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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연재 May 20. 2024

지키던 선을 넘어야 할 때가 있다

<소설> 비혼이지만 하고 싶습니다 12화

몸은 피곤한데 다음날 소연은 일찍 눈이 깨서 오래간만에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서서히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 낙엽이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레드카펫이 아닌 옐로카펫이 쫙 펼쳐져서 아름답고 푹신했다. 꼭 여배우가 된 것 같군 하며 옐로카펫 위를 걷자니 낙엽이 푹신해서 포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가을이 참 예쁘네.’

그동안 너무 바빠서 가을 풍경을 눈으로 스치듯 보다가 이제야 가을을 진짜로 만나는 느낌이었다.

“오늘 웬일이랴. 네가 아침 운동을 다 다녀오고? 동네 한 바퀴 도는 것도 잔소리를 해야 겨우 하는 사람이.”

춘자 씨는 아침 댓바람부터 경쾌해 보이는 딸이 신기했다.

“그냥 오늘은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는데 컨디션이 좋더라고. 이런 날도 있어야지.”

생각해 보니, 갱년기가 시작되고 늘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었다. 머리도 무겁고, 몸은 쑤셔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젖은 솜뭉치 상태였다. 오늘은 새로운 피가 도는 것처럼, 아니 몸속의 호르몬이 갑자기 바뀐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정말 오래간만에 맞는 가뿐한 아침이었다.      


다시 종수에게 연락이 왔다. 방송국에서 하는 연말 공개방송에서 다시 종수의 회사가 음향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연말마다 하는 그 행사가 소연의 머리를 스쳤다. 2년 동안 다른 곳에서 하는 바람에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소연이 일하는 방송국에서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종수는 그 공개방송도 소연이 맡는지 물었다. 아쉽지만 그 방송은 소연이 아닌 다른 작가의 담당이었다. “아쉽네요. 작가님하고 다시 일하면 좋았을 텐데.”

전화기 너머 종수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아쉽기는 소연도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또 기회가 있을 거라고 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대로 기약 없이 끝인가?’

한여름밤의 꿈처럼 그렇게 한순간 부풀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감정인가 싶었다. 그 사람이 좋았던 건지, 오랜만의 연애감정이 좋았던 건지 헷갈렸지만 어느 쪽이든 갑자기 소연의 일상을 뒤흔든 것만은 분명했다. 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상을 살다가 갑자기 수술을 받게 되면서 남자 찾기에 열중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의욕은 있었으나 곧 실망하고, 다시 제자리인가 싶던 그때 만난 종수.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는데 그냥 여기서 끝인가.


“그때 안 낸 차비 주세요. 커피 한잔이면 됩니다.”

종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갑자기 소연의 가슴에서 방망이질이 시작됐다. 드라마 여주인공도 아닌 것이 갑자기 주변 소리도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아무도 안 보이고, 핸드폰에 있는 종수의 문자가 46인치 LED화면의 자막처럼 커다랗게 보였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틈도 없이 “어머 어머”하면서 핸드폰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뭐 좋은 일 있냐?”

나선이 소연의 얼굴을 보더니 단박에 알아보고 물었다.

“왜 좋은 일 있어 보이는 얼굴이야?”

소연이 알아맞혀 보라는 식으로 히죽거리며 말하자 나선은 얼른 이실직고하라고 닦달했다.

말하고 싶어 죽겠는데, 그래서 입술이 제멋대로 씰룩거리는데 이걸 지금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되는 건가 하는 데에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자칫 김칫국을 시원하게 마신 거라면 나중에 얼마나 창피할까 싶어서 순간 망설였다. 조금은 진행된 다음에 말을 하는 게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입에서는 이미 종수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을 다 들은 나선은 신중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젊을 때처럼 호들갑 떨면서 맞장구를 치기에는 좀 무거운 나이이므로.

나선은 오랜만에 소연의 들뜬 모습을 보며 정말 종수가 소연에게 나타난 왕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소연이 나중에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싱글인지 아닌지조차 확인이 안 된 상황 아닌가. ‘못 먹어도 고!’하기엔 리스크가 컸다. 그렇다고 여기서 찬물을 끼얹기엔 소연의 표정이 너무 생기 있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고르고 골랐다.

“너 지금 쌀 씻으면서 돌 고르는 사람 표정이야. 그러지 않아도 돼.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아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감정에 온몸에 있는 세포가 다 깨어나서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그 기운에 모든 걸 던지기엔 너무 철든 오십 아닌가. 나선은 소연이 얼마나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사람인지를 잘 알기에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이내 안심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친구는 반기를 들었다.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넌 지금까지 엄청 조심하면서 살았잖아. 그래서 안전지대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았고. 그 틀을 한번 깨 보는 건 어때? 난 사랑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그 말에 소연도 나선도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죄라도 지으라는 말. 진짜 죄를 지으라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해보라는 말이 이렇게 강력하게 와닿았던 적이 없었다.

“가다 보면 계속 가야 할 길인지 그만 가야 할 길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 갈까 말까 고민할 시간에 일단 가보는 거야. 너는 워낙 신중한 타입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가보라고 등 떠밀어도 1센티밖에 못 가는 사람이라는 거 아니까. 규범 안에서만 살려고 하고, 욕먹을 짓 안 하고, 선 절대 안 넘으려고 하고.. 너도 좀 그런 바른생활 틀에서 좀 벗어나 봐. 설사 그 사람이 유부남이라고 치자. 그러면 관두면 되잖아. 아, 난 몰랐네 하고. 백하면 되는 거지.”

그 상황에서 고백점프게임이 생각났다. 점프해서 모호한 이 상황 너머로 갈 순 없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자신을 믿어. 소연아.”

그 말이 어쩐지 큰 위안이 되었다.   

   

종수와는 토요일 오후 3시쯤 만났다. 소연의 동네를 알고 있어서 일부러 그쪽에서 약속을 잡았다. 소연이 잘 알고 있는 커피숍이었다.

크진 않지만 모든 음료를 직접 만드는 카페인 데다가 젊은 사장이 연중무휴로 일하고 있어서 소연이 응원 겸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오는 곳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볶은 커피 향이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그런 곳이었다.

사장의 적당한 친절도 편했다. 간단한 안부와 새로운 메뉴를 설명할 때를 제외하고는 불필요한 수다를 떨지 않는 것도 소연의 마음에 들었다.

종수와 어디서 만날지 장소를 찾다가 이곳으로 낙점한 것도 소연의 마음이 편안했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북적거리는 프랜차이즈 커피숍보다는 훨씬 아늑하고 편안했으니까.

“여기 요즘 같은 계절인 코코넛커피가 맛있어요.”

코코넛을 원료로 만든 커피인데 적당히 달콤하고 진해서 맛이 좋았다.

“쉬는 날 일부러 여기까지 오신 거 아니에요?”

소연이 인사차 물었는데 종수는 손사래까지 치면서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웃는 종수의 얼굴이 무척 사내답다고 느꼈다.

쉬는 날은 뭐 하면서 지내냐고 소연이 물었다. 소연은 이 질문을 던지며 나올 수 있는 대답의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밀린 집안일도 하고, 날씨 좋은 날은 자전거 끌고 나가서 사이클도 타고, 마트 가서 장도 보고.. 하는 일 없이 바빠요.”

여기까지의 답변을 들어보면 혼자 사는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에 가까웠다. 소연은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발끝에서부터 용기를 끌어올려 물었다.

“혼자 사세요?”

왠지 그 말을 하면서 마음도 같이 들킨 것 같아 귀에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귀가 빨개졌을 것을 생각하니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얼른 그 열기를 식혀야겠다고 생각해서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빠까지 소환했다.

“네. 혼자 살고 있어요.”

빠바바밤~~~~!!!!!!!

종수의 그 답변과 함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어디선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하하. 저하고 동지네요. 우리 혼자 사는 사람끼리 친하게 지내요.”

소연은 자신의 속내가 들키지 않을 만큼의 명랑함과 부담 느끼지 않을 만큼의 친근함을 섞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종수도 웃으며 소연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악수했다.    

  

그날 이후 소연과 종수는 종종 연락을 했다. 소연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어느 날은 혹시 핸드폰이 고장 나서 종수의 연락을  못 받는 건가 싶어서 공연히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보기도 했다. 그러다 종수에게서 “독감 유행이래요. 독감 주사 꼭 맞아요.”라는 별 거 아닌 문자가 와도 몸이 이상하게 배배 꼬였다. 작디작은 소리에도 간질간질한 느낌. 소연은 생각했다. ‘이게 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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