러브(조나단 메이저스)는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활동했던 흑인 카우보이로, 서부극에 등장하는 웬만한 유명한 카우보이는 모두 한 번씩은 지나가 본 다코타 지역의 데드우드에서 활동을 했고, 인디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커다란 장점은 노예 출신임에도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고, 말년에 자신의 자서전을 쓰면서까지 증명했던 브랜딩에 대한 관심이다. 현대에 우리가 냇 러브에 대해 알고 있는 일화는 대체적으로 그의 자서전에서 기인한 내용으로, 자기 PR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左) 카우보이 시절의 냇 러브, (中) 철도국 근무 시절 냇 러브, (右) 냇 러브의 자서전 커버 [출처: Wikimedia Commons, UNC]
영화상 냇 러브의 옛 연인이자 유능한 사업가인 스테이지코치 메리(자씨 비츠)는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장거리 배달원으로, 놀랍게도 60세의 고령에 현대에도 가혹한 날씨와 자연환경으로 기피되는 몬태나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녀는 남자 옷을 입고 라이플을 휘두르며 몬태나를 누볐고, 은퇴 후에도 사업을 벌이면서 지역의 유명인사로 활약하다가 82세까지 장수하고 세상을 떠났다.
냇 러브 갱의 속사포인 짐 벡워스(RJ 사일러)는 역사적으로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미주리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크로우 인디언 부족과 함께 지내며 모피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벡워스도 냇 러브와 동일하게 말년에는 자신의 삶을 토머스 본너라는 작가에게 구술해 그에 대한 평전이 출판되었는데, 그의 사망 후에는 내용의 진위성에 의문을 표한 학자들도 있다.
제임스 벡워스와 끊임없이 투닥거리는 빌 피켓(데이 가테지)은 실제 역사에서는 현장에서 활동한 카우보이라기보다는, 서부를 테마로 한 유랑 서커스인 와일드 웨스트 쇼에서 로데오 선수로 이름을 날린 연기자에 가깝다. 실제로 그는 1920년대에는 두 편의 무성영화에 연기자로 출연한 기록이 남아있다.
(左) 스테이지코치 메리, (中) 짐 벡워스, (右) 빌 피켓 [출처: Wikimedia Commons]
스테이지코치 메리의 보디가드를 담당하는 남장여자 사수인 커피(다니엘 데드와일러)는 영감을 준 실존 인물에서 너무 심한 각색이 들어갔기에 이름이 바뀌었지만, 영화의 중반부에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캐세이 윌리엄스라고 밝힌다. 윌리엄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남장을 하고 군에 입대한 흑인 여성이다.
냇 러브 갱의 베테랑이자, 유일하게 집법부에 속해있는 보안관 배스 리브스(델로이 린도)는 미시시피 강 서쪽 지역의 최초 흑인 보안관으로, 노예 출신이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아칸소와 오클라호마 주에서 연방보안관 직무를 수행했다. 때문에 영화에 등장하는 냇 러브 갱 중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의 진위성과 업적이 가장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전기를 집필한 아트 T. 버튼은 리브스가 미국의 유명 서부극 히어로인 론 레인저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론 레인저 자체가 가공의 인물인 만큼 이 주장은 딱히 사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지는 않지만, 두 인물이 가진 유사성은 우연에 가깝다고 치부하는 반응도 찾아볼 수 있다.
(左) 배스 리브스, (中) 배스 리브스, 1907년, (右) 배스 리브스의 보안관 임명 및 선언서 [출처: Wikimedia Commons]
이들에 맞서고 있는 갱의 리더인 루푸스 벅(이드리스 엘바)은 19세기 말 아칸소와 오클라호마 지역에서 흑인과 크리크 인디언들로 이루어진 범죄 집단을 이끌고 1895년 7월부터 8월까지 13일간 보안관 살해를 포함해 강도, 민간인 살인, 성폭행 등 극악한 연쇄범죄를 저지른 후 보안관들에게 잡혀 이듬해 사형에 처해졌다.
루푸스 벅 갱의 대모인 트루디 스미스(레지나 킹)는 실제 역사에서는 루푸스 벅이나 체로키 빌과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보관소에 남아있는 체포 사진이 거의 유일한데, 기록에 따르면 흑인 소매치기로, 돌리 미키라는 파트너와 함께 범죄를 저지르고 6개월 형을 산 이후 풀려났다고 전해진다.
루푸스 벅의 파트너인 체로키 빌(라키스 스탠필드)의 본명은 크로포드 골즈비로, 역사상으로는 루푸스 벅과 비슷한 시기, 인근 지역에서 활동했던 범죄자였다. 체로키 빌은 1894년 내내 강도와 살인을 포함한 연쇄 중범죄를 일으키고, 이듬해인 1895년에 붙잡혀서 재판을 받고 1896년 교수대에 올랐다.
〈더 하더 데이 폴〉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실제 역사의 상대에서 이름만을 빌려왔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의 각색을 거쳐 연출되었고, 역사적 인물들이 만났다는 증거도 없지만, 제임스 새뮤얼 감독이 이런 서부시대의 흑인 총잡이 팀업 무비를 기획한 의도에는 어떤 사회적 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기존 서부극에서는 조연, 혹은 엑스트라의 위치에서 백인 주연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흑인과 여성에게 서사를 부여하려는 시도이며, 소외된 공간에 세계를 창조함으로, 서부시대가 망라하는 공간-인종적 범위를 팽창시키려는 움직임이 영화를 움직이는 격렬한 운동에너지로 작용한다.
냇 러브: In a distant view
어린 냇 러브(체이스 딜런), 〈더 하더 데이 폴〉(2021) [출처: YouTube @ Netflix]
〈더 하더 데이 폴〉은 블랙스크린에 "이 이야기에 그려진 사건은 허구이지만, 이 사람들은 실존했다"라는 문장과 함께 시작된다. 가족과 행복한 식사를 앞두고 있는 소년의 앞에 나타난 총잡이가 나타나고, 소년이 보는 앞에서 그의 부모를 총살한다. 총잡이는 소년을 죽이는 대신 그의 이마에 칼로 상처를 남기고 떠나간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텍사스 주.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한 냇 러브는 한 교회에서 총잡이의 동료를 찾아 그를 총살함으로 복수를 하고, 자신의 옛 연인 스테이지코치 메리에게 고백을 하러 돌아간다. 메리는 냇의 부모를 살해한 루푸스 벅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그가 심리적으로 정착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거절하려 하지만, 냇은 루푸스 벅은 종신형을 살고 있다면서 메리에게 떠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둘이 화해를 하려는 순간, 냇의 옛 동료 짐 벡워스와 빌 피켓이 나타나 자신들이 최근에 습격한 크림슨 후드 갱이 루푸스 벅의 사주를 받아 은행강도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고, 벅이 곧 종신형에서 풀려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루푸스 벅은 열차로 이송되던 와중, 그의 동료인 트루디 스미스와 체로키 빌에 의해 구출되고, 트루디는 연방정부와 맺은 모종의 계약을 통해 그가 종신형에서 사면되었다고 알린다. 본거지이자, 흑인 자유민들로 이루어진 레드우드로 돌아간 루푸스는 자신의 투옥생활 중 레드우드의 권력자가 된 와일리 에스코(디온 콜)를 추방하고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루푸스 벅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복잡한 냇 러브의 앞에 전설적인 보안관 배스 리브스가 나타나고, 냇 러브 갱과 배스 리브스, 그리고 스테이지코치 메리의 보디가드인 커피는 함께 레드우드로 향해 루푸스 벅을 습격할 계획을 세운다. 메리는 자원해서 일행보다 먼저 레드우드로 향해 정찰을 시도하지만 그녀의 의도를 꿰뚫어본 루푸스 벅 갱에게 포로로 잡힌다. 루푸스 벅은 메리를 구하고 싶으면 그녀의 몸값으로 크림슨 후드 갱에게 훔친 돈을 다시 가져오고, 심지어 백인들의 도시인 메이스빌에서 은행을 털어오라고 범죄를 강요한다.
루푸스가 요구한 금액과 함께 레드우드로 돌아온 냇 러브 갱은 인질 교환 대신,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돈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혼란을 틈타 메리가 탈출에 성공하면서, 냇 러브 갱과 루푸스 벅 갱은 레드우드를 무대로 총력전에 돌입한다. 아수라장의 끝에는, 냇 러브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하더 데이 폴〉은 '사랑의 수고 (labor of love)'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감독 제임스 새뮤얼이 간직한 서부극 장르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 그리고 본인이 오랜 기간 동안 구상해왔던 기획의 현실화를 위한 노력을 영화 다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임스 새뮤얼 감독이 모두 작곡한 음악은 직접 영화의 제작자로도 참여한 "JAY-Z" 숀 카터와의 협업을 통해 완성되었는데, 감독의 음악적 배경을 증명하듯 고전적인 서부극 감성과 현대의 흑인 음악의 조화로 영화의 리듬을 조율해간다. 때문에 편집을 맡은 톰 이글스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과의 협업에서 여러 번 증명해왔던 음악과 숏 리듬의 동기화에 집중하는 편집 철학을 영화에 아낌없이 적용한다. 결과물은 장편 서부극 영화와 뮤직비디오 사이 중간의 어느 지점이다.
영화의 양축을 담당하고 있는 냇 러브와 루푸스 벅을 연기한 조나단 메이저스와 이드리스 엘바를 위시한 조연들은 오랜 시간 동안 백인 배우들이 독점해왔던 '카우보이와 총잡이'의 육체적 연기를 위화감 없이 해낸다. 제임스 새뮤얼과 보아즈 야킨이 쓴 각본의 대사는 지면상으로는 식상하거나 과도하게 수사학적이라는 감상이 들 수 있다. 개인적인 평가지만, 영화의 대사 대부분은, 듣기 전까지는 서사나 인물 조형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배우들이 도입한 남부 흑인 억양과 조화되는 순간,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재건 시대의 흑인 지역에서 공연한 셰익스피어는 이런 청각적 자극을 주지 않았을까 싶은 리듬을 생성한다.
(左) 냇 러브 갱, (右) 루푸스 벅 갱, 〈더 하더 데이 폴〉 [출처: YouTube @ Netflix]
〈더 하더 데이 폴〉이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음악과 대사의 내용보다 선행되는 운율이 서사를 끌고 가는 연출론이 아닐까 생각된다. 톰 이글스는 『포스트퍼스펙티브』의 랜디 올트먼과의 인터뷰에서 제임스의 연출론에서 유사한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그의 연출은 무척 음악적이다. 그에게 있어 음악과 대사, 서사는 뚜렷한 구분이 없다."라고 말한다.
영화의 음악적 구성은 루푸스 벅 갱이 이송 중인 그를 열차에서 탈출시키는 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승객차에서 바들바들 떨며 저항하던 젊은 군인을 포로로 잡은 체로키 빌은 그를 앞세워 루푸스가 갇혀있는 포로이송차의 문 앞으로 다가간다. 문 앞까지 다가가는 숏에는 퍼커션과 반복되는 멜로디가 흐르고 있지만, 체로키 빌이 문 옆으로 물러서 포로이송차 안의 병사들에게 말을 거는 순간부터 음악이 멈추고, 체로키 빌이 위치한 문 외부와, 장교가 위치한 이송차 내부가 스플릿 스크린으로 구성된다. 체로키 빌과 장교는 대화의 승기를 잡기 위해 문 너머 서로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대화의 내용, 혹은 밀도는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음악이 멈추고 시작된 대화의 두 화자는 곡의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서로 다투는 악기에 가깝다. 체로키 빌을 연기하는 라키스 스탠필드의 예의 바른 (꼭 "sir"를 붙이는 말투가 나긋나긋하게 들린다) 여유와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태를 위협적인 목소리로 감춘 장교의 대화는, 중간에 심벌즈를 떨어뜨린 듯한 효과를 자아내는 트루디 스미스의 사격음, 총알에 맞은 젊은 병사의 비명 소리로 인하여 승패가 결정 나고 만다. 굉음에 놀란 장교는 젊은 병사가 아들이라고 고백해버리고, 체로키 빌은 이를 이용해 그가 문을 열도록 종용한다. 문이 열리고, 스플릿 스크린이 밀리며 하나의 시점으로 통일되면서, 음악도 다시 재개된다.
하지만 〈더 하더 데이 폴〉을 독특한 서부극으로 만들어주는 상기한 요소들은, 연출자가 본인이 구상한 기획의 시청각성에 너무 깊게 매몰되어 건강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데 실패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드는 최종 결과물로 이어진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의 최종 결과물은, 작품 부분적 요소의 총합보다 작아 보인다는 묘한 감상을 야기한다.
첫 장편영화로 자신이 오랜 시간 꿈꿔왔던 숙원을 이루게 된 감독의 열정 과잉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인터뷰 지면과 화면을 뚫고 나올듯한 제임스 새뮤얼의 에너지와, 그가 풀어놓는 서부극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고조된 흥분이 여실히 느껴진다. 서부시대의 실존 흑인 총잡이들의 팀업이라는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을 기획하고, 2020년대 전후로 가장 주목받는 젊은 흑인 배우들 캐스팅에 성공해, 본인의 음악과 함께 완성했다는 성과를 감안하면 그가 느끼고 있는 황홀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영화의 오프닝 텍스트가 노골적으로 시위하듯) 장르의 언저리에 위치해 백인들의 지시를 따르던 이름 없는 시종 신분의 흑인에서, 이름을 날리고 살아간 실존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자부심도 느껴진다. 다만, 이 영화에는 묘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들과 이미지가 있다.
레지나 킹은 오클라호마 주의 털사를 주요 배경으로 전개되는 HBO의 〈왓치맨〉(2019)의 주인공, 안젤라 에이바를 연기하면서 본인의 대화 속도에 맞추어 느릿한 남부 흑인 억양을 선보인 경험이 있다. 인터뷰에 따르면 〈더 하더 데이 폴〉에서는 기본적인 남부 흑인 억양에 본인이 연출한 〈원 나잇 인 마이애미〉(2020)의 촬영지인 뉴올리언스 억양을 도입했다고 밝힌다. 어원이 어떻든지 간에 그녀가 연기한 트루디 스미스가 묶여있는 스테이지코치 메리를 앞에 두고, 사과를 깎으며 어린 시절 죽은 여동생의 이야기를 하는 씬은 또렷하게 청각을 자극해온다. 비록 내용이 서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시각적 이미지는 기억에 남지 않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랩과 슬램 포이트리의 전형 스포큰 워드(spoken word), 구술시를 듣는 듯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트루디 스미스(레지나 킹), 〈더 하더 데이 폴〉 [출처: YouTube @ Netflix]
조나단 메이저스가 연기한 냇 러브가 레드우드 쇼다운에 난입한 크림슨 후드 갱을 상대하면서, 최후의 멤버와 대치하는 액션씬도 짧지만 인상적이다. 오버헤드 숏에서 말을 중심에 두고 서로를 향해 돌다, 아이레벨 숏으로 전환한 후 냇이 말을 앞으로 보내면서 몸을 살짝 기울여 상대방을 쏘는 액션은, 영화 내 존재하는 여러 시퀀스 중에도 배우의 절제된 움직임이 무척 돋보이는 연기를 담고 있다.
장면의 연출보다는, 레지나 킹과 조나단 메이저스라는 배우들의 발성, 표정, 움직임을 포괄하는 육체성에 매료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배우들이 배역을 접근하는 열의에서는 단순한 직업정신을 뛰어넘는 책임감이 느껴진다. 백인이 독식하던 장르에서 백인이 하던 역할을 큰 고민 없이 흑인 배우들로만 교체하던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을 넘어서, 역사적으로도 장소에 흑인 총잡이들과 카우보이들이 존재했다고 선언하고, 그들의 이야기도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오락물로 만들어질 가치가 있다고 증명하려는 사명감이 작품 전반에 녹아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존재와 오락성의 증명을 동시에 탐하고 있기에 감독이 영화의 팽창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이 사명감이 완전히 추측일 수도 있더라도, 〈더 하더 데이 폴〉은 영화를 시작하며 강조했던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라는 역사를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이다. 비록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해 허구의 사건을 만들어내야 했지만, 감독 제임스 새뮤얼은 본인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고전 서부극에서, 부엌을 지나다니거나, 흰 셔츠에 검은 조끼를 입고 음식을 나르던 이들이, 영화 세계의 바깥 멀리에서 살아가던 인생에 대해 생각하기를 주문하고 있다. 본인이 던진 명제에서 시작된, "그러면 그들은 어떤 모습이었나"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꽤 근사하지 않은가.
마침
스파이크 리 감독의 개별 작품에 대한 평가, 또는 그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개별 작품에 대해 견지하는 태도와는 별개로, 그가 〈블랙클랜스맨〉에서 펼친 대중문화 예술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고민은 시기적절하다. 이 고민은 정치적 올바름을 논할때 유난스럽게 딸려오는 '계도'라거나 '계몽'같은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자기 검열을 요구하고 있지도 않다. 창작자의 의도를 벗어난 대중문화 작품의 영향력에 대해 유념해 달라라는 간청에 가깝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이러한 후폭풍에 대해 무척 깊은 고민이 투자된 흔적이 느껴지는 작품이며, 실제로 영화 개봉 후 흑인 언론 및 대중의 반응도 전반적으로는 호의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작품을 관람하는 모든 이들이 "N-word"가 가진 아픈 역사, 노예 제도의 참혹함을 타란티노가 원했던 만큼 공감하고, 염두에 둘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블랙스플로이테이션, 타란티노, 스파이크 리, 제임스 새뮤얼이 참여한 대화가 말초적 유흥, 질문, 응답, 대안으로 흐르면서 점진적으로 확장되어가는 모양새는, 영화가 끝나고 벌어지는 모든 대화가 유의미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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