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힘들게 하는게 일이 였던가, 육아 였던가 아님 나였던가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알렝드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누군가를 처음 만날때, '무슨 일 하세요?'라고 대개 묻는다. 상대의 직업으로 우리는 그가 걸어온 길과 상대의 성향, 그 사람의 재정상황까지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들 사이에는 엄마 자체의 직업은 중요하지 않다. 만약 엄마의 직업이 궁금했다면 아이를 얼마나 잘 케어할 수 있을지 가늠해볼 용도로 쓰일 수 있겠다.
막상 휴직을 하고 집에 있었지만, 요리, 아이의 숙제 봐주기, 등하원 운전과 같은 일이 내 적성에 썩 맞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너무 행복하지만 그 외에 나에게 주어진 일들에 대해 완성도를 끌어 올리기도 성취감을 느끼기도 쉽지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내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라 생각해." 힘들때 마다 이 말을 생각한다. 아이들을 사랑하기에 내 시간을 기꺼이 내주고 있다고 위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현명해 지려면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원하는 학원에 보낼 수 있는 경제력도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에 생각이 미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심정이 복잡해진다.
회사를 15년 다녔으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조직에 들어갔을때는 2~30년 한직장에서 근무하는 선배들을 보고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매일 9시부터 6시까지 한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것, 나의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을 위해 보낸다는 것은 성과를 뒤로 놓고라도 칭찬받을 일이라 생각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나는 그런 모습에 숨이 막히기도 했다. 어려움과 불합리를 견디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대단해 보이면서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일이라는 것은 고되지만 재미도 있었다. 한 분야에 몰두하다보면 진짜' 알랭드보통'의 말처럼 일상의 시름과 근심을 잊게 되었다. 월급과 경력, 실력이 쌓이는 것인 마치 덤인 것 같다 느껴질 정도록 일에서 느끼는 성취감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갈 곳이 있다는 것도, 빳빳하게 다려진 반듯한 옷을 입고 모인 사람들과 지적인척 대화하는 것도 교양있는 언어로 일과 조직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이들과의 삶도 눈물겹게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지만 목늘어난 티셔츠 군데군데 얼룩과 밥풀이 붙어 있는 차림새로 급하게 하교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는 내 모습은 자존감을 점점 떨어트리기도 했다. 아이들 학교 가는 시간이라도 파트타임,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유연함이 있었으면 굳이 휴직을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 조직에서 그럴 수 없다면 내가 그 일을 만들어 보면 어떤지 오래 회사를 다닌 사람에게서 나오기 힘든 발랄하고 희망적인 생각이 마음에 찾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